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신준 선생을 비판한다
    [비판과 비평]마르크스주의 속류화에 반대하며
        2014년 01월 15일 01: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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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신준 선생이 최초로 마르크스의 [자본]을 번역한 연구자였고, 우리들은 ‘이론과 실천’사의 자본론을 읽으며 학습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몇 년전 다시 [자본]을 완간한 것은 큰 업적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판본 문제를 넘어서서 그렇다.

    더불어 그가 베른슈타인의 고전을 번역하고 카우츠키를 번역한 것도 큰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가 과거에 썼던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들([자본론의 세계](풀빛, 2001), [자본의 이해](이론과 실천, 1999))의 오류조차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과거의 유산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강신준 선생의 작업이 쟁점이 된 것은 그가 2008년부터 [자본]을 완간한 이후 자본 해석의 권위자로 대중적으로 군림하면서이다. 그가 [자본] 번역자로서 자신의 역할에만 만족했다면, 우리 모두는 그의 작업에 감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작업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 후속작업으로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주체로 등장하면서, 자신의 마르크스 해석이야 말로 ‘진짜 마르크스다’는 식으로 나섰다.

    진보적 대중들이나 [자본]이라는 거대한 산에 움츠려 있던 많은 시민들은 [자본] 완역자의 등장에 열광하기도 했다. 그는 [자본]의 완간과 함께 다양한 대중강연을 했고, [프레시안], [경향신문] 등에 마르크스의 자본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두고 인터뷰와 칼럼, 연재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아니 필자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둔 많은 지식인들, 활동가들, 독자들은 그의 마르크스 해석을 매우 불편해 했다. 불편해 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 논쟁도 지면으로 지속되었다.

    그는 최근 인터뷰 “우리 세대는 끝났다. 다음 세대도 실패하겠지만..”에서 다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스탈린주의’라고 간단하게 치부한다. 그러면서 자신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진정한 계승자인 것처럼 행사한다. 인터뷰의 부제가 ‘이것이 진짜 마르크스다’이다.

    필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계승자이기는 커녕 카우츠키와 스탈린의 계승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최근 강신준 선생의 인터뷰에 대한 비판이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기 전 혹은 후에 강신준 선생의 인터뷰를 함께 읽기를 권한다. (강신준 인터뷰 링크)

    강신준 선생과 그가 완역한 '자본'

    강신준 선생과 그가 완역한 ‘자본’

    2.

    첫째. 메가(MEGA 마르크스엥겔스전집)에 대해서. 이는 이미 2000년대 초반 이미 국내에 일부 알려진 이야기다. 강신준 선생의 판본이 구판이었다는 것. 신메가의 완성도가 더 높았는데 그걸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지적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마르크스가 직접 쓴 원고는 [자본 1]이고 나머지는 엥겔스가 사후적으로 정리하고 재구성해서 출판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본] 자체가 모순이 있고, 모호한 점이 매우 많다는 점. 이 또한 새로운 것은 없다. 그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재구성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강신준의 자본 해설을 꼼꼼히 읽어보면, 마르크스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마르크스주의자들(뵘 베르크, 사무엘슨, 보르트키에비치, 스라파, 모리시마, 이안 스티드만 존스 등등을 비롯하여)의 작업에 답변하면서,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내부의 논쟁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성과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신준의 교과서는 오히려 80년대 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번역한 내용을 답습하는 수준이다. 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들은, 자골로프 교과서와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 그로스만, 로만 로스돌스키(1920~30년대)와 그 이후의 성과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소련교과서들은 마르크스-엥겔스의 글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정리했을 뿐 지적으로 많이 지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지적 정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국적 사례가 바로 강신준 선생의 교과서이다.

    강신준 선생의 교과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엥겔스의 잘못된 해석, 그리고 이를 정통화한 소련 교과서들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리카르도의 가치론을 극복했다고 일반적으로 말해진다. 핵심은 전형문제이다.

    리카르도는 가치법칙을 등가교환의 미시법칙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별 생산자가 투입된 노동과 사회적으로 인정된 노동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은 거시법칙이다. 개별생산자의 노동과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 해의 총노동시간과 그해의 부가가치가 일치한다는 것이 기본 마르크스의 기본 전제(!)이다. 미시적으로는 오히려 불일치한다.

