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픈 건 타인의 해석 때문"
    [저자와의 만남] 80대 할머니 3명 삶과 애환 기록한 최현숙
        2013년 11월 29일 05: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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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 밥 벌어먹고 살고 싶었다던 10대 소녀는 마흔이 넘어 본인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뒤늦게 커밍아웃하고 한국 최초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천주교 사회운동가로 시작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이어 진보정치 활동가로 살면서 글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성명서, 규탄서 말고는 소위 문학 소설은 본인과 맞지 않다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목동에서 수학 쪽집게 과외로 돈을 벌어 다시 이런 저런 활동을 해야 했다. 진보정치의 폐색과 몰락의 과정 속에 가난한 사람들과 지역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요양보호사 활동을 선택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파출부라고 생각하는 할머니들의 ‘갑질’에 지칠 때쯤, 죽음을 목전에 둔 이 할머니들의 넋두리를 혼자 듣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들의 넋두리를 들어주다 휴대전화로 녹음을 해 집에 가서 녹취를 풀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다 본인의 자서전을 쓰자는 출판사 제안이 왔고, 곧 이 제안은 할머니들의 구술 생애사를 쓰자는 기획으로 바뀌게 됐다. 드디어 이 소녀는 글을 쓰게 됐다.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이매진>을 4년에 걸쳐 완성한 최현숙씨를 28일 ‘레드북스’에서 주관한 저자와의 만남에서 만났다.

    10평 남짓한 레드북스의 서가가 꽉찰 만큼 많은 독자들이 찾은 이 자리에서 작가 최현숙은 단순한 작가가 아니었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는 사학자이자, 돌봄 노동을 통해 이 땅의 빈곤문제를 제기하는 노동활동가이며,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심리치료사였다.

    이 책은 <레디앙>에서 연재했던 ‘평양할머니 구술생애사’를 포함한 80세가 넘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기억으로 한국의 현대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단순히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것 이상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가부장제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왜곡됐던 기억을 드디어 자기의 생각대로 서술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차마 남들에게 꺼내지 못했던 아픈 상처도 부러 드러내고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었다.

    이번 저자와의 만남은 30여명의 독자와 함께 약 3시간 가량 이어졌다. 이날 최현숙의 이야기와 독자 질문에 대한 그 답이, 책을 읽을 때 행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레즈비언 정치인이 지역에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가게 된 까닭

    최현숙이 처음 구술생애사를 쓰게 된 것은 진보정치의 폐색과 몰락이 계기가 됐다.

    최현숙: 1987년부터 2010년까지 그리고 여전히 나 자신을 사회운동의 활동가, 특히 진보정치의 활동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보정치는 분열했고 방향을 못 잡아나가는 상황에서 나는 어디서 내 밥을 벌어먹으면서도 계속 활동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아마 내 나이 쉰 다섯쯤 때였다.

    지금까지 해온 활동들이 진보정치, 지역활동, 소수자 운동, 여성주의 운동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임금노동이라는 것은 한 번도 안해봤다. 사회운동 활동가로 있으면서 활동비를 받거나 목동에서 수학 쪽집게 과외로 한바탕 돈을 벌어 그걸 빼먹고 살거나 했는데, 그때 선택한 것이 요양노동이었다.

    요양활동을 선택한 이유는 일단 내가 50대 중반으로서 가장 편하게 어울려 들어가 섞일 수 있는 곳이었다. 내 나이 또래는 대체로 가난한 노동을 하고 있었고, 내가 가장 편하게 들어가서 어울릴 수 있었다.

    요양노동은 상당히 ‘지역성’을 갖고 있다. 요양노동을 하다보면 점심값과 하다못해 차비까지 아까울 만큼 시급이 낮아 결국 자기 동네에서 노동을 하게 된다. 지역운동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노동은 산업현장에서 하고 지역은 잠만 자는 공간이기 때문에 진보정치에서도 지역운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했는데 요양노동은 이 지역성이 맞아 떨어졌다.

