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작의 열정이 필요한 시대
    [책소개] 『세기』(알랭 바디우/ 이학사)
        2014년 01월 18일 01: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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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에서 이 책이 출판되기 전, 슬라보예 지젝은 이 책의 원고가 이미 오래전에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을 가리켜 “이 책이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은 인류에 대한 범죄이다.”라고 말했다.

    2005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프랑스 지성계의 열렬한 호응을 받은 바디우의 『세기』는 “20세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바디우의 명확한 답변을 담고 있다.

    현대 프랑스 철학계와 지성계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데리다의 죽음 이후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현존하는 프랑스 철학자이기도 한 바디우는 이 책에서 20세기 사유의 흔적(시, 철학적 단편, 연극 등)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통해 지난 세기를 관통한 것은 “실재에 대한 열정”임을 드러내며, 이를 근거로 20세기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재판을 시도한다.

    20세기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 책은 지난 20세기의 가장 뜨거웠던 열정을 다시 정립한, “성공한” 에세이집이다. 이 책에서 바디우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던진다. 세기란 무엇인가? 정말로 세기는 시작되었으며 또 정말로 세기는 지나갔는가? 이 물음들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바디우에 따르면 우리가 이 물음들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있는 단위들을 찾는다고 해서 이 물음들에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물음들은, 철학적으로 볼 때, 지난 세기 동안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유된 것에 관한 물음들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따라서 바디우는 다시 묻는다. 지난 세기 동안 사람들은 무엇을 사유했는가? 이 물음에 답변하기 위해서 바디우는 시, 철학적 단편, 정치사상, 연극 등 지난 20세기에 생산된 여러 자료를 추려내고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20세기는 이미 전체주의적 테러의 세기, 유토피아적 범죄 이데올로기의 세기, 공허한 환상의 세기, 말살의 세기, 잘못된 아방가르드의 세기, 민주주의적 사실성을 도처에서 대체한 추상의 세기로 판단되고 선고되었다.

    그러나 바디우는 지난 세기에 대한 판단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20세기에 대한 진정한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20세기를 지배했던 진정한 열정은 결코 상상적인 것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정도, 메시아적 열정도 아니었다.

    지난 세기를 지배했던 그 무시시한 열정은, 19세기의 예언주의와 반대로, 실재에 대한 열정, 즉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참된 것”을 활기 있게 하기 위한 열정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바로 이 열정을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 또 이를 통해 지난 세기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판단을 시도해보기 위해, 실재에 대한 열정, 의지, 욕구 등을 담은 여러 자료를 찾아 탁월하게 분석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긍정적인 열정으로부터 출발해야

    바디우에게 있어서 20세기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21세기를 막 열어가는 우리의 현재를 위해 유효한 사유의 조건을 이룬다. 하지만 20세기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은 오로지 세기의 잔인한 만행에 대한 선고만을 내릴 뿐이다. 예를 들어 나치가 저지른 유태인 말살, 스탈린의 폭정 등이 그 분명한 증거들이다. 물론 이 잔인한 일들은 분명히 일어났으며, 이 일들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바디우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세기에 대한 이 지배적인 이미지를 깨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새로운 세기를 여는 일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의회-민주주의”라는 피난처 속에 있는 것에 만족해하며 잔인함에 벌벌 떠는 생존자들에 불과한 우리는 다만 공포의 지배 아래에서 주어진 것을 소비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바디우에 따르면 21세기의 우리는 시작의 용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안전을 보장해주는 복종, 공포, 인도주의적 합의 아래 태어난 21세기는 시작을,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계획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바디우는 힘주어 지적한다. 지난 20세기에는 만행과 다른 것, 즉 그가 경이로우며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는 실재에 대한 열정이 있었으며, 이 열정이야말로 20세기를 지배적으로 관통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잔인한 만행을 참으로 인식하고 그것의 회귀를 실질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세기의 끔찍한 일들로부터가 아닌, 세기의 긍정적인 열정,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실재에 대한 열정의 증인들

    바디우에게는 선고받은 세기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도, 그렇다고 선고받은 세기를 책임지고자 하는 의도도 없다. 그에게는 단지 세기가 세기 자신에 대해 사유한 것을 있는 그대로 검토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뿐이다.

    즉 그는 만델스탐, 브레히트, 페소아, 레닌, 마오쩌둥, 말레비치, 프로이트, 베베른 등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들, 정치가들, 사상가들이 생산한 자료를 하나씩 검토해가면서 세기가 그 스스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세기를 관통하는 진리는 무엇이었는지, 그리하여 20세기의 고유함은 궁극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탐구할 뿐이다.

