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키스트 신채호의 재조명
    [책소개] 『신채호 다시 읽기』(이호룡/ 돌베개)
        2013년 12월 08일 11: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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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주의자의 이름에 가려진 아나키스트 신채호

    신채호 탄생 133주년을 앞두고 한국의 대표적 민족주의자라고 알려진 신채호를 아나키스트의 측면에서 재조명한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의 아나키즘』(지식산업사),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등 오랫동안 한국의 아나키즘 연구에 천착해온 역사학자 이호룡.

    저자는 신채호의 생애와 사상을 그의 저술과 관련 문헌, 새롭게 발굴된 자료를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신채호를 아나키즘 수용의 선구자이자,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을 집대성한 한국의 대표적 아나키스트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으로서 한국 근대사상사와 민족해방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신채호를 모르는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신채호는 1970년대 초 무렵부터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조명받기 시작했으며, 자강운동가·민족주의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개별 인물 연구에서 신채호만큼 조명을 많이 받은 인물도 드물다.

    그러나 그간 학계에서 이뤄진 신채호 연구의 대부분은 역사연구자 내지는 민족주의자로서의 신채호에 집중된 반면, 사회주의 수용의 선구자 또는 아나키스트로서의 신채호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다. 신채호의 아나키즘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신채호를 아나키스트로 인정하기보다는 아나키즘적 방법론을 채택한 민족주의자로 받아들이는 형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부제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 책의 집필 의도를 담고 있다. 신채호가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사상의 전환을 꾀하는 배경과 과정을 실증적으로 살피는 것이 하나이고, 이를 통해 신채호라는 인물에 고착된 민족주의자라는 이미지를 벗겨 내고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를 보다 분명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신채호

    ▶ 신채호를 민족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

    그렇다면 신채호를 단순히 민족주의자로 규정하는 시각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1910년대까지는 신채호가 한국의 대표적 민족주의자였던 것이 사실이다. 신채호를 민족주의자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가 1900년대에 남보다 먼저 민족주의를 제창하고, 1910년대에는 민족주의에 기초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던 데 기인한다.

    그러나 실제 신채호가 대표적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것은 1960~70년대의 시대 상황과 관련 있다.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일본 관동군 장교였던 자신의 이력을 가려줄 도구로서 민족주의를 내걸었고,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민주화운동세력들도 민족주의를 앞세우면서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성을 비판했다.

    그러한 가운데 강권强權에 반대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긴 저항적 지식인의 표상인 신채호가 대표적 민족주의자로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신채호를 민족주의자로 규정함으로써, 그의 생애 중후반을 지배했던 아나키즘적 사유와 활동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축소될 우려가 있다.

    실제 일제강점기 한국인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은 일제의 식민권력이었고, 모든 사회변혁운동은 바로 일제 식민권력의 억압에서 비롯되었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던 사람은 모두 민족해방운동가로서 출발했으며, 일제가 붕괴되지 않는 한 민족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신채호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을 주장했다고 해서 그를 민족주의자로 단정해서는 곤란한 이유이다.

    따라서 신채호의 생애에서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지, 또 신채호가 민족주의자로서 일관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신채호가 어느 시점부터, 또 어느 수준까지 아나키즘을 수용했으며, 그가 주장한 아나키즘이 어떤 독창성과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지에 따라서 그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 신채호의 아나키즘 연구의 세 가지 논쟁점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사이, 신일철과 장을병, 신용하 등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한 신채호의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는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 다소 활기를 띠어갔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신채호의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첫째, 신채호가 어느 수준까지 아나키즘을 수용했는가? 최근까지 신채호의 아나키즘을 분석한 연구조차도 신채호를 민족주의자로 이해했다. 신채호는 아나키즘적 방법론을 채택한 것에 불과할 뿐 아나키스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민중직접혁명론을 제창했던 아나키즘 수용의 선구자였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아나키즘을 수용했으며, 나아가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을 체계화했다. 그를 한국 고유의 아나키즘을 확립한 인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신채호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나키즘 연구를 그치지 않았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1920년대 초까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완성한 저술들을 아나키즘적 사관에 입각하여 수정하려 했다.

