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기훈의 최후진술
    "검찰과 법원, 반성할 마지막 기회"
        2014년 01월 23일 04: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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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기관에 의해 고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준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인간으로 왜곡되고 조작돼 22여년이 넘게 가혹한 인격살인을 당해왔던 강기훈씨가 지난 16일 재심재판에서 최후진술을 했다. 그 절절한 최후진술문을 다소 시간이 지났지만 그대로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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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기사 링크

    지난 1년 여 간 수고하신 재판부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 진술서를 작성하며 과거 소위 유서대필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담당했던 검찰과 사법부의 검사, 판사의 실명을 공개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검찰, 사법부라 하거나 검사, 판사라고 표현할 경우에는 자칫 모두가 그렇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고 책임 소재도 애매해진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하긴 과거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검찰에 대해서는 검찰이라거나 검사라거나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은 있습니다만, 그래도 역할이 달랐으니 구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점 염두에 두시고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지금껏 제게 선명하게 떠오르는 몇 가지 장면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1991년 5월 18일, 신촌로터리 근처에서 강경대 열사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던 저는 전민련에서 함께 일하던 동기가 급히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매우 당황한 듯 했고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제게 국민일보 석간 사회면을 보여줍니다.

    ‘지난 5월 8일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는 본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전민련에서 같이 근무하는 K모 씨에 의해 대필되었다’는 검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특종기사였습니다. K모 씨라 하면 저 밖에 없었습니다.

    “하다하다 별 짓을 다 한다”, “좀 웃기지 않나”는 게 첫 느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기소, 재판, 유죄 확정 그리고 20년을 훨씬 넘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제 삶을 흔드는 사건이 되리라는 상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2

    1991년 6월 24일, 제가 명동성당 농성을 끝내고 검찰에 자진 출두할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성당의 비탈길을 내려오던 도중 길 건너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민가협 어머니들을 봅니다.

    저를 끝까지 보호하겠다며 함께 내려오던 명동성당 주임신부가 발을 헛디디고 넘어집니다. 취재진 사진기자들을 밀어내는 경찰과 검찰 수사관들이 보입니다.

    저를 데려갈 차량 앞에 도착한 순간 제게 차가운 느낌의 수갑이 채워집니다. 검찰 수사관 여러 명이 저를 차에 우악스런 손길로 밀어 넣습니다. 커튼으로 전부 가린 창문들이 보이고 비어있는 좌석에 저를 앉힙니다. 온갖 욕설이 날아옵니다.

    당시 검찰의 의도는 이러했을 것입니다.

    ‘보라, 오늘 우리는 희대의 악마를 검거했노라, 지금 세상이 시끄럽고 어수선한 이유는 다 이 놈 때문이었노라’

    이런 정치적 계산과 노림수가 있는 이벤트의 한 가운데 있는 줄도 모르고 저는 막연히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법정에 가서 진술을 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재판부가 있다면 금방 석방될 것이라”고요.

    #3

    같은 날. 검찰청. 검찰 수사관 입회 하에 검찰청 유치감 책임자는 옷을 전부 벗으라 제게 명령합니다. 팬티를 내리고 항문을 검사합니다. 그리고 ‘비둘기장’이라 불리는 유치감에 가둡니다.

    “영감님이 찾으신다”며 저를 불러낸 검찰수사관이 손을 뒤로 하라더니 수갑을 채웁니다. 제 팔을 뒤에서 들어올리며 꺾습니다. 구부정한 자세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검사 취조실에 들어섭니다.

    “나 신상규 검사다. 쑈 하고 있네. 늬들은 뽕쟁이(마약사범)나 똑같은 놈들이여”

    마약관련 수사를 전담한다는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의 신 검사는 저를 보자마자 뽕쟁이와 똑같은 놈이라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기자들에게 자진출두의 변을 읽다 울음을 터뜨린 것은 그에게는 쇼로 비쳤던 거였습니다.

    #4

    그리고 며칠인지 기억할 수 없는 검찰청 조사실.

    잠을 재우지 않고 반복 질문과 욕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늦은 밤, 혹은 새벽이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하고 너무나 어지러워 눈을 밤쯤 감는 나를 지켜보던 검사는 내게 일어나라 명령합니다.

    “너 졸아서 안되겠다, 잠시 서 있어”

    어쩔 수 없이 일어섭니다.

    옆에 도열해있던 검찰 수사관 너 댓 명이 잠 깨우는 맛사지를 한다며 제 뒷목을 강하게 지압합니다. 호송담당 서울구치소 교도관은 늦은 퇴근에 짜증이 났는지 아주 세게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습니다. 어깨와 팔이 뻐근하게 저려옵니다.