    강신준 선생의 교과서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없다. 그는 투하된 노동을 사회적 필요노동이라고 전제한다. 교환과정에서 등가치 교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은 자신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강신준 교수는 리카르도의 오류 즉 가치법칙을 미시법칙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총계불일치 문제 즉 총노동과 총생산가격의 불일치 문제가 전형문제에 있어서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완전히 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설명이 어떤 오류가 있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핵심적인 과제는 총계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한 수학적 기법의 정교화, 설명의 정교화를 위해 노력하는 역사였다고 해도 다름 아니다.

    강신준 선생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예의 그 마르크스, 엥겔스의 오류를 반복한다. 마르크스는 [임노동과 자본]에서 하루 8시간 노동 가운데, 4시간은 잉여노동, 4시간의 필요노동이라고 하면서 착취를 설명한다. 엥겔스는 서문에서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한다. 강신준 선생은 이 논의를 그대로 가져와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을 기하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직관적으로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잉여가치가 존재하려면 먼저 총이윤과 총잉여노동은 같다는 항등식이 성립되어야 하고, 이 전제하에서 이윤이 양일 때 왜 잉여가치가 양인지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왜 화폐가치와 1인당 임금의 곱이 1인당 노동시간보다 작은지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강신준 선생은 증명되어야 할 것을 마치 진리인 것 것처럼 전제하고 설명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강신준 선생은 자신의 설명이 무슨 오류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강신준 선생의 교과서에 나타나는 오류는 이뿐만이 아니다. 추상노동에 대한 설명, 재생산표식과 생산가격과의 관계, 노동력 가치에 대한 설명 등 많은 부분에서 그의 교과서는 스탈린식 교과서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한다.

    스탈린주의 교과서는 마르크스를 무오류성의 신성시하고 그의 책에서 인용하거나 요약만 해 왔다. 마르크스의 책에 주석을 다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는 지적으로 매우 지체되었던 것이다. 강신준 선생의 경제학 교과서는 그런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3.

    셋째 이 인터뷰에서 그는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미래의 마르크스주의를 구별한다. 과거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알려진 스탈린주의라는 것. 그리고 미래의 마르크스주의는, 강신준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인데, 그것은 직접적 생산자가 참여하는 생산의 사회화와 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하다! 강신준 선생은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스탈린주의)와 미래의 마르크스주의(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존재했던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제거해 버린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델라 볼페 학파, 그람시주의, 알튀세르앵, 분석마르크스주의, 조절이론, 자본논리학파, 부다페스트 학파,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등등 이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영국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미국의 먼쓸리 리뷰 그룹 등의 작업은 어떠한가?

    강신준 선생은 의도적인지 비의도적인지, 인터뷰에서 탈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은 완전히 제외함으로써 이 세계에는 마치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밖에 없는 것처럼 논의를 펼치고 있다.

    과거의 마르크스주의를 스탈린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마르크스 지성사에 대한 지적인 폭력이다. 사실 강신준 선생은 네오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무지하다. 전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발전에 대해서도 그는 무지하다.

    그가 네오마르크스주의를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노동운동의 조건, 노동조합의 문제에 오래 동안 천착해 왔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마르크스의 원전을 번역하는데도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러다 보니 네오마르크스주의나 전후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의 발전에 무지할 수 있다. 시간이 없어 공부를 못했다면 그건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점이다.

    강신준 선생이 자신의 마르크스 해석이 ‘진짜 마르크스다!’는 식의 독단만 없으면 나 같은 후학이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강신준 선생은 심지어 불쾌한 전략을 취하고 있기조차 한다. 그는 자신이 옹호하는 ‘미래의 마르크스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이전의 마르크스주의를 스탈린주의라는 단 하나의 집단으로 동일시해 버린다.

    그러면서 자신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는 운동권이나 마르크스주의에게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스탈린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자신을 수정주의라고 떠들고 있는 자들은 모두 스탈린주의의 후예라는 말씀이다.

    좀 너무 하지 않는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나 카우츠키의 수정주의에 대해 비판한 사람들은 스탈린주의자들만이 아니다. 아시다시피 알튀세르의 경우,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자신의 네오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켰다.

    알튀세르는 스탈린이야말로 카우츠키의 후예라고 비판했다. 알튀세르는 카우츠키를 두고 “가난한 자의 헤겔주의”라고 비판했고, 스탈린주의는 카우츠키주의 즉 “제2 인터네션널의 사후복수”라고 했다. 카우츠키나 강신준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한다고 해서 모두 스탈린주의는 아닌 것이다.

