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간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책소개] 『오강남의 그리스드교 이야기』(오강남/ 현암사)
        2014년 01월 04일 02: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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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교는 세계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신도 수가 가장 많은 종교다.

    2012년 통계(‘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글로벌리서치)에 따르면, 한국의 종교 인구 55.1퍼센트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32.6퍼센트(가톨릭 10.1, 개신교 22.5)다. 불교인(22.1)보다 무려 10퍼센트나 더 많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어떤 의미로든, 한국인 누구에게나 익숙한 종교다. 그런데 최근 일부가 보여준 배타적이고 편협한 태도로 인해 한국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정말 그리스도교는 갈등과 반목의 씨앗인가? 과연 우리는 익숙한 만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한국 종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첫걸음으로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펴냈다.

    우선 이 책은 평생을 바친 대가만이 다룰 수 있는 넓고 깊은 ‘세계 종교’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정리한 균형 잡힌 그리스도교 입문서다. 동시에 그리스도교 /불교 / 힌두교 / 도교 등 다양한 종교를 두루 섭렵하면서 그 심층을 깨친 선각자가 ‘이웃 종교’에 비춘 그리스도를 친근한 말투로 쉽게 풀어주는 이야기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입장 차이와 상관없이,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마음에 품은 신앙이 무엇이든 누구나 부담 없이 손 내밀 수 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비교종교학자의 ‘열린 종교’ 특강, 그리스도교 입문 편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는 그리스도교의 표층과 심층을 한눈에 보여주는 입문서이자,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제안서이다.

    1부 ‘역사로 보는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발생과 성장, 분리와 개혁 과정을 통해 어떻게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특징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의 현재적 의미도 짚어본다.

    그리고 2부 ‘심층에서 만난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교 이해의 열쇠가 되는 성경이 무엇인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보여줌으로써, 무수한 교단과 교파가 가지는 의미를 살핀다.

    특히 종교의 심층적 의미를 강조하는 저자는 성경을 ‘고백의 언어’와 ‘깨달음의 언어’로 바라본다. 문자주의적인 해석을 극복하여 예수의 가르침이 주는 더 깊은 의미를 제시하는 학계의 이론들을 총망라하고 교단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는 <도마복음>까지 끌어안았다.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종교신학’까지 소개하고 ‘새로이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적이고 수용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

    신학자가 아닌 비교종교학자의 치우침 없는 시선은 다양한 독자를 포용한다.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어떠한 종교인지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교인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지금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낳은 표층을 뚫고 들어간 심층에서, 갈등과 오해를 벗고 소통의 접점을 도모하는 그리스도교로 나아가는 데 디딤돌이 될 책이다.

    그리스드교 이야기

    ‘성경’으로 그리스도교‘깊이 읽기’

    흔히들 ‘창시자 예수’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예수는 그리스도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엄격히 말해 그는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니 ‘그리스도인’이니 하는 말도 모른 채 어디까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으로 죽은 셈이다.

    다만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기초한 종교이기에 예수가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무엇을 살펴봐야 할까?

    그리스도교는 1세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에서 벌어진 일종의 ‘예수 운동’으로 생겨났다. 무자비한 철권으로 ‘팍스 로마나’를 이룬 로마 제국이 유대뿐 아니라 지금의 유럽과 중동 대부분, 심지어 북아프리카까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출현해서 로마 제국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해 있었다. 이 와중에 예수가 등장했고,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무리가 생겼다. 이들이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이들의 종교가 바로 그리스도교인 셈이다.

    그렇기에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도 물론 중요하지만, 오늘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을 꼴 지우고 또 이끌어 가는 ‘성경’이야말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이 된다. 그냥 ‘책’이라는 뜻을 가진 ‘바이블(the Bible)’은 크게 ‘구약’과 ‘신약’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구약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인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고, 신약은 그리스도교가 생기면서 그리스어로 쓰인 그리스도인만의 문헌이다.

    다만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은 ‘구약’이 유대인들에게는 완전한 경전이기에, ‘신약’과 대비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전 세계 학계의 흐름과 발맞추어 ‘히브리어 성경’ 또는 유대인들의 표현에 따라 ‘율법(Torah)과 선지자(Nevi’im)와 문서(Kethubim)’의 첫 자를 따서 ‘타나크’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우리가 무심결에 사용한 용어 하나에도 이처럼 세심한 눈길을 던지는 학자는 성경을 어떻게 바라볼까?

    불경이든 성경이든 경전의 ‘원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수많은 필사본들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성경이나 불경에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다는 말은, 적어도 그 본문을 두고는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 본문 166쪽 <7장 예수의 가르침, 성경> 중에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요 ‘계시’의 책이라 믿기에, 보수주의 그리스도인 특히 근본주의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는 한 점의 오류도 없다는 ‘성경무오설’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엿새 만에 창조되었다든가, 인류의 죄 때문에 하느님이 홍수를 보내 온 세상이 물에 완전히 잠기고 노아와 그 가족만 살아남았다는 <창세기> 등의 이야기를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전능의 하느님을 믿는다면 성경의 이야기를 모두 문자적으로 믿어야만 진짜 믿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은 가장 충실하게 성경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끼리도 의견이 상충하는 점을 지적한다. 인식 능력의 특성상 인간은 각자가 가지는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조건에 따라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창세기> 첫 부분에 보면 인류의 첫 여인 하와가 뱀의 꼬임을 받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통칭 선악과를 따서 자기도 먹고 또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이 먹었다고 되어 있다. 여성 비하 시대,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라면,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는 말 하나 틀릴 게 없지’ 등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성경대로’ 읽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훈과 진리라 주장한다.

