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질이 바꾼 20세기 '뤼순 함락'
    [산하의 오역] 1905년 1월 2일...역사를 뒤틀리게 만든 전투
        2014년 01월 02일 05:5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1904년 2월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상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사나운 기세로 러시아를 몰아부쳤고, 몇 번의 중요한 승리 끝에 러시아 극동함대 기지가 있던 뤼순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요새 축성 전문가를 보유한 러시아군은 시간과 장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뤼순 남산을 둘러싼 전투 후 전문을 받은 일본군 총사령부는 경악한다. “3천명이 한 전투에서 죽어? 3백명을 잘못 전달한 것 아닌가?” 어떻게 한 전투에서 3천명이 죽어 자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고, 10년 전 조선의 동학농민군들이 당한 그대로였다.

    일본도를 휘두르며 도쯔께끼!(돌격)를 외치는 지휘관들을 용감히 따르던 병사들은 기관총의 밥이 됐다. 가까스로 뤼순 외곽은 점령했지만 일본은 애가 탔다. 이 항구를 손에 넣어 러시아 극동함대를 무력화시키지 못한 채 저 유명한 러시아 발틱함대까지 나타난다면, 그리고 세계 최고의 육군국 러시아의 2백만 대군이 본격적으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몰려온다면 글자 그대로 끝이었다.

    일본군은 그야말로 자살적인 돌격을 되풀이한다. 일본군 특유의 ‘반자이 돌격’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살적으로 벌이는 돌격)은 2차 대전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러일전쟁

    뤼순항 203고지 전투의 목판화

    8월의 1차 공세 때에는 1만 5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 1개 사단이 사라진 것이다. 2차 공세 때에는 5천 명이 죽어 없어졌다. 두 번의 전투에서 2만 명의 피해라니, 일본 대본영도 난리가 났지만 러시아군도 “일본군들이 왜 이리 자국군을 헛되이 죽게 하는지, 도대체 무슨 작전인지”를 궁금해 했다.

    무슨 꿍심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러시아군도 머리가 아플 밖에. 일본군의 시체가 워낙 태산처럼 쌓여가면서 그 악취가 진동하여 러시아군들은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어서 나프탈렌을 코에 대고서 이동하거나 근무해야 했다.

    3차 대공세는 그야말로 희극적인 비극이었다. 국내에서 박박 긁어모은 병력까지 가세한 총공세는 11월 26일 벌어지는데, 러시아군 사령관 스테셀은 이상하게도 일본군이 26일만 되면 공격을 가해 온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포화망을 구축하고서 일본군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또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해 들어온다.

    왜 하필이면 26일인가를 묻는 질문에 일본군 지휘관 이지치 고스케는 불후의 명답을 남긴다.

    “첫째 화약 준비에 한 달 정도 걸린다. (그래서 26일마다 공격한다!) 둘째 뤼순 남산을 돌파한 날이 26일이었다. 운이 좋은 날이다. 26이라는 숫자는 짝수이기 때문에 둘로 쪼갤 수 있다. 그러니 이 날은 뤼순 요새를 쪼개는 날이다.”

    그리고 명령대로 일본군은 “똑같은 경로로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러시아군은 너무도 고마워하며 그들을 ‘처리‘했다. 용감하기 그지없었던 일본군 보병들은 ’용기‘ 외에는 몰랐던 지휘관들에 의해 일순간에 송장이 되어 버렸다.

    마침내 일본군도 지휘관을 바꾸었고, 삽질대장 이지치와 그 상관 노기 마레스키의 지휘권은 사실상 새 지휘관 고마다 겐타로에게로 넘어갔다. (물론 노기 마레스케가 형식상 지휘관이었다.)

    고마다는 뤼순 요새와 항구를 내려다보는 203고지에 보병의 무모한 돌격 대신 포격을 집중하여 러시아 포대를 침묵시키고 특공대를 투입하여 203고지를 장악한다. 그리고 203고지를 장악한 뒤 훤히 내려다보이는 러시아 함대를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러시아 극동 함대는 괴멸적 타격을 입는다.

    러시아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더군다나 러시아군은 기본 식량은 풍부했지만 오랜 봉쇄로 인한 채소류 부족 때문에 비타민 C 섭취 부족으로 괴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측 창고에는 만주 특산의 콩이 창고마다 가득했다. 하지만 러시아군 수만 명 가운데 콩에서 비타민C가 풍부한 콩나물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러시아측의 비극이었다.

    마침내 1905년 1월 2일 수만 명의 시체를 뒤로 하고 러시아군은 항복했다. 끔찍한 삽질로 점철된 뤼순 공방전은 20세기의 역사를 결정한 사건이었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러시아 발틱함대는 여순으로 오지 못하고 좁은 대한 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야 했고, 그 와중에 일본 해군에게 전멸당한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뤼순의 203고지에서 일본의 노리개로 결정됐고, ‘동방의 원숭이’에게 참패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전쟁이 가져온 경제적 피폐는 러시아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피의 일요일’ 사건을 낳은 것이다.

    그렇게 사람 목숨을 흙처럼 내다버린 삽질의 주인공이었던 일본군 최고 지휘관 노기 마레스케는 ‘군신’으로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는다. 메이지 천황이 죽은 다음 그를 따라 부인과 함께 자결해 버린 뒤엔 더욱.

    이 시절 이후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은 약삭빠른 지혜보다 무모한 용기에 더 점수를 주었고,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신중함보다는 앞뒤를 재지 않고 스스로 배를 째는 ‘장렬함’에 도취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역사를 뒤바꾼 삽질” 뤼순 공방전은 그 불길한 첫 봉우리였다.

    일본의 불행한 과거에 혀를 끌끌 차다보니 문득 “우리는??”이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져 보게 된다. 우리는 그런 삽질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런 습성은 애오라지 일본인만의 것인가?

    ‘약삭빠른 지혜보다는 무모한 용기’에 더 감동한 적은 없는가? 실컷 삽질을 해 놓고도 “그래도 우리 용감했다”고 고무찬양한 적은 없는가?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