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제노사이드와 역사 속의 '정의'
[프로파일러의 범죄이야기] 과거와 마주서기의 불편함
    2014년 01월 03일 10: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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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의 원적은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이다. 내 어릴 적 기억의 조각 속에서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컷이 하나있다.

철길 위를 걷던 중학생 정도의 여학생 둘이 교복을 입은 채, 치마 속에서 개머리판 없는 카빈 소총을 꺼내, 시내에서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리는 장면이다.

물론 이 장면은 실제 영화의 한 장면은 아니다. 내 환상의 잔영일 뿐, 그런데도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고 하는 것은 내 아버지가 술 마시고 언제나 뇌까리던 넋두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도 마치 실제 본 것처럼 기억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 아버지는 1930년생으로, 젊은 시절 왜정(식민지시대)과, 해방, 625 한국전쟁을 이 지역에서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저리게 겪었다.

현대사의 많은 기억들이 사라져버리고 강제로 망각되어졌지만 그중에서도 10.19 사건이라고 하면 보통 나이든 사람들도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대충 ‘여순 사건’, 정확히 말하자면 ‘여수순천 반란사건’이라고 하면 약간 알까?

이 사건은 제주 4.3 바로 전에 발생해서 4.3으로 연결되는 연결선 상에서 주요한 고리의 위상을 갖는 사건이다. 그렇지만 주지하듯이 제주도 4.3 항쟁은 역사 속에서 어느 정도 복원되었지만 그 사건과 깊게 관련된 ‘여순 사건’은 아직 현대사의 기억 저편에 단순히 ‘사건(event)’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여순 사건’에서는 제주 4.3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이는 바로 다음 다음해 6.25로 이어져 더 큰 학살과 보복 학살 등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마을이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향을 등졌다.

제노사이드는 이른바 ‘대량학살’, ‘인종청소’ 정도로 번역되는 개념이다. 나찌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나, 1990년대 구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 중앙아프리카 르완다 등에서 벌어진 부족 사이의 대량학살 등이 이에 해당하며, 유럽인들에 의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학살, 일본 군대에 의한 남경대학살, 장개석에 의한 대만 원주민 학살, 광주 학살 등도 이에 해당한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

주로 전쟁(내전 포함)이나 식민지 모국과 식민지민 사이의 독립상황, 이민족 사이의 갈등상황, 독재와 민주화의 갈등상황 등에서, 일방(주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힘을 가진)의 무력집단이 상대방(일방적으로 열세한)의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하는 집단적이고 광기어린 집단 폭력(강간 포함)이나 살인을 의미한다.

이런 제노사이드에는 보통사람들이 착각하는 오해가 몇 있다. 즉 제노사이드는 전통사회에 주로 심각하고 빈번히 발생했고 근대 사회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별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러나 실제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피정복, 피압박민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우리는 TV 역사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많은 학살 장면을 보게 되지만 픽션은 픽션일 뿐, 실제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은 그 시대에 더 인권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이유 즉 노동력 때문이었다. 대개 전통사회에서 인간노동력은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사망률이 높아서 평균 수명이 매우 낮아서, 전체적인 생산력이 높지 않았던 시대에는 인간 노동력이 주요하고도 유일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노비/노예의 경우는 물론이고 피정복민일지라도 함부로 죽이거나 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죽이는 만큼 지배자 자신들에게는 손해가 나기 때문이다.

만약 학살을 한다고 할 경우 죽이더라도 그들의 우두머리나 혹은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본보기로 죽였을 뿐이다.

전통시대에 피정복민을 학살한 가장 유명한 사례 중에 하나가 칭기즈칸의 사례일 것이다.

칭기스칸의 몽고군이 중국 내륙으로 진격하면서, 중국을 정복하기 위한 첫 관문인 지금의 북경성에서 행한 잔인한 학살은, 잔인한 몽고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그것은 단지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기 위한 전격전 군사전략의 하나였을 뿐, 실제 몽고군은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에서 함부로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제노사이드가 심각하게 문제가 된 시기는 과거 전통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전통사회에서 벗어난 훨씬 이후의 일이다.

