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여행-2
    '무질서'가 곧 '질서'인 중국
    [파독광부 50년사]한달 넘는 중국여행을 마치며
        2014년 01월 21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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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에는 일면에 크게 1994년 중국인의 평균 월수입이 1227원(환화 약 12만 5천원)에 달하고 월 생활비는 1020원으로 평균 월 200원을 저축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북경의 노장격인 대학교수가 한 달에 1500원 정도 받았다. 그 대신 북경의 택시 운전수는 월당 약 3000원까지의 수입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으며 자기의 것을 팔 수 있는 농부들의 경제상태가 아주 좋아졌다는 평이었다.

    자유시장 제도를 허용함으로서 벌써부터 빈부의 차이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녁에 성도(成都) 같은 도시에는 20대의 청년들이 전통적인 찻집에서 핸드폰을 들고 한잔에 150-200원짜리 차를 마시며 앉아있는 것이 보이는가 하면, 찻집 앞에는 50전을 받고 신을 닦는 부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려강에서 우리는 다시 대리(大理)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곳에서 우리는 장날을 맞았다. 그래서 우리는 시장으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농촌의 장날과 마찬가지로 각 사방에서 가져온 채소, 곡식, 소, 말, 염소, 돼지, 닭, 오리, 과일 등 하여튼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시장이 꽉 찼다. 백족, 한족, 회회족, 납서족, 대리족, 티벳트족, 미얀마족들의 소수민족들이 등에 팔고 살 물건을 이고 업고 지고, 각각 자기들 고유의 옷을 입고 비비대며 들어 닥쳤다.

    장터의 그 많은 사람들이 비비는 좁은 길 복판에서 수레 두 대가 서로 마주쳤다. 워낙 좁은데다 사람이 많아서 수레를 옆으로 비켜 서로 지나가려고 두 사람은 땀을 흘리면서 수레를 움직이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수레를 움직여서 비켜 갈 수 있을 때까지 좀 기다리면 좋을 텐데 기다리지 않고 마치 개미떼들이 지나가듯 그 수레 사이로 몸을 비비면서 지나갔다. 지나갈 수 없는 사람은 자기책임이다. 남의 사정을 생각할 여유가 없거나 아예 생각을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나만 내 일을 끝내면 만사는 해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광경은 중국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엄연히 창구에 우리가 서 있는데도 그저 중간에 쑤시고 들어와서 자기 것을 내어 밀었다. 이처럼 무질서하고 타인에 대하여 무관심한 국민은 중국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질서가 없는 무질서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무질서로 인하여 화를 내거나 욕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어느 도시에 가나 자전거, 삼륜차, 리쿠사, 오토바이, 소형 중형 대형의 추럭, 버스, 택시, 승용차등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움직이는 차량박물관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차들이 움직이며 제마다 찌르릉거리고 빵빵거리며 그 소음이 떠나지 않는 속에서 그 많은 무리가 질서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중국인의 질서는 곧 무질서라고 나는 생각했다. 질서가 없고 무질서만 있는 곳에는 실제로 무질서라는 단어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질서 같이 보이는 움직임 속에서 자세히 보면 결국은 하나하나의 무질서적인 움직임이 우연히 병행함으로써 질서적인 움직임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움직임은 개미떼 같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같다.

    어떤 때는 사람 자전거 차들이 엉망이 되어 얽혀서 풀 수 없는 매듭과 같이 될 때도 있었는데 손가락 틈으로 모래가 흐르듯 화내는 일 없이 스스로 풀리어 가는 것을 볼 때에는 정말 기막힐 정도였다.

    누가 누구의 앞을 막고, 누가 누구를 옆으로 밀어 제쳐도 욕하거나 화내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내 앞에 누가 들어오거나 가로막을 때 그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나도 그 사람일 경우 그렇게 한다는 것으로, 화를 낼 필요가 없으며 내어본들 나의 낯만 깎이지 누구에게 이익 되는 일이냐 라는 식이었다. 밀고 밀리는 움직임이다.

    매표구 앞에는 줄을 볼 수 없다. 누구나 다 조그만 창문 앞으로 달려들기 때문에 매표구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외국사람들을 이상하게 빠끔히 쳐다보면서도 손님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입장권을 사려면 중국인 같이 매표구에 매달려야 하는데 자기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하루 종일 서있어도 표 한 장 살 수 없었다. 무리가 모여서 비비고 뭉기면서도 하나하나는 빠져나가고 또 하나 하나가 달려 붙으면서 무리는 항상 존재하고 또 그 무리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는 대리를 떠나 곤명(昆明)으로 갔다. 곤명의 거리는 수많은 소수 민족들로 인하여 중국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했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도시는 옛날부터 미얀마, 인도로 가는 남쪽 사로(絲路)의 상인들의 모임으로 유명했다.

