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의 복종과 저항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김해화의 <나의 시 나의 칼>
        2014년 01월 20일 01:0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2014년 새해, 우리는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자들을 몰아내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 및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중요한 일보를 내딛을 수 있을까.

    문제는 대중이다. 왜 굶주리는 자가 빵을 훔치지 않는가? 왜 명백하게 총체적인 선거부정을 통하여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는데 촛불집회에 모인 대중들은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가?

    왜 노동자들의 절반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절반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고 아무런 죄 없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이에 맞서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데, 노동자들은 총파업 한 번 해보지 못하는가? 이런 의문을 안고 김해화 시인의 시를 읽는다.

    <나의 시 나의 칼>

    동트는 새벽 일어나
    동녘하늘 바라고 백팔배 올리네
    무릎 꿇고 오래오래 낫 갈으라 하셨지 아버지
    무릎 꿇고 오래오래 칼 갈겠네 시 갈겠네
    칼 한 자루

    비오는 날 공치는 날
    큰칼 옆에 차고 광화문 갈까
    내곡동 갈까
    길목마다 빛바랜 군복 검은 정장
    일베나 어버이 튀어나오겠지
    불쑥한 허리춤 국정원표 권총이라도 찼을까

    훈련된 솜씨로 총 뽑기 전
    온몸 날려
    단칼에 모가지 댕강 잘라버리겠네
    나의 시 나의 칼

    위의 시는 2013년 11월 29일 조계사 내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린 백기완 선생의 민중 비나리 ‘죽음을 넘어서는 민중의 쇳소리’ 공연을 맞아 출간한 [우리 시대의 민중 비나리-2013년 저항시 80인 선집]에 실린 김해화 시인의 <나의 시 나의 칼> 전문이다.

    민중 비니라

    이 시는 시인이자 전사인 김남주의 시집인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린 <종과 주인>의 시를 계승하고 있다.

    <종과 주인>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고부응 교수가 이 시리즈-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10번째 글, “전사 김남주의 <종과 주인>: 관념의 변증법에서 투쟁의 변증법으로”(관련링크)에서 잘 묘파한 대로, “김남주가 이 시에서 제시하는 종과 주인의 관계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리고 이의 역전으로서의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이 둘의 변증법적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달리 종이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 주인에게 저항하여 죽이고, 주인을 없애 역사의 최종 목적지인 모든 계급이 소멸된 평등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김해화 시인은 이를 충실히 계승하는 동시에 이를 21세기의 한국사회 맥락에 구체화하는 한편, 불교를 끌어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보완하고 있다.

    투쟁이란 내 마음 속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없애려는 것과 내 앞의 부조리한 세계를 변혁하려는 것이 하나로 이루어질 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동살이 희붐한 새벽에 일어나 마음을 고요히 하고 부처님께 108 배를 올리며 내 마음 속의 두려움, 탐욕, 어리석음을 씻어낸다. 깨달음에 이르러 부처가 되었어도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체하지 못하면 난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중생을 구제하고 해방시킬 때, 그 순간에 비로소 부처가 되는 것이다.

    작은 들꽃은 무릎을 꿇은 자에게만 그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체 게바라에서 김남주에 이르기까지 중생을 구제하고자 낫을 들었던 이들의 가르침을 새기며 무릎을 꿇고 낮은 마음으로 오래 오래 낫을 간다. 저항의 언어를 벼린다.

    비가 와서 하루벌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공치는 날, 그리 벼린 칼을 차고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으로 달려갈까, 아니면 시민과 학생들이 피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졸지에 폐기시킨 내곡동 국정원으로 달려갈까 번민한다.

    현 정권은 파시즘 체제, 시민의 자유를 감시하고 통제하고 시민들을 일베나 어버이로 동원한다. 그들이 유신독재 정권 때부터 세뇌되고 훈련된 솜씨로 총을 들어 민중들에게 폭력을 행하기 전에 온몸을 날려 단 칼에 모가지를 댕강 잘라 버리고 반민중, 반민주, 반민족의 권력을 해체하겠다. 나의 시로, 나의 칼로.

