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인의 계급 각성:
    루쉰의 <아Q정전>을 경유하여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아Q와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2014년 01월 06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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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혁명 시기가 역사적 배경이 되고 있는 루쉰의 「아Q정전」에서 아Q는 약탈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공개처형으로 총살당한다.

    자신이 왜 잡혀왔는지조차 모르는 아Q는 약탈 사건의 범인임을 인정하는 문서에 글을 모르기 때문에 붓으로 자신의 이름을 쓰는 대신 동그라미를 그린다. 동그라미를 그리면 범인임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아Q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리라는 동그라미를 반듯하게 그리려하지만 붓이 빗가나서 호박씨 모양이 되고 만다. 그는 호박씨 모양의 동그라미가 그의 일생에 오점으로 남을 것을 걱정한다.

    조리돌림을 당하며 형장으로 가면서도 아Q는 기개 있는 사형수가 부르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한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약탈 사건의 희생양이 되어 죽음을 맞는 아Q는 루쉰이 그려낸 우매한 중국 민중의 전형이다.

    그러나 아Q 자신은 우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날품팔이를 하며 살아가는 그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까닭 없이 무시당하고 얻어맞으면서도 자신은 지체도 높고 견식도 있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아Q정전>의 아Q

    정신승리법이라고 알려진 아Q의 이런 자기 위안은 남들이 무시하든 육체적 폭력을 가하든 정신적으로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비법이다. 아Q의 정신승리법은 현실에서 당하는 패배를 마음의 위안으로 극복하는 아Q의 승리 방식이다.

    현실의 굴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정신승리법이라는 자기 위안으로 살아가는 아Q가 루쉰이 그려낸 20세기 초기의 우매한 중국인의 모습이라면 아Q를 괴롭히는 동네 사람들 역시 중국인이다.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면서 만만한 날품팔이를 놀리고 때리면서 만족하는 동네 사람들 역시 동족에 대한 억압을 자신들의 생존 방식으로 삼고 있는 봉건 체제의 중국인들의 전형인 것이다. 루쉰은 아Q와 아Q를 괴롭히는 동네 사람들 모두를 무지몽매한 중국인이며 이를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아Q정전」을 비롯하여 그의 첫 소설인 「광인일기」등이 포함된 그의 첫 소설집 <납함>의 서문에 해당하는 「자서」에서 루쉰은 계몽이 필요한 중국인의 모습을 철로 밀폐된 방의 비유를 써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가령 말이야, 철로 밀폐된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어. 그 속에는 깊이 잠든 사람들이 많이 있어. 머지않아 질식하여 다 죽어버리겠지. 허나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옮겨가는 거니까 죽기 전의 비참함은 느끼지 못하는 거야.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쳐서, 다소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을 깨웠다고 하면, 이 불행한 몇 사람에게 이왕 살려낼 가망 없는 임종의 괴로움을 주는 것이 되는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루쉰 소설집 <납함>의 「자서」 중)

    이 말은 글을 부탁하러 온 친구에게 루쉰이 하는 말이지만 계몽으로서의 글쓰기를 사실상 루쉰 스스로 확인하는 말이다. 이런 루쉰의 말에 그의 친구는 ‘몇 사람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 철의 방을 부술 희망이 절대로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대답을 하게 되고 루쉰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루쉰에게 있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죽어가면서도 죽어가는 줄 모르는 몽매한 중국의 인민들을 일깨워 현실을 타파하자고 소리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쉰이 첫 번째 소설집의 이름을 납함(吶喊)이라고 지은 것은 그의 소설을 통한 계몽이라는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납함이란 적진을 향해 돌진할 때 서로 소리를 질러 사기를 북돋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쉰의 소설집 <납함>은 루쉰이 중국의 우매한 인민 대중을 깨우치기 위하여 소리치는 행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첫 소설집 <납함>을 비롯하여 두 번째 소설집 <방황> 세 번째 소설집 <고사신편> 등의 소설과 여러 산문집을 내면서 루쉰은 작가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활동하면서 중국 근대 문학뿐 아니라 근대적 계몽 지식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하였다.

    루쉰이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1920년대가 중국공산당 창당(1921년) 시기와 겹치고 또 루쉰이 죽은 후 마오쩌뚱이 ‘위대한 문학인이며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로서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점을 생각해보면 루쉰이 중국의 사회주의적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중국이 루쉰이 기대했던, 또는 마오쩌뚱이 건설하려던 국가인지는 의문이지만 이 문제는 여기에서 논의하지 않겠다. 나의 관심은 루쉰이 제시한 철로 밀폐된 방의 비유를 계급의식이 필요한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여 보는 것이다.

    루쉰이 말하듯이 밀폐된 철의 방 안에 혼수상태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깨워야 하는 것이 계몽 지식인의 임무라면 그 계몽 지식인은 어디에 있을까? 지식인은 철의 방 안에 있을까 아니면 밖에 있을까? 철의 방 안에 있다면 어떻게 작가 자신은 혼수상태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깨어 있을 수 있을까? 지식인이 철의 방 밖에 있다면 그 지식인은 철의 방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인가?

