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험 정신과 고고학적 열정의 만남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스벤 헤딘의 <티베트 원정기>
        2013년 12월 16일 0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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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 시대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화 형식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기행(紀行)’일 것이다. 미지의 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그에 따른 고도의 탐험 정신을 필요로 하는 ‘기행’은, 그 시간만큼은 자신을 송두리째 타자화(他者化)함으로써 ‘낯선 자아’와 한껏 마주치게 하는 기능을 한다.

    물론 기행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전제로 한 떠남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익숙한 자아’로 귀환하는 회귀형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자아’는 이미 ‘예전의 자아’가 아니다. 타자의 경험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인 탓에, 그 ‘자아’는 이미 ‘새로워진 자아’이다. 그래서 “떠나라!”라는 캠페인이 여기저기서 빈번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한 ‘문명 기행’ 시리즈 2탄인 스벤 헤딘의 <티베트 원정기>는, ‘문명 기행’이라는 고고학적 열정을 통해 인류의 가장 깊은 근원을 탐사한 후, 그것들을 활자의 기록으로 내보이는 과정을 거친다.

    출판사 측에서도 “탐구와 헌신과 희생이 바탕이 된 인류의 지적 소산을 갈무리할 ‘문명 기행’ 시리즈는 한 편의 문명 대서사시를 일구는 작업”(363쪽)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티베트 원정기>는 “아시아의 심장부”(19쪽)에 위치하고 있는 티베트를 탐사하고 그 안에 내장되어 있는 불변의 ‘문명 대서사시’를 재구성해 보여준 역작이다. 1934년에 뉴욕에서 출간된 원저(原著)의 국내 초역(初譯)이다.

    이 책의 저자 스벤 헤딘(Sven Anders Hedin, 1865-1952)은 스웨덴의 탐험가로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티베트를 세 차례 원정하였다.

    이 책은 벌써 100년이 지난 그 같은 원정의 흔적을 담은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은 ‘티베트’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만큼 티베트는 중앙아시아에 존재하는 어떤 한 공간이 아니라 인류의 시원(始原)을 품고 있는 근원적 시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따라가는 것은 ‘티베트’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류의 시원이 숨쉬고 있는 그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2.

    이 책은 저자가 1896년부터 1908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티베트에 다녀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앙아시아 탐사에 독보적 업적을 남긴 저자는, 어렸을 때 티베트 관련 여행기를 읽으며 티베트 여행을 동경하게 된다. 그리고 스무 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을 탐방하면서, 탐험가로서의 생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지질학, 생물학, 언어학 등을 수학한 후 티베트 원정에 도전하게 되는데, 책 곳곳에서 증언되어 있듯이, 그 여정은 매우 어려운 과정과 절차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기행은 목숨을 걸고 도전한 험난한 원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스벤 헤딘과 '티베트 원정기'

    스벤 헤딘과 ‘티베트 원정기’

    책의 1장으로부터 3장까지는 1896년에 북부 티베트 고원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한 여정을, 4장부터 7장까지는 1900년으로부터 1901년까지 남부 티베트와 중부의 호수 지역을 거쳐 인도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8장으로부터 16장까지는 1906년부터 1908년까지 티베트 불교 가운데 황모파의 대본산이며 종교 지도자 타시 라마가 거처하고 있는 타시룬포를 방문하고 트랜스히말라야 산맥의 산악 지대를 거쳐 인도로 돌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또한 이 책에는 티베트의 자연 환경, 전통, 생활상, 풍습, 복장 등에 대한 풍부한 사실적 기록이 풍부하게 담겨 있는데, 특히 저자가 직접 소묘한 티베트 풍경이나 지형 혹은 주민 복장 같은 세밀한 그림들은,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처럼 친숙하고도 아름다운 미적 긴장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책이 씌어질 무렵인 19세기말과 20세기초는 사진 기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저자가 직접 그려낸 온갖 풍경과 풍물들의 삽화는 그 시절 티베트의 생활상과 풍습을 아주 잘 알려주고 있다. 말하자면 당시로서는 서구인의 눈길이 전혀 미치지 않았던 티베트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입구로 들어가 저자가 관찰하고 기록한 티베트의 깊은 속살을 만지게 된다.

    어느 날인가 우리는 주목할 만한 한 ‘오보(몽골인들이 그들의 제사용 돌무더기를 이르는 말)’를 지나갔다. 그것은 길이 120-150센티미터쯤 되는 50여 개의 얇은 널빤지 모양의 녹색 점판암들로 이루어졌는데, 끝부분에 잇대어 포개진 채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각각의 점판암에는 티베트어로 성스러운 여섯 글자가 더할 나위 없이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옴 마니 팟메 훔.’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 아멘! 이 말은 ‘구원은 오직 참된 믿음에서만 가능하다’라는 뜻이다.(45-46쪽)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오직 믿음’의 테마이다. 그들도 기독교의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처럼 “연꽃 속의 보석”을 뜨거운 상징처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이러한 원리를 저자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물들을 통해 발견한다.