    이리 된다면 그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대다수 대중들은 그리 빼앗기고, 그리 수모를 당하고 그리 폭력을 당하고 그리 감시를 받고 통제되면서도 더 이상 낫을 벼리진 않는다. 칼을 갈지 않는다. 왜?

    <2000년, 종과 주인>

    주인이
    낫을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조롱하였다.
    종이
    그 낫으로 주인의 멱을 땄다.

    주인들이
    ㄱ자를 가르치고
    새경을 배로 주고는
    자신들을 풍자하는 탈춤을 추게 하였다.
    종이
    그 낫으로 주인의 원수의 멱을 땄다.

    김남주의 시를 필자가 패러디한 것이다. 얼마 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던 그 땅에 러시아에서 있었던 노동절 행사는 21세기 현재 대중이 놓인 맥락을 여실히 말해준다.

    권력도, 자본도 없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거리에 나서서 강력한 군대와 경찰을 가진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인민들의 세상을 건설하였다. 그날 세계의 진보를 갈망하던 이들은 얼마나 큰 목소리로 환호하고 얼마나 들뜬 가슴으로 세계의 장밋빛 미래에 대해 노래하였던가.

    그러나 그 후 8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메이데이 기념식. 깃발이 오르고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모인 사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뿐, 다 헤아려야 열 명을 겨우 넘길 정도였다. 주름살 가득한 노인들이 모여 희미한 옛사랑을 추억하듯 그리 의례를 하고는 뿔뿔이,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처럼 죽음을 앞둔 혁명의 쇠멸을 새삼 공감하며 쓸쓸히 사라졌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광장에 록음악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자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곧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광장을 꽉 메우고는 음악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들은 오늘이 무슨 날이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하나같이 모른다며 춤에 열중하였다.

    21세기, 대중이 놓인 맥락도 이와 유사하다. 후기자본주의는 더 강한 강도로, 하지만 교묘하게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노동과 노동자의 억압과 소외를 심화하고 노동조직을 와해시키는 한편 세계 차원의 연대 가능성의 지평을 열고 있다. 디지털과 인터넷은 이성을 감성으로 대체하면서 노동자의 의식화를 원천봉쇄하는 한편 쌍방향의 소통과 새로운 차원의 네트워킹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달라진 맥락에서 과연 대중은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산업사회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억압과 착취, 소외를 감내하며 파편화한 우중으로 전락하여 거의 노예상태와 다름없는 생을 연장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까?

    신자유주의의 야만과 폭력에 당사자인 노동자가 저항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임시고용, 파트타임제 등을 확대하고 독자계약제로 전환하여 노조를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게다가 연봉제 등으로 노동자간 경쟁을 부추기고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노동자의 연대는 급속히 붕괴되었다. 노조가 힘을 잃자 초국적기업은 해고를 무기로 임금을 무자비하게 삭감하고 노동자 복지를 속속 폐지하였다.

    그럼에도 이 체제가 별로 저항과 도전을 받지 않는 것은 이 체제의 최대의 피해자인 대중마저 화폐증식의 욕망, 곧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망을 추구하고 경쟁을 내면화하거나 해고의 공포 속에서 권력-자본의 카르텔에 투항하고 동원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분단모순을 극복하지 못하여, 권력은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과 실천은 물론 그들을 옹호하는 제도나 담론을 빨갱이나 용공, 종북으로 매도하고, 노동자 스스로도 정당한 파업, 노조 가입조차 빨갱이식의 실천으로 생각하여 기피한다.

    90년대 증권 붐과 부동산 투기 붐, 정규직 노동자의 이금 상승 등의 요인으로 상당수 노동자가 ‘자본가형 노동자(capitalist worker)’, 혹은 ‘중산층적 프롤레타리아(bourgeois proletariat)’로 전환, ‘하얀 탈을 쓴 흑인’처럼 구체적 현실은 노동자이지만, 정치경제적 성향은 자본가나 중산층이 되어 버렸다.