    “이게 원칙적인 시승시갑이야, 이제 고만 자백하고 끝내자고. 나도 퇴근 좀 하자”며 내게 하소연합니다.

    #5

    1992년 대전교도소

    중구금 독거시설에 수용되어 있던 저에게 담당교도관이 시찰구 앞에서 저를 부릅니다.

    “별 일 없어? 음, 말야. 법원에서 판결문이 왔네. 두꺼워서 다 읽지는 못했는데 기각이라는 군.”

    그리고는 두툼한 판결문 뭉치를 배식용 구멍으로 밀어 넣어줍니다. 주문을 읽습니다. 내용 훑어보다가 던져 버립니다. 내용은 둘째 치고 문장 같지도 않은 문장에 수없이 반복되는 논리적 비약에 이게 확정판결문이란 건지.

    강기훈씨. 사진은 국가인권위원회

    강기훈씨. 사진은 국가인권위원회

    지난 이십 여 년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억나는 장면들입니다.

    업무 중에도, 대화를 나누다가도,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에 있을 때도, 심지어 꿈 속에서도 무한반복하며 제 삶의 커다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잊으려고 해봤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도 헛된 것이었습니다.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슬며시 찾아와서 제 마음을 흔드는 과거의 기억들은 지나간 일이 아닌 현재였으며 눈을 뜨고 경험하는 가위눌림이거나 악몽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정도가 심해지면 ‘정상’의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 인간 도대체 왜 저래, 도무지 어디로 튈 지 알 수가 없어. 또라이 아냐”

    “업무에 집중 안 하시고 뭘 하는 건가요?”

    “사람들과 대화하는 거 싫으세요?”

    “내게 무슨 유감 있나요? 늘 인상 찡그리고 뭐 하자는 건지”

    십 수 년 간 직장생활 동안 제가 심심찮게 듣는 말들이고 지금 역시 별로 변한 건 없습니다.)

    어지간하면 과거의 일이니 잊을 만도 한데,

    혹 여전히 생각이 난다 하더라도 털고 일어서면 되는 것인데

    또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기 마음 탓이니 잘 다스리면 되는 것인데.

    저를 걱정하며 이런 충고를 해주는 이들에게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꽤 많은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수 년 전, 부친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시자 찾아온 패닉 상태를 견디다 못해 찾게 된 정신과에서 의사 선생님은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꾸 기억을 되씹지 마시고요, 표현을 하세요. 욕을 하고 싶으면 하시고 환자분은 그래야 하는 타입이세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누구에게 욕을 해야 할 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검찰일까요, 법원일까요. 서울지검 소속이었던 강신욱, 신상규, 송명석, 안종택, 남기춘, 임철, 곽상도, 윤석만, 박경순 검사나 노원욱, 임대화, 부구욱, 박만호 판사와 같은 구체적 대상인지. 전재기 전 서울지검장인지 정구영 전 검찰총장 인지 아니면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인지. 아니면 대한민국 혹은 인간사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저는 유서를 대신 쓴 적이 없으며 혹시 꿈에라도 같이 일하던 동료의 죽음을 부추기거나 자살을 돕거나 그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비인간적인 상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20여년 동안 검찰은 법원은 그리고 대한민국은 제게 자살방조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게 씌워진 혐의와 그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살한 김기설의 유서는 본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고 강기훈에 의해 대필된 것이다. 유서의 내용을 보건데 정권을 타도하려는 목적이라 생각되며 같이 일하던 동료의 죽음을 부추긴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방조죄가 성립한다.’

    합리적인 사고나 상식이 무너진 세상에서는 법도 공의도 인권도 없습니다. 오직 권력을 쥔 자의 폭력과 오만함만 넘쳐납니다. 법의 집행을 빙자한 폭력-경찰의 강제 진압 때문에 애꿎은 젊은 목숨이 스러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목숨까지 버리는 데도 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커지고 시위의 양상은 격렬해져갔습니다.

    김기설123

    재심 결정 이후의 방송 화면

    이 때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김지하 씨의 발언이었을 것입니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그는 정권에 대한 항의와 시위를 하는 세력에 대해 “네크로필리아 시체선호증… 싹쓸이 충동, 자살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이라며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고 말합니다.

    뒤이어 서강대 총장 박홍 씨의 “연이은 분신에는 배후세력이 있고 확실한 증거도 갖고 있다”는 발언, 청와대와 안기부 검찰 경찰의 고위직이 모인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분신 배후를 수사하겠다는 내용의 브리핑이 이어집니다.

