• 천국과 지옥 사이
    [끝나고 쓰는 노점일기] 소리없는 홍보 전쟁
        2014년 02월 06일 01: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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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 거리

    내가 노점을 하고 있는 곳은 디자인 거리이다.

    도대체 왜 디자인 거리인지 알 수 없는 디자인 거리.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디자인은 곧 비움이라고 했다던가. 아무튼 그 디자인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인도 한쪽에 이곳이 디자인 거리라는 알림판만이 있을 뿐이다.

    디자인 거리의 인도는 넓다. 인도의 폭도 넓지만 건물 앞 사유지 부분도 넓은 그 거리에 넙죽 주저앉은 내 마차. 처음에는 내 마차에 대한 단속만 보였으나 그곳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있었다.

    정확한 규정을 알 수는 없으나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디자인 거리에서 간판이나 현수막 부착에 대한 기준은 매우 엄격한 듯 했다.

    안경점은 프랜차이즈에서 정한 디자인으로 유리벽과 유리벽 사이 외벽에 붉은 색깔을 넣었다가 꽤나 많은 벌금을 냈다고 했다. 4층의 학원은 아예 간판이 없고 창문 안쪽에 흰 종이에 프린트해서 학원명을 붙였는데, 그것도 떼라고 한다고 학원장의 어린 아들이 투덜거렸다.

    노래방 남자가 내 마차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는 간판은 현관 위에 붙은 간판이 아니었다. 간판을 하나밖에 할 수 없으니 지하로 내려가는 경사로면 천정에 노래방 표시를 한 것인데, 그게 잘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노래방 표지는 현관 앞에 정면으로 서지 않으면 어디서도 원래 잘 안 보인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아우성은 간판이 아니라 인도에 세워두는 현수막(입식 배너)에 있었다.

    우리 건물에서는 3층의 치과, 5층의 한의원, 그리고 문을 닫은 6층의 학원이 입식 배너를 건물 현관 앞에 세워둔다.

    노점의 입장에서 보면 사유지 경계선까지 내놓고 세워도 될 것 같은데도(인도에서 장사를 하다가 구청에서 단속이 나오면 사유지 부분으로 이동하면 구청에서 단속을 못하니까) 건축선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규정이 되어 있는지 현관에 바싹 붙여 세워둔다. 마차에서 쳐다보면 배너들끼리 서로 그중 나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옥신각신하는 것 같다.

    저렇게 건물에 바싹 붙여둔 배너가 얼마나 광고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지만, 이것들이 경비아저씨에게는 애물단지다. 바람이 많은 시흥대로에서 입식 배너들은 바람만 불면 쓰러지거나 현수막이 떨어지거나 심하면 굴러다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자리를 비울 때면 그 배너들의 관리는 내 차지이다. 6층 학원의 배너에는 계고장 스티커까지 붙어 있는데, 왠지 내 마차와 똑같은 처지라는 생각에 짠하기까지 하다.

    바람 부는 날이면 내 마차도 펄럭이고, 배너도 펄럭인다.

    디자인 거리에서 펄럭이는 것들은 내가 지킨다.

    단속이 없는 주말이면 모든 건물의 배너들이 인도 쪽으로 나온다. 특히 옆 건물 지하의 초밥집은 대형 공기주입식 광고물을 세워둔다. 길 건너에 대형마트가 있다 보니 주말이 근처 상가에게는 대목이기도 하다.

    바람이 많이 불던 어느 주말 저녁. 초밥집 대형 광고물이 바람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입식 배너처럼 무거운 걸 더 올려놓거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마차를 동여매는 고무바로 그 광고물과 건물옆 가드레일을 묶어 두었다. 썩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마차를 접을 때까지 초밥집 장사가 끝나지 않아 아무도 나와 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짧은 여분의 고무바로 내 마차를 묶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초밥집 사장님은 고무바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단골을 확보했고, 그 집에서 가장 맛있는 새우장초밥도 공짜로 맛볼 수 있었다.

    마차의 재발견

    내 마차에 노래방 현수막을 건 이후에 우리 건물 상가에서는 눈을 반짝이며 내 마차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마차가 광고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제일 먼저 찾아온 분은 우리 건물 5층의 한의원.

    개업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한의원은 주변에 수두룩 빽빽한 한의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홍보에 열심이었다. 실장님이라는 여성분은 떡볶이를 포장해달라며 디자인 거리의 엄격한 규제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시더니 내 마차의 옆 현수막을 바꿔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바로 다음날 내 마차에는 새 현수막이 붙었다.

