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만날 수 있나?
    [비판과 비평] 진보적 자유주의 비판 ③
        2012년 06월 18일 12: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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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종석씨의 자유주의 비판 연재 글의 마지막 글이다. 두번째 글을 보려면 여기를 (편집자)

    자유주의의 딜레마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이하 [자유주의]]의 저자들은, 제목 그대로 자유주의가 진보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앞의 두 글에서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진보성은,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물론 얼마나 성공적으로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했는가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한다.

    필자는 [자유주의]의 저자들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저자들처럼 ‘자유주의’가 진보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시다시피 자유주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 차이에 대한 관용과 다원성의 존중, 제도적 합리성을 통한 갈등의 조정, 개인의 존엄성과 평등권을 옹호했다. 이런 사상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도대체 어떤 사상이 매력적일 수 있는가?

    자유주의가 이런 매력을 흠뻑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급진주의자들이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의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스스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백인 남성 부르주아의 자유와 평등, 참정권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정작 인민 일반의 자유에 대해서는 19세기 전 역사에 걸쳐 철저하게 외면했다. 더 나아가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 즉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의 측면에서만 자기 신념대로 철저히 행동했을 뿐이다.

    골드만 삭스 출신의 미 재무부 장관 루빈과 DJ

    필자가 [자유주의]를 비판했던 이유는, [자유주의]의 저자들이 실질적으로 주장하는 경제체제가 인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이면서, 말로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가 인민의 삶을 파괴하고 위협하는데, 인권이니 평등이니 민주주의니 공허한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말이다.

    [자유주의] 비판 마지막 부분으로 필자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진보적이려면 어떤 조건이 실현되어야 하는가를 논하고자 한다.

    만약 자유주의가 진정으로 ‘진보적이고자 한다면’ 다음에 제시되는 과제들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그들도 동참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조건이라면 사회주의자들도 진보적 자유주의와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의는 또한 현 국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가를 점검해 보는 기회도 될 것 같다.

    시민권과 노동자계급

    앞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자유주의]의 저자들은 자유주의의 핵심은 정치적 자유이자 만민 평등의 사상이라고 한다. 비록 그들은 19세기 자유주의가 ‘부르주아의 소유권에만 관심을 둔 정치적 특권주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자유주의의 이상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고, 20세기의 서구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그와 같은 이상에 다가가려 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근대 자유주의가 계몽주의의 유산인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보편적 시민권을 주장한다. 칸트는 이성적 존재로서 시민은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공동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라고 주장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은 타율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동적 주체인 것이다. 이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시민권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필자가 ‘자유주의는 망각을 먹고 살아 가는가?’에서 지적했듯이, 칸트적 주체는 결국 부르주아의 소유권으로 특권화 되면서 남성 부르주아 백인의 시민권으로 제한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자유와 평등이 특권적 집단에게만 소유되는 것으로 한정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사회주의자들이나 여타 급진주의자들은 인간이 곧 시민이고 시민이 곧 인간이라면, 모든 인간은 정치에 참여할 동등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러시아혁명과 파시즘의 패배 이후 현대 자유주의는 극적으로 변모한다. 현대 자유주의는 보편적 시민권을 실현한 것이다. 칸트의 이상대로 모든 시민은 주권적 주체로서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모든 사회적 지위는 개방되게 된다. ‘부르주아적 시민권’이 ‘보편적 시민권’으로 전환된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체제가 보편적 시민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를 사회적 주체로 승인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얼굴’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고전적 케인즈주의는 노동조합을 매개로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주체로 인정한다. 부르주아의 소유권을 제한하고, 복지를 공급함으로써 모든 이들의 기본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개인으로서 노동자, 여성은 부르주아와의 관계에서 아무런 협상력이 없다는 점이다.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시민은 주권적 주체가 아니라 예속된 주체일 뿐이다. 개별 시민은 그저 단지 보통 선거권을 행사하는 개체로서 결코 사회적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르주아는 국가와 다양한 사회적 장치로 조직되어 있는 반면 개별 시민들은 그저 무기력한 개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노동자계급으로 스스로 구성될 때에만 주권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도 마찬가지다.

    이 사실은 [자유주의] 저자들이 전제하듯이,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에서 구조화된 생산관계를 전환시켜야만 정치적 자유마저 제대로 정착된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시민들을 주권적 주체로 여긴다면, 단지 보통 선거권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노동자계급, 여성 등을 실질적인 사회적 주체로 인정하는 투쟁에 동참해야 한다.

    최장집 등이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주장한다면, 노총으로 하여금 민주당을 지지할 것을 주장할게 아니라 민주당 정권에서 이뤄졌던 노조 파괴에 대한 근본적 반성부터 제출하는 것이 순리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를 주장하기에 앞서서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전환된 구조적 원인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자신의 진정성을 보일 때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 것이다.

    롤즈를 통해 복지를 공급한다고?

     이 점에서 최근에 자유주의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자유주의자 존 롤즈의 한계는 분명하다. 정태인은 롤즈를 통해서도 복지국가는 충분히 건설될 수 있다고 하며 진보진영의 이념의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 [자유주의]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롤즈는 ‘좋은 자유주의’에 대한 일종의 아이콘인 것이다.