    1991년 5월 초부터 중순에 이르기까지 경찰 검찰을 비롯한 공안기관에서 광범위한 형태로 분신배후 수사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91년 5월 2일 분신한 안동대 김영균 씨 사건 이후에도 분신배후 수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김영균 씨가 소속해있던 민속반 동아리의 선배들을 모조리 수배하고 검거한 후에 갖은 폭력과 고문을 가하며 분신배후를 만들려다가 이적표현물 소지 등으로 몇 명을 구속하고 마무리했습니다.

    같은 해 5월 10일 전남대에서 분신한 노동자 윤용하 씨 사건에서는 윤용하 씨 친형을 잡아놓고 “전남대생들이 윤용하 씨에게 술을 먹인 후 태워죽인 것으로 하자”며 회유하다가 친형이 수사관들을 피해서 범국민대책위에 제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100만 명 이상이 모여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1991년 5월 18일. 서울지검 강력부는 김기설 씨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발표를 합니다.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전대미문의 사건인 만큼 그 파장은 컸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되었기에 움직일 수 없는 성역으로 느꼈습니다. 필적 감정의 절차와 내용이 얼마나 보잘것 없고 주먹구구식이었는지 알려진 것은 얼마 간의 시간이 흘러서였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어도 부나비처럼 이슈를 찾아 움직이는 이른바 언론이라는 작자들을 속성을 이용하는 모든 방법들이 총동원됐고 그 중심에는 검찰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신문, TV를 비롯한 모든 언론매체들은 ‘필적이 맞냐, 틀리냐’를 대서특필하기 시작합니다. 정권의 비리,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살인, 한진중공업 박창수 씨의 의문의 죽음, 노태우 정권에 대한 국민적 항의는 모두 실종되어 갑니다.

    마치 이 모든 소란의 원인이 재야세력에게 있는 듯, 재야민주화 운동의 집결체인 전민련과 범국민대책회의 그리고 제게 질문을 합니다.

    “유서를 대신 써주며 자살하라고 했소? 대학도 나오지 않은 자의 죽음을 부추기려 유서를 쓴 것이오? 대필의 동기를 좀 알고 싶은데요. 제비뽑기를 한 것인지, 자살특공대가 있는 것인지. 노태우 정권을 타도하려는 목적인 거요?”

    검찰이 소위 ‘유서대필 사건’이라는 희대의 코미디와 같은 사건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서 치도곤을 당했을 지 끔찍하기조차 합니다. 분신배후, 제비뽑기, 자살특공대, 그리고 네크로필리아, 죽음의 굿판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를 만들고 세상에 사실인 듯 공표하고 공권력을 동원해서 ’마녀사냥’에 골몰한 당시의 권력과 공안기관의 행태는 가히 ‘악마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한 때 저는 소위 ‘유서대필 사건’이 “검찰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서 오류가 빚어낸 해프닝일 뿐 공안부나 특수부 검사들도 아닌 마약전담 수사를 담당하는 서울지검 강력부가 그 무슨 정치적 계산과 의도를 갖고 있겠느냐는 막연한 믿음과 약간의 기대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수사과정이나 원심 법정에 국과수 필적감정서의 오류를 증명하는 증언이나 증거들이 무척 많이 제출되었으며 그 어느 하나만을 찬찬히 살펴봐도 제 무고함은 증명되고도 남을 만큼 충분했다고 여겨집니다.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그 정도로 생각이 어리숙했던 당시의 제 모습을 생각하면 발등을 찍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옵니다.

    정권의 위기를 국가와 나라의 위기라고 생각하는 ‘검찰’이라는 조직이 한참 마녀사냥 중인 엄중한 때에 이성이 작동한다거나 오해에서 비롯된 실수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20년 이상 경험하고 보고 느낀 다음에서야 “이제 알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하고 있는 이 가련할 정도로 어리바리한 이 인생은 뭐란 말입니까.

    원심 법정에 요건불비의 기소의 변-공소장-을 제출하고서도 재판 내내 저를 비롯한 모든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다 같은 패거리라고 광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던 신상규 검사.

    그에게 비친 저는 뽕쟁이, 분신배후, 아버지도 청부살인할 수 있는 자이거나 혹은 극렬 공산주의자 빨갱이었을 뿐이며, 제 편에 서서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증거조작의 가담자이거나 사대주의자(일본인에게 감정을 맡겼다는 이유 하나로)에 불과했습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을 주위에서 가끔 보곤 합니다만, 그 존재가 일선에서 수사를 담당하고 범죄를 다루며 무고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검찰’의 일원이었다는 것이 제 비극이었습니다.

