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마살 자극하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
    훌쩍 떠나 낯선 이들의 낯선 곳을 헤매고 싶은 맘을 들게 하는
        2012년 06월 17일 09: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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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종 늦잠으로 놓치기도 하는 멋진 프로그램이 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토요일 오전 9시반부터 하는 이 프로그램을 모르는 사람도 제법 되는 듯 하지만 그래도 지나치면서 한번쯤 보지 않았을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간에 황금어장 스페셜을 보거나 <잘먹고 잘사는 법>의 황홀한 먹거리 화면에 영혼을 빼앗겼으리라.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도 있고, 외국의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다큐도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토요일 아침에 하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EBS에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내리 하는 ‘세계테마기행’이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가 매력적인 이유부터 나열해보자. 솔직히 나는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나레이션이다. 故박광정씨도 나레이션을 했고, 가수 김C도 오랫동안 참여했다. 그리고 종종 피디가 직접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멋진 것은 멘트 그 자체이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을 파는 가게를 만났다. 반가웠다. 들어가 이것저것 가격을 흥정해보았다’라는 식의 매우 어설픈 듯 하면서도 담백한, 어눌한 듯 하지만 정감 있는 목소리와 함께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흐뭇한 엄마 미소까지 나온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소개 장면

    친구의 배낭여행 필름을 보는 기분

    화면도, 진행도 이런 식이다. 친구 녀석이 혼자 멀리 배낭여행 다녀왔다고 찍은 필름들을 보여주는 기분이랄까. 물건 가격을 흥정하기도 하고, 작은 노점상에서 현지 음식을 먹기도 하고, 어딘가에서는 점을 보기도 하고, 그렇게 여행 책자가 소개해주는 기념 사진용 건물이 아니라 뒷골목을 보여준다.

    그냥 건물들, 골목들, 신호등들, 오가는 사람들, 노점상들, 시장의 과일 파는 할머니, 손녀와 산책 나온 영감님이 나온다. ‘맛있어 보였다. 먹어보기로 했다’라는 성우의 목소리는 정말로 여행자의 그것 같고, 연출되지 않은 날 것의 여행이라는 기분을 선사한다.

    화려한 수식어를 빼버린 저런 명료한 문장의 나레이션을 어디서 본단 말인가. 언젠가 한번은 유럽 어딘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달리며 자전거에 카메라를 달고 여기저기를 누볐다. 정말로 혼자,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그곳에 무작정, 골목을 헤집고 다닌 것 같은 흔들리는 화면이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방법은 한 회당 프로듀서 한명이 기획, 촬영, 편집, 원고작성 등 제작 전 과정을 책임진다. 그러니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수밖에!

    피요르드의 장관을 헬기씬으로 보여준다거나 기가 막히게 잘 빠진 색감의 화면 구성이 아니라 흔들리는 기차 안, 음식 냄새가 티비에서 날 것 같은 작은 골목의 노점상에서 산 무언가를 먹으며 거리를 걷는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어느 시절엔가 그렇게 여행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거리에서 산 체리를 씹어 먹으며 무작정 취리히 강변을 걸었던 어느 날의 햇살과 물 냄새, 그리고 작은 수첩에 빼곡하게 느낌을 적거나 한국의 지인에게 엽서를 보내는 내 모습도 겹쳐진다. 아 떠나고 싶다.

    나의 역마살 기질을 자극하는 프로그램

    가장 짜증나는 해외여행 안내 프로그램은 역시나 ‘VJ특공대’류다. 패키지 상품 광고와 옵션 광고와 전혀 다르지 않은 그런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으면 가고 싶다가도 항공권 취소할 기세다.

    그런 프로그램과 비교해보면 이 프로그램의 심각한 문제는 역마살 기질의 시청자들이 토욜 낮부터 항공권 사이트를 뒤적거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괜히 마음이 동해서 여행 블로그를 뒤지고, 항공권 가격을 알아보고, 일정표 보고 한숨 한번 쉰 다음 씁쓸하게 라면물을 올리는 토요일의 풍경을 연출하고야 마는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그저 그런 여행 프로그램들이 조미료 가득한, 사실 가보면 별 것도 없는데 그럴싸하게 포장된 과대포장된 비싼 과자가 아니라 집에서 밥해 먹는 기분의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매니아도 많다.

    이 프로그램은 한때 폐지되었던 적이 있었다. 난리가 났다. 폐지 반대 서명운동도 벌어졌다. 09년 10월 마지막 방송 이후 각종 여행 동호회를 비롯하여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하자는 선동이 벌어졌고, 나도 동참했다. 일명 <걸세>매니아들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KBS의 김인규 사장님은 이 프로그램을 부활시켜 주신 분이다. 솔직히 딱 이거 하나 만큼은 잘하셨다. 그리고 2010년 1월부터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다시 뚜벅뚜벅 시청자 품으로 돌아왔다.

    2011년에는 시청자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특집을 기획한 적도 있다. 각종 사연을 가진 시청자들이 응모를 하고 PD와 시청자가 함께 여행을 떠난 것인데 방송 이후 욕을 좀 먹었다. 기존의 예능 다큐처럼 ‘감동 짜내기’ 아니었나하는 비판이었다. 뭐 그래도 나는 나쁘지 않았다. 모든 프로그램이 맨 날 잘할 수 있나. 함께 한, 응모에 뽑힌 시청자들은 정말 좋지 않았을까. 근래도 종종 현지인의 집을 방문한다고 하는 과정에서 현지인을 대하는 태도 등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토요일 낮이면 라면 물 끓는지도 모르고 항공권 사이트를 뒤적인다.

    우리 모두는 노마드 아닌가?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가보지도 못할 공간을 보면서, 낯선 음식에 종종 당혹스러워하는 여행자를 보면서 키득거릴 거릴 것이며, 나의 과거 여행 사진을 뒤적이며 아련한 눈빛도 지을 것이며, 그리고 끝없이 새로운 여행 계획을 세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노마드가 아닌가. 훌쩍 떠나 낯선 이들 낯선 공간 사이를 무작정 헤매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는 가보고 말테야’라는 괜한 꿈 하나 가지고 있다면 살아가는 날들이 그리 퍽퍽하지만은 않을테니 말이다.

    비행기 가격을 알아보고, 현지의 저렴한 숙박을 챙겨보고, 기차표를 알아보고,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사진이 붙은 여권을 만지작거리며 이번 주말도 나는 라면을 끓인다. 현실은 가스렌지에 펄떡이는 라면에 ‘계란을 까넣을 것인가, 밥을 말 것인가’의 고민이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이 낯선 언어와 이국적 음식 냄새로 가득찬 어느 나라의 유스호스텔 주방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김치 한 조각에도 감사하게 되는 그런 여행자가 되는 꿈을 나는 매주 주말마다 꾼다.

    도시는 공간이다. 그곳엔 신과 인간, 삶과 죽음, 역사와 문화가 숨쉰다.
    도시는 인간의 역사를 증언하는 상형문자이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삶의 공간이다.
    세계의 다양한 도시들을 여행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 삶의 모습을 담는다.
    – <걸어서 세계 속으로> 프로그램 소개

    필자소개
    [체르노빌 후쿠시마 한국]의 저자, 은근 공돌 덕후 기질의 AB형 사회부적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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