    롤즈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공정한 절차를 통해 사회적 계약을 도출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지의 베일’을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기적인 개인들은 자신들의 상황이나 미래에 대한 ‘무지’가 있어야 사회적 계약에 참여한다.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안다면 다른 이들과 계약을 하지 않고 자기 특권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조건과 미래에 대해 몰라야 ‘최소 수혜자가 최대 이익이 되는’ 계약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 로베르트 노직의 롤즈 비판에서도 드러나듯이, 롤즈의 ‘무지의 베일의 가정’과는 반대로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 여성, 이민자들과 자신들의 지위가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러므로 사회적 약자들과 사회적 계약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부르주아들은 다른 사회구성원과 계약하여 사회제도를 안정화시키지 않더라도 그들 자신만의 부를 통해 자기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 체제는 정확히 이 현실을 보여준다. 마뉴엘 카스텔이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에서 잘 보여주고 있듯이, 부르주아들은 세계 도시에서 특정 지역에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다른 계급의 인간들의 접근을 배제한다.

    한국에 강남이 있듯이 LA에는 샌호세가 있고, 리우데자네이로에는 무장경찰이 지키는 부르주아들만의 독립된 도시가 따로 건설되어 있다. 21세기의 부르주아들은 타자와의 계약을 통한 안전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의한 안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최소 수혜자를 위해 세금을 낼 의사가 없다.

    사회적 계약을 거부하는 부르주아의 또 다른 모습은 주변부 국가의 인재 유출과 자본 도피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와 그리스 위기에서 보듯이, 자본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금융체계로 인해 경제위기가 닥치면 부르주아들은 중심부 국가로 자본을 도피시켜버린다. 구지 국민경제를 위해 자본을 국내 은행에 예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부르주아의 자식들은 미국으로 유학 가서 현지에 정착해 버린다. 능력 있는 부르주아의 아이들이 불안정한 모국으로 다시 돌아올 이유가 어디 있나? 세계시민이 된 오늘날의 부르주아는 구차한 민족적 사회계약에 발목 잡힐 이유가 없다. 그들은 언제나 민족국가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고, 자본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현재의 금융체계는 이런 부르주아의 이익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앞의 글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얼굴’에서도 지적했듯이, 전후 자본주의 체제에서 계급타협은 노동조합을 제도로서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롤즈식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로는 현실의 사회적 타협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노동자의 집단적 힘을 강화하지 않고 어떻게 개별 시민이 부르주아와 동등한 계약에 참여한단 말인가? 부르주아들이 사회계약에 동참하는 경우는 제도적 통제와 노동자계급의 힘의 성장, 사회적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고세훈이 지적하고 있듯이, 최장집 등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정치적 이상(자유-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123쪽) 사민주의 체제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도 조직된 노동의 힘과 중간계급의 급진화, 혁명을 예방할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뤄졌다.

    자유주의의 이상 실현은 롤즈의 주장과 같은 우아한 자유주의적 방법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힘과 사회의 급진화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주의와 케인즈주의의 타협 : 금융 억압과 생산적 투자

     [자유주의]의 저자들은 합의제 민주주의라는 제목 하에 모든 좋은 것들은 다 모아놓았다. 복지, 민주주의, 연합정치, 경제적 효율성 등 긍정적 상징으로 통용되는 모든 내용들을 포함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 핵심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의 안착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통치연합의 구성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조정시장경제와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핵심 구성주체인 금융자본주의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미의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독일식 조정시장경제의 장점을 열거하고 있지만 금융적 축적국면으로 전환한 한국 경제를 어떻게 산업투자 중심으로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을 전혀 제시하고 있지 않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윤율 저하로 인해 투자부족이 발생하고 유휴자본은 유동성의 형태로 금융부분으로 유입된다. 자본의 금융화로 인해 다시 투자 부족이 발생하고, 투자부족은 다시 고용을 줄임으로써 노동의 불안정을 조장한다. [자유주의]는 노동자계급과 시민의 복지를 위협하는 주된 원인이 경제의 금융화임에도 불구하고 금융체제에 대한 개선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와 케인즈주의가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

     케인즈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를 주장했다. 금융자본을 억압함으로써 유휴자본을 생산적 부분으로 투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위해 케인즈는 겸업은행을 금지하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시리킨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제도이다.

    더불어 중앙은행을 지식경제부 산하에 두고 경제정책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자본이동을 제한하는 법을 통해 주식시장에 유입되는 단기자금을 차단하고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들의 채권투자를 최소로 제한해야 한다. 공적연금을 통해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함으로써 주가의 버팀목이 되도록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제한하자는 말이다.