    정권의 위기를 구해낸 검사로 당연히 논공행상이 있었다고 저는 추정합니다. 그 후에 신 검사는 검사장으로, 검찰총장 후보로 그리고 퇴임한 후에도 여전히 공직에 있습니다.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 소속으로 유서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출세가도를 달리시는지, 자발적 퇴직이나 비리에 의한 사직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검사장급 이상으로 영전했고 부장검사였던 강신욱 씨는 검찰 몫으로 대법관이 되었습니다.

    강신욱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강신욱 전 부장검사

    대법관 지명과 청문회가 있던 즈음 유서사건에 대한 질문을 하는 기자 앞에서 강신욱 씨는 “(본인이 재판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면) 재심을 청구하면 될 일…”이라고 했지요. 그러더니 2009년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재심권고 결정을 내리자 말을 바꿉니다.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난센스로 특정 단체가 입맛에 맞는 결론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그의 진심일까요.

    1992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이 허위뇌물 감정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을 때 김형영 씨는 검찰의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합니다. 그리고 당시 고등법원 형사부 검사가 김형영을 수사하는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합니다.

    “허위감정 혐의 입증하지 못하면 경찰 몇 명 옷 벗을 각오를 하라”고요. 경찰수사는 거기서 멈칫합니다. 고등법원 형사부의 부장검사는 강신욱 씨였고 그가 유서사건 항소심에서 행여나 영향을 끼칠까 싶어 경찰에 압력을 넣었다는 보도는 꽤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사실 지난 20년 동안 유서사건에 대한 검찰과 담당 검사들의 태도는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실체적 사실을 알리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해왔을 뿐입니다.

    제가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93년도, 서울방송의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이 제작한 ‘유서는 누가 썼는가’라는 프로그램은 방송일자를 지정하고 블럭광고까지 편집된 상태에서 돌연 방송 취소를 결정합니다. 검찰과 법원 쪽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만 확인 보도됐고 제작진과 진행자가 서울방송 고위직에 항의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우여곡절 끝에 1997년이 돼서야 방송이 됩니다만, 그 때는 이미 김형영 등에 대한 법정에서의 위증 혐의를 처벌할 수 있는 공소시효가 끝나던 시기였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조금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이 떠들 때도 저는 그다지 그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법개혁이라는 게 화두가 되었던 국민의 정부 초기에 소장 판사들이 모여 부끄러웠던 사법부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대표적인 사례로 ‘유서대필 사건’을 거명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서사건의 담당했던 검사들과 검찰의 입장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같은 얘기를 반복했습니다.

    “법률 절차가 끝난 사건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수사에서 재판에 이르는 전 과정은 어떤 외압도 없었고 적법하게 진행되었다”

    모든 것들이 막혀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습니다. 그저 재수없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셈치고 잊는 것, 살다보면 이러 저러한 억울한 일들이 있을 수 있는데 남들보다 조금 운이 나빴을 뿐이라 생각하는 것, 일에 파뭍혀 지내거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제 신분의 신원과 억울함을 벗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체념하는 것만이 하루하루를 생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재심의 요건이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지를 나중에서야 알게 된 저는 “억울하면 재심을 청구하라”는 강신욱 전 검사의 말이 ‘비아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오랫동안 분노의 나날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사법시험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유서대필사건의 대법원의 판결문으로 자살방조 사건의 판례를 공부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그 어느 날의 처참한 기분은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판결문을 몇번 씩이나 읽어보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의 맥락도 이해되지 않는 한 마디로 국어나 논리학의 기본도 무시한 이런 무지막지한 판결문으로 공부를 한다니. 이런 텍스트로 공부한 법률 전문가들이 나중에 무슨 일을 하게 될까요. 정말 암담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소위 ‘유서대필 사건’은 계속 보도되고 정치사회 ‘쟁점`이 되어 왔습니다. 과거의 불행했던 일이라 치부하고 어쩌면 잊고 싶었을 지도 모를 1991년의 기억들은 이승을 뜨지 못하는 망령처럼 떠돌면서 제 삶을 압박했습니다.

    저만 고통스러웠을까요? 제 주변의 선후배들 그리고 가족들의 삶은 하루도 유서대필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죽어서도 명예롭지 못한 망자에 대한 부채감, 그리고 하루 한 시각도 용납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저에 대한 연민, 그리고 처절하고 지옥같았던 시간의 기억들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틀어 놓았습니다.

    “너의 문제를, 네 사건을, ….”하는 말들이 너무나도 싫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과거의 기억에서 조금 놓여나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하려 하면 할수록 이런 얘기들은 더 거세게, 강한 톤으로 들려 왔습니다.