생산력이 급격히 성장했기에 굳이 인간노동력이라는 존재의 가치는 훨씬 낮아졌다. 대신 다스려야 할 대상이 많아지면 그 자체가 부담스러운 상황에 처하므로 의도적으로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또한 인구가 늘어나고 공존할 공간은 작게 되어 다양한 집단이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서 집단과 집단 사이에는 다양한 갈등이 상존하게 되고 결국 그러한 갈등이 서로가 서로에 대한 감정적인 흔적을 남기게 되어 결국 다른 집단의 절멸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특히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이나 민족국가의 성립 등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는 집단들이 집단 정체성을 확대시키면서 다양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집단들끼리 충돌하면서 더 많은 제노사이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오해는, 제노사이드가 아무런 이유 없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진다는 오해이다. 그러나 과거 전통사회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현대 사회에 가까울수록 제노사이드는 가장 숭고한 가치를 걸고 발생한다. ‘신을 위해서’, ‘혈통의 순수함을 위해서’, ‘왕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등등. 결국 이 모든 것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제노사이드를 주도하는 집단은 무지렁이 폭력배들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식으로 잘 무장된 하이클래스 엘리트집단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광포한 학살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한다.

그렇기에 정의라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개념은 아닌 것이다. 정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평가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10.19 사건이 아직도 빨갱이들의 군사반란으로 규정되듯이 내 아버지와 그 집성촌도 역시 한국사회에서는 역사적으로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사라져갔다. 수십 년을 숨어살다가 겨우 복권되었지만 제노사이드의 아픈 기억이 술로 잊게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0.19 사건은 아직도 군사변란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남로당원과 남로당에 포섭된 일부 군인들에 의한 변란 정도로 규정하는 배경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합리화시켜줄 매우 유용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친일파 색채를 노골화하고 있던 이승만 정권에게 자신을 반대하는 그 누구도 철저히 눌러야 하는 적에 다름없었다. 이들처럼 제노사이드는, 합리적인 수단으로 지배를 달성할 수 없는 소수의 집단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정통성을 상실한 소수 권력집단 제노사이드에 유혹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 자체의 발단이나 주동자 누구누구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는 분명 위와 같은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사건을 제대로 보기위해서는, 주동자가 누구이며 그들이 몇 월 몇 일 몇 시에 누구에게 총을 쏘았는가? 등의 사건전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왜 소수에 의한 우발적인 변란이, 남로당을 지지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결국 몇 개의 도시 전체가 가담하는 큰 사건으로 급변했는가가 중요한 점인 것이다. 또한 왜 열 몇 살도 안 된 나이 어린 여중생들이 치마 속에 총을 숨기고 군인들과 시가전을 벌렸을까? 에 대한 이유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정의가 중요한 것이다. 즉 정의는 구체적으로 누가 무엇을 언제 했는가? 등에 대한 실증적인 사실을 밝히는 것만이 핵심은 아닌 것이다. 여중생이 치마 속에 카빈총을 감추고 시가전을 벌이는 것 자체로 정의를 논할 수 없다. 왜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것이 정의이다. 그래서 역사는 다시 해석되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정의에 다가가기에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정의에 다가가다 보면 분명 나 같은 경우에는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아버지나 혹은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정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용기인 것이다. 불편함을 극복할 용기. (다음 회에 계속)

 

필자소개
배상훈
2000년대 중후반 경찰청 범죄심리수사관(프로파일러)과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팀(프로파일링 부서) 재직했다. 현재는 서울디지털대학 경찰학과 교수이며, 국립중앙경찰학교 (수사) 프로파일링 과목 담당 외래교수이다.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진보정치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임상병리사와 사회복지사를 거쳐 프로파일러의 삶을 살아온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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