    지식인을 철의 방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이해하면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철의 방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된다. 그 자신은 철의 방 안에 갇혀 있지도 않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지도 않지만 자신이 깨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깨우려하는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지식인이 바로 이런 지식인이다.

    이런 지식인은 계급의 관점으로 말하면 자신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의해 지배계급에 속하지만 자신이 속하지 않는 피지배계급의 사람들을 위하여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회의 계급 구조를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배계급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다. 설사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어 그 전문 지식으로 인해 육체노동을 하는 대부분의 노동 계급의 구성원과는 삶의 조건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 전문적 지식은 그 지식인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인이나 교수 등 전문적 지식인이 갖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의 경우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전문적 지식인은 사실상 노동계급에 속하면서도 계급 배반의 방식으로 지식을 사용하는 자들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참여지식인의 실천 자체는 옳다고 보아야 하지만 그 참여 지식인이 피지배계급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은 제3자가 쓸데 없이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속한 피지배계급의 동료들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식인은 루쉰의 철의 방 비유에서 볼 때 그 방 안에 있는 사람이다. 루쉰이 말하는 철의 방에는 깊이 잠이 든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는 다소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도 있다.

    루쉰의 말 그대로를 보면 작가인 지식인이 그 ‘몇 사람’을 깨우는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작가가 그 방 안에 있다면 작가 자신도 그 ‘몇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결국 지식인이 깨우는 대상으로 설정한 다소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결국 계몽의 주체가 지식인이지만 계몽의 대상 역시 지식인이라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루쉰이 말하는 지식인의 계몽이 그람시가 말하는 피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의 실천과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람시는 사람은 누구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고 지적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람시

    안토니오 그람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자신의 이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배 계급이 주입한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신의 이익과 모순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그들의 이익과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그람시의 말로는 헤게모니)를 피지배계급의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지식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지식인들은 지배계급을 위하여 복무하는 자들이다.

    지배계급에 복무하는 지식인을 그람시는 두 부류로 나눈다. 한 부류는 자신이 피지배계급 출신이면서 지배계급에 복무하는 지식인들로서 주로 성직자나 관리, 법조인들이 포함된다. 그람시는 이들을 전통적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부류는 그 자신 지배계급 출신이면서 지배계급을 위하여 복무하는 지식인으로서 기업 경영인, 경제학자, 법조인들이다. 이런 지배계급 출신이면서 지배계급을 위하여 복무하는 지식인을 그람시는 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그람시가 법조인을 전통적 지식인의 범주에도 포함시키고 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에도 포함시키는 것은 법조인 중에는 피지배계급 출신도 있고 지배계급 출신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전문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전통적 지식인은 자신의 출신을 배반하기 때문에 비난받을 수 있지만 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은 자신의 출신이 지배계급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타도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적 지식인이나 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과 달리 피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은 그 자신 피지배계급에 속하면서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복무하는 지식인을 말한다.

    유기적 지식인은 지식을 갖추고 있어서 말을 잘하는 사람, 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피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 하는 일은 실천이며 이 실천은 노동 계급과 농민 계급의 의식을 각성시키며 노동 계급을 비롯한 피지배계급이 나아갈 방향과 이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일이다.

    피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유지시켜주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피지배계급에게 드러냄으로써 피지배계급의 계급의식을 새로 구축한다. 계급 혁명을 위해서는 우선 계급의식이 생겨야하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피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 노동계급의 정당 활동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당 활동을 하든 그렇지 않든 일반 대중이 계급의식을 갖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인도 스스로 계급의식을 갖기가 쉽지 않다.

    사실 전문 지식을 갖춘 대부분의 지식인은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을 피지배계급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우선 이들이 갖는 전문적 지식에 의해, 그리고 그 전문성으로 확보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경제적 삶에 의해 자신을 자본가 계급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 전문 지식인들은 사실상 지식 노동자로서 노동계급에 속한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라 자본가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제공하는 전문 지식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력과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자본 축적을 위해 사용된다. 전문 지식인도 육체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에 속한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에 속하면서도 자신이 노동계급에 속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지식인들은 날품팔이를 하면서도 옛날에 잘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의 아들은 웨이주앙의 돈 많은 집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것이기 때문에(물론 아Q의 자기 기만이다—그는 옛날에 잘 살지도 않았고 여자를 얻을 수 없는 그가 아들을 볼 가능성도 없다) 견식이 높은,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아Q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노동 계급에 속하면서도 자본가를 지지하고 그들을 위하여 정치 행위를 하는 한국의 인민 대중은 루쉰이 20세기 초반에 그리고 있던 중국의 우매한 인민대중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우매한 인민 대중에는 대학 교수를 비롯한 전문 지식인 역시 포함된다.

    결국 지식인의 계몽의 대상이란 우매한 인민 대중이지만 그 우매한 인민 대중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노동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각성하지 못하는 지식인은 정신승리법으로 만족하는 아Q와 다를 바 없다.

    필자소개
    민교협 회원,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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