    특히 그러한 믿음의 체계가 사물들 속에 깊이 깃들여 있다는 증언은 100년 전의 티베트가 서구 특유의 ‘문명/야만’의 이분법을 훨씬 벗어난 자리에 자신의 모습을 드리우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어찌 기독교적 시각으로 티베트를 ‘문명’ 이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같은 통절한 자각 과정에 따르는 물리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철저하게 고통 속에서 그러한 자각이 이루어지고, 티베트의 만만찮은 시간들이 발견되고 의미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우수한 낙타 한 마리가 너무 탈진하여 늑대들에 대비해 경비병과 함께 남겨졌다. 밤중에는 바닥이 딱딱해져 꼼짝달싹 못하는 동물을 구조하기가 한결 수월하겠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진창 속에 얼어붙어 죽어 있었다.(107쪽)

    이처럼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혹한 속에서 그는 이처럼 풍부하고도 사실적인 관찰과 기록을 해낸 것이다. 그의 필치를 따라 티베트 유목민의 남다른 삶이 그려지고, 날아가는 새는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는 티베트 사람들의 종교관이 소개되고, 조장(鳥葬)과 고승의 화장(火葬)이 그려지고, 평생을 갇힌 굴과 섬에서 수행하는 수도자의 모습이 이채롭게 전달되고 있다.

    거기에 두 명의 남편과 함께 사는 유목민 여인이라든가, 수도승처럼 고독해 보이던 젊은 야크 사냥꾼, 무덤을 절대 남기지 않는 풍습, 타시룬포 신년 축제를 위해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 등이 타(他)문화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통해 제시된다.

    이러한 시선은 우리가 강조해마지 않는 ‘타자성’의 윤리 혹은 ‘똘레랑스’의 원리를 선명하게 연상시킨다. 그만큼 저자는 미지의 땅 티베트에서 시간의 지도를 그린 셈이고, 우리의 기억 속에 새로운 영역을 그려내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북쪽에 있는 이 미지의 영역을 횡단하고, 몇 개의 호수와 산을 발견했으며, 강제초를 측량하여 지도를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원정의 목표인 남쪽에 있는 이 미지의 지역을 탐사하고 인더스 강의 수원을 발견하는 것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다.(216쪽)

    이러한 횡단과 발견과 측량과 탐사의 과정은 즉자적(卽自的)이 아닌 대타적(對他的) 방법으로 시간의 근원을 구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저자는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에 바탕을 둔 여행기들 사이에서 객관적이고 사실적 재구를 바탕으로 한 기록 정신을 빛나게 보여준다.

    하지만 역자들도 밝혔듯이, 이 책이 제국주의의 자기 확장에 필요한 티베트의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뜻하지 않은 결과를 제공하게 된 것은 일종의 역사적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강조되어야 할 것은, 번역자인 윤준, 이현숙 교수 부부이다. 이들은 티베트를 지속적으로 방문하여 어린이 교육 사업을 지원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의 번역 인세 전액을 인도에 있는 ‘티베트 어린이 마을(Tibetan Children’s Villages(TCV))’에 기부하기로 했다고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확장되고 있는 지식인의 사회 환원의 한 전형을 보는 것 같아 부기해둔다.

    3.

    궁극적으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탐험하고 경험하고 기록한 인류 문명은 그 양상이 매우 깊다. 그래서 그것들을 찾아가는 기행은 비록 공간 이동의 형식을 빌리고 있더라도, 현저하게 ‘시간’ 탐험의 속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넓이(width)’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depth)’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누가 더 많이 가 보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깊이 들어가 보았느냐의 문제로 수렴되는 것이다.

    옛 힌두족 찬가의 주제인 성스러운 마나사로바 호수는 히말라야 산맥과 트랜스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꿈꾸듯 누워 있다. 인도에서 온 순례자들은 그 연안까지 찾아와 수정처럼 맑은 물로 몸을 씻는다. “그 물결로 몸을 씻는 이는 범천(梵天, 브라마)의 극락에 이를 것이다.” “그 물결을 마시는 이는 사바 신의 천국(대자재천大自在天)에 들어가 백세(百世)의 죄에서 구원되리라”라는 말이 전한다.(301쪽)

    이 같은 ‘속죄(贖罪)’와 ‘구원’의 서사는 고등 종교끼리 공유하는 원리라 할 것인데, 티베트의 삶과 의식도 이러한 삶의 이법(理法)을 오랫동안 간직해온 셈이다. 우리는 그 깊은 흔적을 이 책을 통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이후 지속된 기행록들은, 이처럼 탐험 정신과 고고학적 열정의 만남으로 가능했다.

    헤딘의 <티베트 원정기> 역시 이러한 ‘문명 기행’의 성격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뜻 깊은 실례이다. 더불어 이 책은 최근 해외여행이 보편화하면서 생겨난 ‘너비’ 중심의 관광(觀光) 문화에 대한 깊은 문화론적 자성(自省)의 계기를 지속적으로 던져줄 것이다.

    필자소개
    민교협 회원. 한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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