    노래방 현수막은 노래방 광고만 했기 때문에 불법으로 단속을 받았지만, 한의원이 만들어온 현수막은 노점의 메뉴를 적은 것이라서 불법광고물 단속에 걸리지 않았다. 좀 이상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디자인거리 대로변에 떡하니 위치한 내 마차의 현수막은 멀리에서도 잘 보였다. 한의원은 매우 흡족해 했다. 한의원은 개업 1년 기념품 그릇세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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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원에서 마차에 붙힌 현수막

    그 다음 찾아온 곳은 3층의 치과였다. 치과의사인 듯한 고운 남자 분은 수줍음이 많은 듯 했다. 나보고 쓰면서 필요한 사람들을 주라며 치과를 홍보하는 휴대용 화장지를 한가득 들고 왔다. 나는 그러겠노라 했다.

    다음날 간호사 언니가 내려왔다. 똑부러지게 이야기를 전달하지 못한 치과의사 대신 치과 홍보를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원래 3층에는 다른 치과가 있었는데, 몇 개월 비어 있다가 지금의 치과가 들어온 것인데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른다고. 그리고 현수막 이야기를 했으나 마차에는 더 이상 현수막을 걸 수 없었기에 다음 차례엔 꼭 치과현수막을 걸어달라는 당부를 하고 갔다. 나는 다이소에서 휴지를 담을 수 있는 예쁜 통을 하나 사서 이쑤시개통 옆에 비치하고 손님들에게 나눠주었다.

    옆 건물에 있는 상조회에서도 왔다. 상조회에서 일할 주부사원을 모집하는 영업직원이었다. 일단 그 언니는 일당 8만원이라며 노점보다 힘들지 않고 안정적이니까 노점보다 상조회 사원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판촉물인 비닐장갑과 위생백을 몇 개 들고와서 주기도 했다.

    세 번째쯤 왔을 때 그 언니는 하나씩 뜯어갈 수 있도록 만든 광고지를 들고와서 마차에 부착해달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언니는 잊지도 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 홍보물이 줄어든 양을 체크하고 채워놓았다.

    일요일 오후면 예배 마치고 전도하러 나오는 분들은 내 마차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하고 홍보를 한다. 나는 그분들의 짐을 맡아 주었고, 잠깐 잠깐 앉으실 수 있도록 의자를 내어드렸다.

    어느 날엔가는 학생이 야학교사를 모집하는 광고지를 들고 왔다. 여기에도 야학이 있나보네? 이주노동자를 위한 야학이었다. 나는 광고지를 마차 들어오자마자 제일 잘 보이는 메뉴판 옆에 붙여주었다.

    야학교사 모집전단을 본 오뎅단골인 옆에옆에옆에 건물 지하의 헬스장 총각은 헬스장 포스터를 한 장 들고 왔다. 마차 하단에 붙여주었다.

    내 마차 뒤에는 커다란 전기배전관 같은 게 있다. 그 옆면은 각종 광고지가 붙는 단골장소이다. 배낭을 멘 사람이 와서 붙이고 가면 경비아저씨가 떼어낸다. 그 배전관 뒤의 가드레일은 저녁에 누군가 현수막을 붙여 놓고 아침에 구청에서 떼어가는 일들이 반복된다. 늦은 밤에는 예쁜 언니들의 헐벗은 사진들이 들어있는 명함이 길거리를 나뒹군다.

    아무 것도 없는 듯 한 디자인거리. 그러나 그 곳은 매일매일 치열한 홍보전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아무 것도 없는 사막 같은 디자인 거리.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소박한 알림들을 붙여놓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찬가지로 그냥 버려질 수 없는 내 마차에 옹기종기 모여 붙었다. 꼭 사막 가운데 우물 같다. 나는 으쓱해본다.

    “디자인 거리가 아름다운 건 내 마차가 있어서야…”

    투쟁이야

    같이 살 수 있는 곳. 그곳이 천국이지 뭐. 단속만 없다면 말이다.

    나에게 민원을 넣는 1층 가게는 하루에 열 번씩 나를 신고했다. 하루에도 두 세 번씩 구청과 파출소에서 나왔고 내 마차는 계고장으로 도배를 할 지경이었으며, 마차를 옮겼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하느라 장사할 겨를도 없었다.

    먼저 탐색전. 그 가게 앞에는 구두수선대가 있다. 이 거리의 왕고다. 구두 수선대 아저씨는 위쪽의 거리에서 이동해서 내려왔는데 그때도 그 가게에서 민원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구두 수선대는 지자체의 허가를 받고 설치하는 것임에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음…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다음은 협상제안. 이번에도 역시나 당사자가 나서는 건 좋지 않다고 지역장님이 그 가게 사장을 만났다. 나는 결과와 상관없이 같은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지역장님의 배려였다.