    넷째, 강신준 선생 자신이 스탈린주의의 후예라는 사실은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사회 변동의 추동력으로 생산력 꼽고 있다. 강신준은 자본주의가 생산수단을 제왕적으로 독점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생산력 발전에 질곡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하지 않는 사회적 관계로 인해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틀렸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인해 생산력이 발전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구조적인 위기를 겪지만 생산성은 지속적으로 증대한다. 자본주의적 관계 자체가 지속적으로 생산력을 추동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다시 ‘자본의 과잉’을 낳음으로써 경제위기를 초래한다. 분명한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억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관계에 의해 생산력이 질곡된다는 주장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주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작업가설이었을 뿐이다. 앞으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이런 문제의식에서 해 보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써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정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간의 모순이라고 요약한 것은 엥겔스이고, 이를 다시 일반화 한 것이 카우츠키였고 경전화시킨 것은 스탈린이었다.

    강신준 선생은 생산력주의를 그대로 주장함으로써 스탈린의 논리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알튀세르를 비롯하여 다수의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를 생산력주의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발리바르는 [역사유물론 연구]에서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의미를 새롭게 정리한다. 발리바르는 생산관계의 우위하에서 생산력을 새롭게 해석한다. 생산관계 자체가 생산력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강신준 선생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몰라도 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스탈린식 생산력주의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스탈린을 비판하는 강신준 선생 자신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더군다나 스탈린주의와 별반 다르지도 않은 주장을 갖고 와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마르크스다”라는 따위의 오만은 그만 부렸으면 한다.

    4.

    다섯째, 강신준 선생의 핵심적인 주장은 생산과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노동자 개개인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적 생산관계의 수립을 주장한다. 정치형태로서는 의회민주주의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생산과정에서의 민주주의의 실현, 노동자 개인의 참여 민주주의는 마르크스 말했던 생산자연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가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은 독일과 스웨덴식 사민주의 모델이다.

    그가 영남노동운동연구소에서 했던 작업, 산별노조건설/직무급임금체계 역시 독일 금속노조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금속노조는 1948년부터 1968년 동안 단 한 번도 파업하지 않은 노조다. 그 노조는 독일 자본주의의 경쟁력 강화라는 필수적인 목적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한 노동조합이었던 것이다.

    물론 독일에서는 노사정합의, 경영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노조의 참여가 보장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노조의 실천이 생산의 사회화에 준하는 자발적인 생산자의 참여의 사례는 될 수 없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더군다나 지금 독일자본주의는 유럽중앙은행을 매개로 유럽 주변부에 대한 마르크 제국주의자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폭력적인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 정책의 모든 중심은 유로가치의 안정화일 뿐이다. 시장이 통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등 유럽의 부국들은 남유럽등 유럽주변부의 재정위기에 대해 일체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독일은 경제위기로 고통받는 국가들에게 긴축재정만을 강요함으로써 유럽 민중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을 뿐 아니라 경기회복조차 더디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독일 또한 국내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스웨덴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의 노조들 역시 철저하게 자국 자본의 경쟁력을 생각하는 노조들이다. 노사협력은 경쟁력 유지를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다. 나는 이들 노조가 한국의 노조보다 월등히 역량이 높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이 국가 경쟁력의 유지에 동참할 수도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들 나라에서의 노동자들의 참여가 자본주의 이후를 보여주는 모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없는 것은 더 말 할 것도 없고. 독일 모델이 오에켄의 보수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는가?

    여섯째, 강신준 선생의 대안 즉 의회민주주의와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자 참여는 사민주의 모델일 뿐이다. 이 모델은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아무런 답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 자본주의보다 유럽자본주의가 더 큰 문제에 빠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는 독일과 스웨덴이 미국보다 잘산다고 하지만 마르크 경제권에 포섭된 유럽주변부의 빈곤, 붕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럽통합의 모델이 마르크를 중심으로 한 화폐통합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이 시스템은 붕괴마저 점쳐졌던 심각한 상황임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5.

    마지막으로 이 말은 꼭 강조하고 싶다. 나는 강신준 선생이 수정주의자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에 마르크스주의자 아닌 사람이 99.9%이다. 난 이들과 잘 지낸다.

    내가 강신준 선생을 지식인으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기 위해 [자본]을 견강부회하고, 지성사를 무로 돌리며, 억측을 너무도 당당하게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의 후예로서 자기주장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가 베른슈타인의 후예라고 해서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그 자체로 우리에게 배움을 주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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