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투쟁, 선거와 한계
    [세계 LGBT운동의 역사]멕시코와 브라질의 차이④
    By 토리
        2013년 12월 09일 02: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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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중간 선거에서 멕시코 역사상 최초로 동성애자 후보가 멕시코 중도좌파 지배정당 PRI(제도혁명당)의 지명을 얻기 위해 출마한다. 후보자는 트랜스 극단 매니저였던 Victor Amezcua였다. 그는 결국 지명을 얻지 못했는데,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들은 그의 선거를 거부했다. 그는 사업가로서 기존 운동과 관련 없었을 뿐 아니라 독재 우파쪽 정당의 지명을 얻기 위해서도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동성애자 해방운동이 선거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82년이었고, 브라질 동성애자운동 역시 같은 해 선거에서 데뷔했다. 같은 해에 공공 영역의 정치가 동성애자 해방 운동과 연결되기 시작했지만 그 경로는 나라마다 달랐다.

    멕시코에서 활동가들은 좌파정당 세력과 깊은 관계가 있었고 PRT(노동자혁명당)와 강한 선거 동맹을 맺었다. 게이 레즈비언 후보자들을 위한 선거운동에서 멕시코 활동가들은 선거 공간과 논쟁들을 십분 활용하여 문화 정치 전략들을 강하게 구사하였다.

    그러나 브라질 활동가들은 어떤 한 개의 정당과 깊은 관련을 맺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하나의 이익 집단 전략을 구사할 수 있길 바랬다. 활동가들은 출신 정당이나 성적 지향과 상관 없이 후보자들을 접촉했으며 후보로 선출된 후 입법 활동을 강제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멕시코의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들은 1982년 1월 멕시코 최초 여성 후보였던 Rosario Ibarra라는 PRT 멕시코 시장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레즈비언 게이들이 그녀에게 투표할 것을 호소하였다.

    Rosario Ibarra는 독재 정부에 의해 아들이 ‘실종’된 바 있었고 멕시코 최초로 인권 기구를 만들었다. 2월 20일 Rosario Ibarra의 레즈비언 동성애자 지지 위원회(CLHARI)가 150명의 활동가가 참가한 가운데 새로이 창립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6명의 활동가들을 PRT에게 선거 후보 및 부후보로 추천하였다.

    이바라

    군부 독재로 실종, 사망한 사람들을 책임지라는 규탄집회에서의 Rosario Ibarra
    그녀의 아들도 희생자 중 하나이다.(periodismohumano.com/temas/rosario-ibarra)

    선거 후보자들은 선거를 정치 폭력과 게이 레즈비언 성폭력, 미디어 센세이셔널리즘을 종식시키고 결사 표현의 자유를 호소하는 장으로 활용하였다.

    여러 차례 경찰 폭력을 겪은 후 활동가들은 좌파, 노조, 지식인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고 광범위한 시위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LGBT 후보가 출마했던 과달라하라에서는 최초로 게이 문화 주간이 실시되었고 게이 레즈비언 공개 집회가 열렸다. 선거 출마로 전국적 캠페인을 조직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브라질에서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수용적 자세에도 불구하고 활동가들은 개별 정당과 연결 짓기를 꺼려하였다. 대신 후보들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지역 사회와 LGBT 운동들을 연결짓는 비공식적 전국 네트워크가 생겨났다. 나중에는 모든 후보를 초청하여 동성애와 페미니즘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동의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별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지 않았다. 브라질 활동가들이 후보들에 대한 압박을 조직하고 약속을 받아내는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는 설문조사였고 다른 하나는 청원이었다.

    처음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청원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WHO 결정을 브라질에도 확대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청원은 1980년대 브라질 LGBT 운동이 벌였던 두 가지 중요한 입법 캠페인의 기초가 되었다.

    1982년의 첫 차이는 계속 전략의 차이를 가져왔다. 멕시코의 경우 1994년 Pink Vote 캠페인 등을 제외하고는 정당을 넘어 후보자들 모두의 지지를 얘기하지 않았다. 활동가들은 운동으로부터 “외부” 후보자들을 내세우고 좌파 군소정당과 함께 선거에서 뛰었다.이 전략은 1997년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공개적 레즈비언 부국장인 Patria Jimenez가 당선되자 새로운 전환을 맞았다. 트랜스 활동가들 19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하여 본 전략을 사용하였다.

    브라질 활동가들은 반대로 정당을 넘어 후보자들의 동맹과 네트워크를 수립하는 데 주력하였다.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들이 출마할 때에 개인적 지역적 차원의 지지만이 조직되었다. 1996년 브라질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 연합이 최초로 LGBT 후보자들을 출마시키는 전국적 회합을 조직하였으나 이 후보자들이 전략의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후보자 중 당선된 사람은 보수당의 Katia Tapeti 뿐이었다.

    양 국가의 LGBT 운동은 모두 사회운동의 일원으로서 정당과 어떤 관계 맺을 것인지를 중요하게 고민하였다.

    양 국가 모두 트로츠키주의자(멕시코 PRT의 동성애자 노동연합 Homosexual Work Commission, 브라질 PT의 사회주의자 집합Socialist Convergence)들이 LGBT 운동에서의 자율성을 경계하였다. 이들 집단은 모두 우산 같은 형태의 전국 운동 통합 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게이 레즈비언 운동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단기 목표 역시 명확했다. 게이 레즈비언 운동의 가시화가 그 목표였으며, 단지 그냥 가시화가 아니라 다른 피억압 집단과 함께 운동을 정체화하고 급진적 구조 변혁을 가하는 집단으로 가시화가 중요하였다.

    예를 들어 멕시코 PRT의 Homosexual Work Commission은 전국여성권리해방전선, 전국저항전선과 같은 진보적 우산체에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레즈비언과 동성애 시민정치적 권리를 위한 전선’과 같은 전선체를 만들어서 기존 전선과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동성애 해방운동이 페미니스트-사회주의자 관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LGBT 운동의 자율성 옹호론자들은 거부 반응을 보였다. 이는 게이 레즈비언 해방 운동이 ‘어떻게’ ‘무엇을’ 대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 집단(트로츠키주의자, 자율성 옹호론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전제들이 있었다. 첫째, 공공 장소에서 가시성의 문화 정치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진보 목표와 원칙에 상대적으로 공감한다는 점.

    브라질의 경우 양 집단이 아닌 제3의 집단이 등장하면서 이들 전제에 도전하였다. 제3의 집단은 상대적으로 작은 운동 규모를 이유로 국가 정치 엘리트에의 접근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정당과의 동맹을 정체성 중심 이슈들을 표현하는 하나의 통로로 사고하였다. 브라질 LGBT 운동의 주요 활동가였던 Luiz Mott는 이러한 접근을 창시한 활동가 중 하나였다.

    양 국가에서 게이 레즈비언 운동의 선거 참여 전략이 차이가 나게 된 데에는 우선 선거 영역 자체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선거’는 양 국가에서 독재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군부독재 정권이 조금씩 단편적으로 내놓았던 미봉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82년 브라질의 경우 군부정권은 양당제로 완전히 전환된 후였다. 그러나 멕시코의 경우 군부는 사회적 불만을 조금씩 선거 공간을 열면서 대응했고 정당들의 완전한 경쟁체제가 된 것은 1988년 이후였다.

    1982년 멕시코에서는 PRI 중심 정당 체계는 몰락하기 시작했으나 선거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이러한 차이는 1982년 브라질과 멕시코 게이 레즈비언 운동의 선거 전략에서 첫 차이를 가져왔을 것이다.<계속>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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