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탈지아 정치의 막을 내려라
[에정칼럼] '안녕하지 못한' 모든 이들의 연대를 위하여
    2013년 12월 23일 12:06 오후

Print Friendly

폭력의 시대, 나의 어머니들은 평온했다.

태양이 부활한다는 동짓날 부활한 것은 무자비한 공권력이었다. 95년 민주노총 창립 이래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던 폭력이었다.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보고 배운대로 하는구나” 어쩌다 우리는 한 번의 아픔으로 끝나도 좋을 폭력의 시대를 또 한 번 맞이해야 하는 걸까?

딸을 둔 죄인으로 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늘 나를 지지하는 가장 큰 우군이 되었다. 그러던 어머니가 얼마 전 친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어느 정도 예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이었다.

52년생인 나의 어머니는 박정희 정권과 함께 살아왔다. 10대에 개헌과 유신의 사회 격변기를 목도했고, 유신 직후부터 긴급조치 시대까지 인생의 가장 화려한 20대를 보냈다. 그 이후는 결혼을 하고 유신보다 무서웠을 ‘시댁’에서 생활은 어머니의 시선을 사회에서 멀어지게 했을 것이다.

전지적 어머니들 시점으로 본 유신은 분명 폭력적이었다. “아마 너희들은 그때처럼 살라고 하면 못 살 거야”라는 말은 얼마나 고단한 시대였는지를 알게 한다.

그런데 반전은 그때부터다. 화려했던 20대에 국가가 통금시간을 정하고 두발과 복장을 검사하던 그 시기를 웃으며 회상하고, 수많은 민중이 단발의 총성과 함께 세상을 떠났어도 그보다 더 큰 슬픔의 기억은 독재자 1인의 사망이라고 스스로 기록하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들에게 당시는, 어쩌면 평온할 수 있던 그들의 삶에 이름 모를 폭도가 많았던 한때로 기억되고, 결국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로 귀결된다. 듣고 있자니 이 대화는 도대체 뭔가 싶다. 흠칫 꿈에서도 가기 싫다고 치를 떨며 군대를 욕하면서도 끝끝내 군대 문화에 열광하던 복학생 형아들이 생각이 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향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자신은 힘들었고 두 번은 싫은데 그런데도 좋다는 이런 모순, 결국 이 향수가 모여 노스탈지어 정부에 정권을 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폭력 앞에 서 있다.

22일 경찰의 민주노총 침탈 장면

22일 경찰의 민주노총 침탈 장면

2013년의 노스탈지아 정치의 폭력

2013년 한해도 속절없이 저물어 가고 있다.

‘녹색성장’이 ‘창조경제’로 바뀌었지만 올해 한국 사회는 하나도 창조적이지 않았다. 정권은 여전히 민중에게 폭압적이고,(폭압에 있어서 창조적이었을지는 모르겠다.) 폭압의 대상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향수병에 걸린 듯 독재의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금 그 시절을 부르짖고 있다.

얼마 전 친구의 SNS에 ‘지구촌 곳곳에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어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2014년 달력의 사진이 올라왔다. 동시에 “새마을운동 덕에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사는 거야”라는 어머니들의 대화가 다시금 가슴을 찔렀다. 훌륭했다. 이보다 더 지지자들의 향수를 자극할 정책이 뭐가 있을까?

어쩜 이리도 하나 창조적인 것이 없을까 싶으면서도 그나마 이름만 바꾸고 알맹이는 똑같던 다른 정권보다는 솔직하다는 점은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무덤 속에 있던 정책들을 하나하나 꺼내는 동안 이 노스탈지아 정권의 폭력 또한 닮아가고 있다.

올해 개인적으로 가장 아픈 기록은 밀양이다. 누군가에게 어떻게 기억되든, 밀양의 어르신들은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일들을 겪고 있다. 이미 어르신 두 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전력 시스템에 대한 크나큰 반성과 새로운 방법에 대한 모색은 없다. 전기요금을 올리는데 있어서 그저 미안하다며 소비자인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한전은 밀양에게는 난폭했다. 새마을운동처럼 모두가 동등하게 함께 잘사는 것이 아니라 더 잘살기 위한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답습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 누군가의 포기를 강요하는가? 어르신들은 왜 누군가의 갑을 위해 병이나 정이 되어야 하며, 사람들은 왜 그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것은 ‘노스탈지아’가 주는 환상일 뿐이다. 우리는 그때도 지금도 우리는 함께 잘 살지 못하고 있다.

움츠리고 있는 안녕하지 못한 이들에게

‘염치가 없다.’

나의 올해의 소회다.

불만 많고, 분노하지만 서울의 중심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는 내가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다. 한때 예능에서 유행했던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은 예능에서처럼 마냥 재밌고 우습지 않다.

밀양의 어르신뿐이 아니다. 오늘도 추운 길에서 절규하고 있을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을 포함한 투쟁의 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는 참으로 많은 ‘나’외의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나는 ‘안녕’할 수 있을까?

밀양의 소식은 가장 아픈 올해의 기억이 되겠지만 또한 밀양을 찾은 쌍용차 노조의 이야기는 올해 나에게 가장 고맙고 인상 깊은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핸드폰이나 컴퓨터 앞에서만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서로의 ‘안녕’을 묻지만 만나서 위로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안녕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촛불을 들자는 이야기는 고루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염치없이 2013년을 하며 그 고루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밀양에서 노조를 만났듯, 노조의 전선에서 밀양을, 반핵을 그리고 “안녕하지 못한” 오늘의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