    그리고 이 검토의 결과, 바디우가 확신이 차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즉 20세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는 것은, 예를 들어 세기 초의 “새로운 인간을 도래하게 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세기 말의 “유전학적으로 조작된 인간 종의 변경 의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시작에 소환되었다는 감격을 동반한 실재에 대한 열정인 것이다.

    따라서 세기에 대해 검토하면서 바디우가 사용하는 주된 방법은 당연히 “내재주의적 방법”, 즉 세기를 세기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보는 방식이다. <세기>가 그리는 사유의 궤적이 마치 세기 속 특이한 인물들의 “별자리”처럼 구성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물론 이 인물들은 모두가 다 실재에 대한 열정의 증인들이다.

    <세기>의 궁극적 지향점

    20세기를 검토하면서 바디우는 그가 “두 번째 복고주의”(첫 번째 복고주의는 프랑스혁명 이후 1815년부터 1845년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흐름을 말한다)라고 명명하는, 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정치적 흐름에 대해 특히 적대적 태도를 보인다.

    그에 따르면 이 복고주의는 상업의 자유로운 순환이라는 추진력과 이 추진력에 맞추어진 법 아래에서 사물들이 자연스럽게 생성된다는 “자유주의”적 관념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자유주의 아래에서는 부유한 자가 부유한 것, 가난한 자가 가난한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유한 자의 우월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도처에서 안락함이 욕구되고, 견해들은 언론을 통해서 조정된다.

    이 자유주의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정치는 시민들의 계약이고, 사랑은 성과 관련된 계약이다. 결국 이런 자유주의 아래에서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따라서 사는 일만 중요할 뿐, 무언가 새로이 시작하는 일은 결코 권장되지 않는다. 특히 자연스러운 경향을 거부하는 혁명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자 끔찍한 일이 되고 만다.

    그리고 70년대 말부터 이 자유주의의 새로운 버전이 “새로운 철학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복고주의다. 복고주의자들은 말한다. 단지 악에 대항해서 싸우는 일에 만족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선을 욕구하는 일은 그 자체가 이미 자유주의에 대한 전체주의적 이의 제기이기 때문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예술이 진리의 생산 과정이며 예술 자체가 사유의 위상을 지니는 것처럼, 정치 또한 진리의 생산 과정이며 그 자체가 사유의 위상을 지닌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의회-민주주의와 그에 맞물린 복고주의는 공적인 장소에서 행해지는 자유로운 판단과 토론을 통해서 오로지 견해들만 판을 칠 수 있도록 정치를 이끌어간다. 이 경우 견해들의 잔치에 바쳐진, 그리하여 오직 다수결의 길로만 나아가는 정치는 진리와 영원히 동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정치 자체가 사유이자 진리의 생산이라고 보는 바디우는, 자본주의적 의회-민주주의와 반대로, 또 복고주의에 대항해서, 견해들의 잔치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견해가 진정한 의미로 정치적인 것이 되어서 그 자체가 사유가 되고 진리의 생산이 되기 위해서는, 견해들이 그 어떤 “결심” 속에서 분명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보기에 정치적 진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토론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토론을 결심에 묶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때 열렬한 마오주의자였으며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정치적 투쟁을 해왔던 바디우는 이와 같은 전망에 완전히 정합적인 정치적 입장이란 어떤 것일지를 묻는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적 독재 체제를 대체하는 입장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대체하는 입장이어야 한다.

    바디우는 바로 이런 정치적 입장의 한 형태로서 우리에게 “당이 배제된 정치”에 대해서 숙고할 것을 제안한다. 즉 그의 존재론(일자가 배제된 순수 다수에 대한 존재론)과 너무나도 어울리게, 바디우는 지휘자가 배제된 투쟁을 제안함으로써, 달리 말해 긍정적인 다수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함으로써, 공산주의적 독재 체제와 자본주의적 의회-민주주의 독재 체제를 벗어나는, 실재적인 해방을 위해 싸우는 투쟁가가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와 같이 당이 없이 투쟁하는 사람은 스스로 정치적인 결심을 하며, 따라서 그는 그 어떤 지배 권력이나 국가에도 충성하지 않는다. 그는 완벽한 이데올로기는 없다고 보며, 다수의 이데올로기에 스스로를 연결한다.

    또 그는 위대한 정치, 유토피아, 국제적인 연합, 자본의 세계화를 더 이상 믿지 않으며, 그것들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 모든 시도를 물리치고, 궁극적으로 국가가 배제된 민주주의라는 일종의 새로운 체제를 세우고자 시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가 그리는 해방의 정치는 “나” 또는 집단적 주체가 아닌, “우리” 또는 “함께”를 부각시키는 정치다. 박애의 개념과 공명하는 획일화되지 않은 “우리”, 1995년 12월 프랑스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시위의 슬로건이기도 했던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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