    “뭘 어찌하라는 말씀입니까? 저는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유서사건의 테두리 안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신세인데 모르시는군요. ”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는 선배들에게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고는 며칠 동안 제 말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선배들, 동기들을 생각하며 잠 못들며 괴로워하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재야 민주화운동을 해왔던 게 나이들어서는 명예롭고 나름 헛되게 살지는 않았다는 자부심은 남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심각한 오해와 착각이 있을까요. 검찰과 사법부가 아니, 대한민국의 법률절차가 동료의 죽음을 부추긴 자살배후조종자라는 딱지를 저에게 붙일 줄은 몰랐습니다.

    지나온 시간 동안 인간적 모멸감과 수모를 적지 않게 겪었습니다. 얼굴이 조금 알려진 탓인지 저를 알아보고 적대적인 말을 내뱉은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뭐랄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도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가리키며 “저런 새끼는 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던 어느 노인 양반이 생각납니다. 버스 옆자리에서 저를 알아보고 쌍욕을 하던 사람도 기억나구요. 업무상 만난 자리에서 저를 알아보고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런데 유서는 왜 써주신 건가요?”라 질문하더니 “유서 대신 쓴 게 뭐 죄가 되나요?” 하던 분, 나름 호의와 관심의 표현이었다는 걸 잘 압니다.

    그저 추악한 권력이 퍼뜨린 소문과 완결된 법적 절차가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한 것이니 그저 유감일 뿐입니다. 빨갱이 세퀴 빨리 뒈지라거나 제가 기설에게 죽으라 명령을 내렸다는 얘기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인터넷에 써대는 분들 역시 유감입니다. 그래도 당신들은 원심재판부 판사들보다는 선량한 존재들입니다.

    원심 항소심 재판장 임대화 씨의 천박한 태도는 별로 입에 담고 싶지 않습니다만 한 마디만 드립니다. 그는 편견에 가득한 사람으로 법정에 출석한 참고인에게 남녀혼숙 여부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배석판사였던 부구욱 씨는 재심 전의 2심 판결 후에 법원에 회람문서를 작성해서 돌렸습니다.

    “강기훈은 틀림없는 범인이고 필적감정이 아닌 정황 증거로도 그렇다. 그는 선량한 사람을 기망해온 악마다” 뭐 문장 그대로는 아니지만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판사의 생각이 이 정도면 가히 압권입니다. 이것은 편견이고 몰이성이며 법의 원칙과도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세상은 조금 나아지고 달라졌을까요, 혹시 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없었을까요.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제 2, 제 3의 강기훈은 계속 생겼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민초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충분히 지옥입니다. 권력자들의 뻔한 거짓말에 지치고 삶은 고달프며 ‘상식’을 갖고 살기가 여전히 버겁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재심의 기회를 가진 운이 좋은 편이라 해야 할까요.

    오늘 결심 공판을 하고 있으니 얼마 후에는 판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판결이 나오더라도 재판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으로 가겠지요. ‘재심청구를 고등법원이 받아들인 것이 지난 2009년도이고 검찰의 항고로 인해 대법원에서 흐른 시간이 거의 3년이니 이번엔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낼지 알 길이 없습니다.

    23년 전 검찰에 출두하던 저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재판은) 정권의 부도덕과 불의를 심판하는 자리가 될 것이며, 저는 증언자로서 그 자리에 설 것이라고요.”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요, 어찌 일개 재판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번 재판이 대한민국 수사기관과 사법절차가 어느 수준인지를 가늠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재심을 열기 위해 노력하고 그 시간을 견딘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서대필 사건이 추억에서나 존재하는 게 되길 바랍니다. 법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어떤 ‘편견’을 가지게 되면 얼마나 불행한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참고자료가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제가 겪어온 시절은 아무렇지도 않게 털 수 있겠다는 마음입니다.

    법정에서 제가 진술하는 기회도 오늘로서 끝입니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제는 좀 놓여나고 싶습니다. 잔혹한 시간들도, 끝도 없이 지속됐던 불면도, 여러 사람들을 저주하며 보냈던 시간과도 이별하고 싶습니다. 할만큼 했구요, 잘 견뎠잖습니까. 이 정도면 과거의 잘못된 수사와 판결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저에게 검찰과 법원은 고마워할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재심법정에서도 여전히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검찰에게 한마디 남기고 싶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할 검찰이 조롱거리가 된 현실의 책임은 검찰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이번 재심이 열리기까지 많은 분들이 애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제 몸이 병들어 지쳤을 때 후원해주신 분들에겐 큰 빚을 졌습니다. 꿋꿋이 잘 버티겠습니다.

    두서없는 이야기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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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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