    공식적으로는 중국에 창녀가 없다고 했지만, 우리 일행이 호텔 건너편 길가에 즐비해 있는 한 이발소에 가서 그동안에 길어진 머리를 자를 때, 미용사로 가장한 아가씨들이 우리를 공공연하게 뒷방으로 모시려고 애를 썼다. 나중에 원 군으로부터 길가에 있는 모든 이용원이 사실은 이발소를 가장한 사창굴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왜 그렇게도 이발사 아가씨들이 친절했던지 짐작이 갔다.

    곤명에서 우리는 계림(桂林)으로 향했다. 이곳이 바로 중국의 그림이나 엽서에서 불 수 있는 기암(奇巖)이 즐비한 중국의 천하절경 중의 하나다.

    계림의 한 풍광

    계림의 한 풍광

    크고 작은 아름다운 산봉우리들이 평지에서 울뚝불뚝 솟아있어 마치 신(神)이 이 고장을 창조할 때에 전 세계의 아름다운 산봉우리만 잘라서 이곳에 뿌린 것 같은 절경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계림에서 가까운 양삭(楊朔)에 숙소를 정하고 며칠을 이 아름다운 강산에서 지금까지 강행군이었던 여독을 풀었다.

    우리는 이곳의 별미인 뱀국을 맛보기로 하고 호텔로 오는 걸음에 식당으로 둘러서 주문했다. 저녁에 식당에 가니까 요리사가 약 3m나 되는 장정의 팔뚝처럼 굵은 뱀을 들고 나와서 우리에게 보인 후 왼손으로 뱀을 들어 올리더니 오른손에 가지고 있던 커다란 가위로 뱀의 머리를 싹둑 잘랐다. 반시간 후에 뱀과 두부와 버섯을 넣고 끓인 국이 차려졌는데 뱀을 죽이는 광경을 본 나는 도저히 먹을 수 없어 다른 요리를 주문했다.

    양삭에서 아름다운 산천을 즐긴 후 우리는 버스를 대절해서 오주(俉州)로 향했다. 오주 가는 길은 수풀이 많아 잠깐 산골짜기에서 쉴 동안에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 야생의 새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는 동물의 세계가 말살되었다. 등을 하늘에 보이고 사는 짐승은 무엇이든 다 먹을 수 있다는 중국 사람들은 실제로 짐승이라는 짐승은 다 먹어 치워버렸다. 그 넓은 논밭에 참새 한 마리 구경하기가 힘들었으며, 그 아름다운 산천에 두루미 한 마리 볼 수 없었고, 강가에는 물새는커녕 그 흔한 까치 까마귀도 중국에는 없는 것 같았다.

    모택동 집권당시 5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에 워낙 참새들이 많아서 곡식을 다 까먹었기 때문에 농부들에게 생기는 피해가 너무도 컸다. 모택동 주석이 전 국민에게 참새를 잡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참새보다도 더 많은 중국의 전 국민이 동원되어 소라와 꽹과리를 치고 불면서 지붕 위에까지 올라가서 헝겊을 멘 막대기나 대나무를 흔들면서 새를 쫓았다.

    참새뿐만 아니라 날아다니는 모든 짐승이 앉지를 못하고 도망만 치다 보니 끝내는 날다날다 지쳐서, 말 그대로 새들이 하늘에서 돌처럼 떨어졌다. 떨어져 죽은 새들을 트럭으로 실어서 운반했다고 하니 그 참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해에는 북경에 참새구이가 별미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 곤충을 잡아먹는 새가 없었음으로 이 곤충에 의한 농작물의 피해는 새로 인한 피해보다 몇 십 배나 더 컸으며, 농작의 흉년으로 수백만의 중국인이 굶어 죽었다고 했다.

    오주에서 또 여독을 풀고 광주 가는 배를 탔다. 달이 조용하게 비취는 심강(尋江)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는 배에서 밤을 지내게 되니 어쩐지 로맨틱한 감정이 들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남경에서 민주공화국이 세워질 때(1912) 첫 대통령이 되었던 손문 선생이 광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다.

    나는 손문 기념관을 방문한 후 공원에 산책을 갔는데, 거기가 광주봉기 희생자 기념공원이었다. 1927년 겨울에 상해에서 있었던 장개석의 국민당이 저질은 학살에 항거하여 봉기했다가 죽임을 당한 노동자들의 혼령을 위하여 기념공원을 건설했는데, 우연히 이름이 광주라서 나도 모르게 우리나라의 광주학살을 또 한 번 상기했다.

    광주가 우리의 중국여행의 마지막 도시였다.

    다음 목적지는 홍콩이었다. 우리가 탄 배는 홍콩으로 향했다. 홍콩에서 쉬는 동안 지난 한 달이 넘은 찻길, 뱃길, 비행길 모두 합쳐서 거의 삼만 리나 되는 여정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서 푹 쉴 수 있는 집을 그리워했다.<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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