    그러나 요즘처럼 성차별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이 이야기를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을 떴다. 하와는 아담이 아직도 뭐가 선인지 뭐가 악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헤매는 것을 보고 그도 선악을 알도록 선악과를 먹게 도와준 거지’ 하는 식으로 읽기도 한다.

    켄 윌버 같은 초인격심리학자는 “인간이 선과 악, 상대 세상과 나라는 것도 분간하지 못하던 ‘미이분법적’ 의식 상태에서 ‘이분법적’ 의식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읽는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타락이 아니라 한 단계 Up되었다는 주장이다.

    ― 본문 171~172쪽 <7장 예수의 가르침, 성경> 중에서

    물론 모든 해석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해석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에 앞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곧 해석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면, 같은 성경을 보고 왜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해왔는지 또 각기 다른 해석을 접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가지면 좋을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되 나를 비우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게 읽고 해석할 수 있다면 저자가 그간 저작들에서 한결같이 열변해 온 ‘종교간 대화’도 분명 먼일이 아닐 것이다. 내 속에서 새로운 의식을 일깨우는 이른바 ‘환기식 독법’이 특히 와 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종교간의 대화는 서로 상대에게 ‘거울을 들어 주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불교인과 그리스도인이 대화를 할 경우, 그리스도인은 불교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불교인 역시 그리스도교에 비친 자신의 모습 일부를 볼 수 있다.

    ― 본문 27쪽 <들어가면서> 중에서

    ‘이웃 종교’에 비춰 본 그리스도교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의 저자는 평생을 바친 대가다운 지식의 광범함을 바탕으로 ‘종교간 대화’를 강조한다. 이론에 그칠 수도 있을 주장이, 유독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실생활의 변화까지 꿈꾸게 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미 깨우친 저자가 주는 울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종교들을 섭렵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먼저 마음을 열었고, 치우치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 ‘자체’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는데, 어느 한 종교의 심층에서 그 참된 의미를 찾은 것만큼이나 깊은 깨달음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아닐까?

    더구나 이 심오한 진리를 ‘중학생 필독서’(<도덕경>, 2010)로 꼽힐 정도로 쉬운 이야기로 풀어주니 많은 독자들이 오강남 교수의 책을 읽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고백하면서 그를 ‘인생의 반딧불’로 여기는 것이 과장된 찬사만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어려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 어릴 때 받았던 보수주의적인 그리스도교의 영향 때문에 불교나 다른 이웃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그렇게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 박사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캐나다로 유학을 갔습니다. … 한국에서 개론 정도를 배운 데 그친 동양 종교에 대한 지식으로는 비교종교학을 올바로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서, 동양 종교를 한번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동양 종교 과목을 택했습니다.

    처음 택한 것이 중국인 교수가 가르치는 <법화경> 강의와 인도인 교수가 가르치는 <중관론>, 또 다른 인도인 교수가 가르치는 힌두교 베단타 사상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이어서 도가 사상, 선사상 등도 접하면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종교의 세계가 눈앞에 새로이 전개되는 것을 보았고, 필자가 종래까지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도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 본문 9~10쪽 <독자들께> 중에서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라는 대담집에서도 <종교, 심층을 보다>에서도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음’만을 강조하는 표층 그리스도교에서 벗어나 예수의 말씀 속에 감춰진 ‘비밀’을 깨닫자며 ‘이웃 종교’에 비춘 그리스도교의 참뜻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을 ‘그노시스’라 불렀다. 한문으로 이를 보통 ‘영지’라고 번역하고 영어로는 ‘knowledge’라 옮긴다. 그노시스는 앎이긴 하지만 남이 가르쳐 주어서 아는 앎이 아니라 스스로 눈이 뜨여 사물의 깊은 차원을 봄으로써 ‘아하!’를 외치게 하는 앎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말로 ‘깨침’ 또는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원뜻에 가깝다. 그노시스는 불교의 ‘반야’, 곧 혜(慧) /명(明) / 지혜(智慧), 현대어로 통찰, 꿰뚫어 봄, 직관 등에 해당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 본문 204쪽 <깨달음의 언어, <도마복음>> 중에서

    이 같은 해석은, 1945년 12월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여러 복음서들 특히 <도마복음>을 통해서 더욱 탄탄해진다.

    주류 교단에서는 여전히 이단 문서처럼 취급하기도 하지만, 도마가 예수의 쌍둥이 형제로 오인될 정도로 그 가르침이 주는 심오함이 깊기에 22세에 옥스퍼드대학의 교수로 임용된 저술가 앤드루 하비는 1945년에 발견된 <도마복음>을 가리켜, 같은 해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졌다고까지 언급한 바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깨침’을 강조하는 <도마복음>이기에 지금껏 표층 신앙만 가능하고 심층 차원은 없는 게 아닌가 싶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증거로서 충분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익숙한 예수의 ‘천국 복음’ 즉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느니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선보인다. 이 구절은 예수가 제일 처음으로 선포한 기별이자,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외친 핵심 기별이다.

    일반적으로 회개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 정도로 이해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의 뜻이 ‘의식을 바꾸라’, ‘보는 법을 바꾸라’임을 일깨우며 그리스도인도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하”는 길벗이 될 수 있음을, 새로 나온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가 그 이해의 첫걸음이 되기를 역설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말은 그러니까 “눈을 떠서 천국이 가까이 있음을 알라” 또는 “정신 차려라. 천국이란 여기 있느니라”라는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를 좀 더 깊이 해석해서,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의식 자체를 바꾸라. 그러면 천국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 본문 183쪽 <8장 고백의 언어, 더 깊은 의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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