    사장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잉어빵이라 그냥 두고 봤는데, 떡볶이로 바꾸고 나서 사계절 내내 여기에서 장사하겠구나 했단다. 노점 하나가 늘어나면 다른 노점들도 늘어갈 것이기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 이유는 여기가 디자인 거리이기 때문이란다. 노점 하라고 디자인거리 만든 게 아니란다. 이건 무슨 이야기이신가요.

    그 가게와 내 마차는 거리가 있다. 내 옆으로 넓디 넒은 인도에 노점이 들어오더라도 그 가게와는 더 멀어지는 곳이다. 그 가게 앞에는 구두수선대가 있고, 주차장 진입로가 있어서 노점을 할래야 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우아하게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 이상 방어로는 버텨내기 어렵기도 했지만, 역시나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다. 그러나 나는 지역노점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가깝고 친한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면전. 그 가게 사장이 가장 싫어라 하는 건 노점이 늘어나는 거렸다. 나는 그냥 내 자리에서 마차를 지켰고, 구로에서 차량으로 과일장사를 하시는 사무국장님이 오셨다. 그 날 장사할 포도를 싣고. 그리고 방송차가 왔다.

    골목의 과일장사 아저씨께는 민원 때문에 하루만 과일장사를 하는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구두 수선대 아저씨에게도 손님이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든 후 하루만 장사를 하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마차도 필요 없었다. 포도를 30개의 바구니에 담아 그 가게 현관 앞쪽 인도에 배열해놓고 한 바구니에 3천원씩 팔았다. 방송차에서는 투쟁가를 틀었다. 색지에 앞의 가게에서 노점상을 못살게 한다고 써 붙여 두었다. 손님이 줄을 섰다.

    “무슨 일이래요? 과일 싸네…”

    구로 사무국장님이랑 지역장님은 과일장사가 훨씬 잘된다고 나보고 품목을 바꾸라며 농담을 하셨다. 우리는 과일 판 돈으로 점심을 먹었다. 거리에 서 있는 봉고차로 짜장면을 시켜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우리는 봉고차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노점을 하면서 처음 해보는 일들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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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고차에서 시켜 먹는 자장면

    마무리. 포도를 팔기 시작한지 3시간 만에 사장이 나왔다. 지역장님과 가게로 들어간 사장은 각서를 써주었다. 지역장님이 요구한 것도 아닌데 다시는 민원을 넣지 않겠다는 각서를 사장이 스스로 써주며 빨리 끝내달라고 했단다.

    평가. 지역장님은 계속되던 민원문제를 해결한 것 같아 안도하며 돌아가셨다. 구로 사무국장님은 내가 신도림역 김밥노점 단속 때 도와드렸던 것에 대한 보답을 했으며, 내가 빨리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을 남겨두고 구로로 장사하러 가셨다.

    골목의 과일장사 아저씨는 ‘역시 대로변이 장사가 잘되는구나’ 하셨을 게다. 구두 수선대 아저씨는 1층 가게 사장이 항복한 것이 고소했을는지 모른다.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싸고 맛좋은 포도를 샀다.

    1층 가게 사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과정을 지켜보던 우리 건물 경비아저씨와 청소아줌마, 옆 건물 주차장 경비아저씨와 야쿠르트 아줌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오늘 강자였을까, 약자였을까.

    지옥문

    나는 1층 사장이 미웠다. 내가 약자니까. 1층 사장은 내가 미울 것이다. 사장이 생각하는 정의가 아니니까. 그리고 더 이상 강자가 아니니까.

    그런데 말이다. 나에게 소리 지르던 노래방 남자도, 나를 미워하는 1층가게 사장도, 단속을 나온 구청직원까지도 내가 가졌던 만큼의 싸늘한 눈빛은 아니었다. 그들보다 내가 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점을 시작하기 전. 동료의 후배가 타로점을 보며 내게 말했다.

    “칼을 들고 있네요. 엄청 갈등이 많은 곳에 있나봐요. 지금 언니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었어요”

    나는 늘 분노하며 살았고, 적을 규정하며 살았다. 나에게 정의는 단순하고 선명한 것이었고, 그 외의 것은 적이거나 회색이었다. 나는 언제나 약자였고 강해지고자 했지만, 강한 것은 미워했다. 나는 그렇게 사람에 대한 시선을 잃어갔다.

    나는 여전히 매일 지옥문을 본다. 내 안의 의심을, 내 안의 분노와 미움을, 내 안의 비관과 조소를 본다. 그것이 얼마나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일인 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매일 지옥문 앞에 선다. 나는 저 문을 열지 않을 꺼야, 결코 들어가지 않을 꺼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문을 닫는다.

    2012년 5월. 그러나 나는 여전히 칼을 들고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필자소개
    전직 잉어빵 노점상. 반빈곤 사회단체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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