    당시 『조선일보』가 연재 중이던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에 대해 신채호는 자신이 석방된 뒤 정정하여 발표할 것이라면서 연재 중지까지 요청했다. 우리 역사를 아나키즘적 사관에 입각하여 다시금 체계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채호가 아나키스트로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 신채호는 언제부터 아나키즘을 수용했는가?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수용한 시기는 「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이 발표된 1925년 이후라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왔다.

    1910년대 말부터 산채호의 사상에 아나키즘적 요소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완전한 아나키스트로 전환한 것은 결코 아니라면서, 1920년대 중반 이후에 가서야 신채호가 아나키스트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수용한 시기를 3·1운동 이후로 좀더 앞당겨 보고 있다. 즉 1905년 무렵 황성신문사에 근무할 때 고토쿠 슈스이의 『장광설』을 읽고 아나키즘에 공명한 바 있던 신채호는 3·1운동을 계기로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1923년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의 아나키즘을 집대성한 글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에 관한 내용 분석이다.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장한 민중직접혁명론은 민족주의에 아나키즘을 접합시킨 것으로 민중적 민족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즉 민중직접혁명론은 민족주의적 입장의 기반 위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던 테러 행위를 민족해방운동의 수단으로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책은 <조선혁명선언>에서 제시한 민중직접혁명론이야말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론의 결정판으로 보고 있다. 아나키즘에서 주장하는 민중의 직접행동에 의한 사회혁명론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저자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한 것은 한국 민중을 일제의 강압으로부터 해방시켜 한국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 한국의 독립 즉 민중을 수탈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신채호에게 정부란 민중을 수탈하는 기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의열단에서는 <조선혁명선언>을 인쇄하여 대량 살포했으며, 단원들이 테러를 할 경우 무기와 함께 <조선혁명선언>을 꼭 휴대하고 다니면서 이를 선전할 만큼 그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 신채호의 사상적 전환과 한국 고유의 아나키즘 확립

    신채호는 57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에서 몇 차례의 사상적 전환을 겪는다. 봉건 유학자에서 자강운동가로, 자강운동가에서 민족주의자로, 그리고 다시 아나키스트로 사상의 변신을 거듭했다.

    어릴 적에는 봉건 유학을 수학했지만, 청년기에는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개화운동과 자강운동을 전개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나라를 구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실력을 양성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교육운동과 언론계몽운동에 종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노골화되자, 반제국주의적 사고체계로서 민족주의를 제창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1910년대에 민족주의 역사학을 개척하고 민족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러시아혁명 이후 신채호는 사회진화론과 거기에 근거한 민족주의에 한계를 느끼면서 점차 사회주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전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상당한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던 사회주의 특히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3·1운동을 통해서 민중의 저력을 확인한 뒤에는 민중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보고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민족해방운동 방법론을 놓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립하면서 신채호는 아나키즘을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정립하고, 1920년대에는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을 집대성한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민중직접혁명론’을 제시했다.

    또 1936년 초에는 변화된 국제정세 속에서 ‘민족전선론’(모든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결집한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일제와 전면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감옥에서 가장 먼저 제기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당시 국제적 차원에서의 아나키스트운동은 테러리즘의 폐해를 지적하고 ‘사실에 의한 선전’(테러를 주요 수단으로 하는 직접행동)을 폐기하는 추세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거꾸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전선론’을 제기하면서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자신들의 주요한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처럼 신채호의 사상적 전환은 변절이라기보다 시대상황에 따라 그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사상을 충실해 정립해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민족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더 나아가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을 체계화한 점은 신채호가 한국 아나키즘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그를 한국 아나키즘 수용의 선구자이자 우리 고유의 아나키즘을 확립한 인물로 재평가해야 할 근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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