    노동자 중 상당수가 부르조아지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게임, 대중가요 등 노동자가 향유하는 대중문화가 탈계급적이고 탈정치적인 것 일색이어서 민노총 소속 노동자처럼 계급의식과 주체가 확고한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다수의 노동자가 ‘1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대안을 구성할 것인가. 중국의 좌파 자유주의자나 한국의 자본주의 4.0이나 윤리적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은 시장의 균형과 공정성 확보를 통하여 건전한 자본주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시장에 대한 환상의 소산이다.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잘 통찰한 대로, 거대 이윤의 원천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의 작동을 억제하는 독점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정한 시장이란 불가능한 유토피아이며, 권력의 시장화와 시장의 권력화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현상이다. 전선은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로 명확해야 한다.

    이 전선 아래 대중을 조직해야 한다. 대중은 양면성을 지녔다. 대중은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대중 매체에 쉽게 조작당하는 우중이자 자기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앞의 세계에 대응하고 문화와 예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읽는 수용자이기도 하다.

    대중은 원자화하고 부품화하며 이질적, 고립적, 비조직적 개체이자 타자와 강한 유대 속에서 삶을 구현하고 조직을 형성하며 공동체를 추구하는 구성원이다. 대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대상이자 지배층에 맞서서 저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실천집단이다.

    대중의 이런 속성 때문에 우리는 대중을 계몽하거나, 대중이란 기름에 대한 혁명의 라이터 돌로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럴 때 문제는 “‘전(專)’의 방향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비인간적이고, ‘홍(紅)’의 방향은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이다.”라는 점이다.

    문화혁명의 궁극적 목표는 홍(紅)과 전(專), 곧 민가와 현대시, 인민 대중과 관료 지식인, 농촌․농민과 도시․부르주아, 중국과 서양, 동풍과 서풍을 종합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21세기 한국 사회라는 시공간에서도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갖는다. 대중성과 전문성, 대중과 엘리트, 농촌과 도시, 탈근대와 근대의 종합은 한국 사회가 이룩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우리는 대중을 섣불리 계도해서도, 어떤 이론으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 5.18 민중항쟁이나 부안 반핵 시위를 보면, 대중은 지식인도 사라진 그 자리에서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였고 그들 스스로 학습하고 거듭났으며 그들 스스로 절대공동체를 구현하였다.

    불교를 빌려 말하면 일체 대중들 안에 부처가 있다. 유리창에 덮인 먼지만 닦으면 파란 하늘이 드러나듯, 어떤 매개를 통하면 대중들 속에 자리한 주체와 연대, 절대 공동체를 향한 비전과 실천이 집단적 신명으로 드러난다.

    머리는 가슴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은 발을 이기지 못한다.

    희망은 노동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노동자들, 집회와 희망버스에 참여하는 시민,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99% 대중들로부터 꽃필 것이다. 쌍용차에서, 현대자동차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보를 아울러 진정한 진보좌파정당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혁신을 통해 다시 구성된 민노총이 결합해야 한다.

    반신자유주의와 반자본주의로 전선을 명확히 하고 노동을 중심에 놓고 계급적 성격을 명확히 하되, 탈핵 등 생태와 복지와 사회정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결합하자. 노동과 환경, 소수자, 소위 적녹보 동맹을 맺자. 환경은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 없이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함을 수용하고, 여성과 소수자 또한 가부장적 폭력과 배제가 자본주의 체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받아들이자.

    그 전제 아래서 환경운동과 소수자 운동과 연대하자. 현장에서 활동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되, 용산참사, 강정마을, 4대강에서 싸우던 이들과 함께 하자.

    멀리 보고, 지역에서부터 풀뿌리 운동을 하고 또 이를 통하여 조직을 확대하자. 한국인의 강한 공동체 지향성을 꼬뮨에 결합하고, 신명이 나는 싸움을 하자.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투쟁과 함께 노동현안을 사회적 쟁점으로 삼는 담론 투쟁을 하자. 그리하여 노동배제의 이 사회를 끝장내고 진정으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자.

    어두울수록 별은 밝게 빛나고 길은 멀리 열려 있다.

    필자소개
    민교협. 한양대 국문과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