    이런 조처는 주식시장 자체의 성장을 억압하고 주가 총액을 낮출 것이지만 그렇다고 기업의 자본조달 문제를 유발하지 않는다. 연기금을 동원하여 은행을 재국유화하고 정책금융을 통해 중소기업에 대출하면 중소기업 자금난을 해결할 수 있으며, 대기업으로 하여금 배당을 줄이고 사내유보금을 확보하도록 하면 투자자금 확보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FTA폐기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앞에서 열거한 금융정책을 곧바로 시행하게 되면 국가가 ‘투자자 소송’에 휘말려 들 것은 눈에 보듯 뻔하다. FTA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위에서 언급된 어떤 정책도 자율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 더불어 자본도피를 막는 수단도 마련할 수 없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 [선택])의 FTA가 이미 체결된 마당에 약소국인 한국이 일방적으로 폐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는데, 금융억압을 단행하지 않고 자본을 생산적 투자로 유인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필자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이유는, 이들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의식 때문이다. [선택]은 주주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를 억압해야만 유휴 자본이 생산적인 투자로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본이 생산적 투자를 해야만 제대로 된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고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경제민주화를 지지하는 민주당 씽크탱크나 지식인들이 사실상 이런 문제에 대해 침묵하며 금융주도적 축적국면을 지속시키려고 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한 것도 이들의 문제의식을 지지한 이유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투자의 주체는 재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들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재벌해체가 인민주의적 구호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안적인 정책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재벌옹호가 아니라 현실적인 조건에서 대안을 찾자는 것으로 이해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맥은 ‘생산적 투자의 필요성’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재벌옹호집단으로 몰고 간 것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경제민주화 논자들의 인식이 얼마나 일천했나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그나마 논쟁 과정에서 [선택]의 문제의식이 상당부분 수용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성장을 반대하는가?

    현 국면에서 국가가 나서서 자본의 생산적 투자를 촉진하고 강제하는 것에 대해 좌파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생산적 투자가 되어야 일자리가 유지되고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있어야 노동조합의 힘이 커지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의 몇몇 논자들이 생태친화적인 반성장을 주장하고 있지만, 현재의 국면에서 생산적 투자를 하지 않고 반성장주의로 간다는 것은 생태친화적 환경으로 한국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 자체의 붕괴만을 초래할 뿐이다.

    한국이 투자를 통해 일정한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현재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는 퇴행할 것이다. 이는 자본의 경쟁력만이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삶의 조건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가 반주변에서 주변으로 퇴행하면 그 체제는 생태친화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붕괴와 함께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처참해지고 이는 더 심한 생태계 약탈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두 계급의 공멸이라고 했다. 남한의 부르주아와 노동자계급이 공멸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언제 마르크스주의가 부르주아 체제의 경쟁력을 걱정했나’ 하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국가경쟁력을 키우자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국면에서 노동자계급의 힘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성장을 위한 투자를 부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비록 부르주아 체제가 안정된 비율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물경제의 성장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착취 받을 기회를 만드는 것이 착취로부터 배제되는 것보다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하다. 현재와 같은 국면이 그런 상황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노조의 힘을 강화시킨다는 조건이 있을 때 지지받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현재의 국면에서 노동자운동이 반자본주의적 실천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부르주아의 생산적 투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운동 스스로 대안 세계화 운동의 주체가 됨으로써 금융주도적 축적국면을 전환시켜 내는 것이다. 현 국면은 개별 국가의 좌파가 세계화를 거부하고, 반성장주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금융에 대한 규제와 사회적 협약을 지키는 실천을 강제함으로써 초국적금융자본에 맞서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반체제운동이지 개별 국가에서 ‘우리끼리 망하는 전략’이 좌파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자유주의 비판을 위하여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다른 새로운 사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윤소영 선생이 [알튀세르를 위한 강의]에서 엥겔스와 발리바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설명하면서 주장하듯이, 모든 이데올로기는 대중의 이데올로기이다.

    대중의 이데올로기는 대중의 염원, 대중의 꿈을 담고 있다. 지배이데올로기는 이와 같은 대중의 열망을 지배체제와 교묘히 결합시킴으로써 체제를 유지한다. 지배이데올로기는 비록 대중의 이데올로기이지만 지배체제를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도 이런 이데올로기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자유주의]의 저자들이 자랑하며 쓰고 있듯이, 오늘날의 자유주의는 ‘만민 평등’, 자유, 인권, 타자에 배려 등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유주의는 자유란 소유권의 자유만을 주장하고, 평등이란 법앞의 평등일 뿐이며, 인권이란 시장에서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인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환시켜 버린다.

    타자에 대한 배려, 차이의 존중은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으로 부자는 부자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권리가 될 수 있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의 염원을 전형적인 부르주아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저자들 역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이런 본질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주의’를 통해 민중들의 보편적 요구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구상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복지, 일자리, 민주주의, 인권,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들이 말하는 정책은 신자유주의로 전환된 새케인즈주의일 뿐이다. [자유주의] 또한 대중의 긍정적 염원을 지배적 질서 속에서 가두려는 것일 뿐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은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외부에서 도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발본화 시킴으로써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자유주의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로 그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자유주의 정책,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지점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네그리주의자들처럼 외부로 탈주하지 않는다. 또한 근본 생태주의자들처럼 반성장주의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좌파는 현존하는 체제의 내적 요구를 발본화시켜 그 체제를 넘어서고자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로만 떠들던 것을 실제로 실현시킴으로써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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