    또한 요양노동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요양보호사 그들 자체로도 사회적 약자이면서도 이들의 노동은 노인, 장애인, 신생아와 산모, 혹은 환자들을 돌봄으로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노동이었던가라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25년을 큰 딸로 살아왔고 25년은 엄마로 살아왔음에도 돌봄이나 가사 노동은 처리해야 하는 일에 불과하지 마음을 담고 애정을 담는 일이 아니었다.(웃음) 그런데 하루 4시간 한달 80시간으로 방문 요양을 하는 게 그럭저럭 하게 되더라. 마음을 담아서 해본 적이 없을 뿐이지 늘상 해오던 일이니깐 어렵지는 않았다.

    최현숙

    최현숙씨(사진=장여진)

    그러다 2009년 초기에 요양현장에 들아가서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내 감수성을 확 찌른 것이 노인들의 넋두리였다.

    특히 할머니들. 대체로 내가 돌본 할머니들은 가난하고 못 배운 분들인데, 평생 권력이라는 걸 쥐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수록 더 넑두리가 많지 않나. 남편은 맨날 바람피고 자식들에게는 천대 당하고.

    내가 일하는 틈틈히 뱉어내는 그 넋두리들을 들을 때마다 ‘어 이거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기치 못하게 내가 정말 재밌어 하는 일을 만나게 된 것이다. 최소한 4시간만 딱 돌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노인들은 내가 조금만 툭 건드려도 끊임없이 넑두리를 늘어냈다. 정말 귀한 이야기들이라 생각했다.

    사실 요양보호사와 서비스를 받는 이들과의 권력관계는 매우 뚜렷하다. 할머니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딸자식들에게 줄 김장, 심지어 고추장 된장 담그기도 해야 한다. 안하면 짤릴 정도로 그 권력관계는 뚜렷하다.

    요양보호사가 파출부냐 돌봄노동이냐가 현장에서 느끼는 대체로의 불만인데, 평생 한 번도 권력이라는 걸 가져보지 못한 이 노인들은 요양보호사와 자신의 관계에서 자신이 권력자라는걸 순식간에게 알아차린다. 폭언에 황당한 요구도 많고 무시당한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저는 요양보호사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활동도 하는 활동가니깐, 이른바 현장에 잠입한 사람이니깐 살아남아야 했고, 이 할머니들의 부당한 요구를 참아낼 수 있도록 내 마음에 쿠션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서 할머니와 나 사이의 관계 만들기에 주력한 것이다.

    책에 나오는 평양 할머니의 경우 처음 나를 보고 못 배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을 할인 받게 해드리니깐 ‘아 이 여자는 다르구나’하면서 달리 대하더라.

    그래서 일하면서 내가 파출부인지 요양보호사인지 헷갈려하시는 분들한테는 지역의 노인복지네트워킹을 잘 알아놨다가 할머니들이 필요한게 있다 싶을 때 연결해주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러면 할머니들은 ‘아 이 사람은 다르구나’ 하면서 막 대하지 않았다. 할머니들과 나 사이의 권력관계는, 권력관계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갈등과 경합의 과정이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아픔 치유하는 것도 돌봄노동 중의 하나

    최현숙: 돌봄노동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노인빈곤 등 여러가지 문제 중 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내게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아픔이나 상처들을 털어내고, 또 그 과정에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객관하하면서 자기 한도 풀고 자식이나 남편 등 주변 관계도 바꾸는 것도 중요한 돌봄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장에 들어가면 내 일을 하면서도 슬슬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애기 낳고 어땠어요?’, ‘바람 나서 집 나간 영감이 30년 뒤에 들어왔다고 다시 받아줬다는 거지?’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때부터 휴대전화 녹음기를 눌렀다. 집에 와서 녹음을 풀어 글자로 옮겨적을 때 혼자 보기 정말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나에 대한 자서전을 쓰자는 출판사 제안이 나았고, 출판사에 요양현장에서 만나게 된 노인들의 이야기를 말했더니 이걸 책으로 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출판사는 단순히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대별로 나눠서 80~90세, 50~70세, 30~40세, 20대, 10대까지 총 5세대로 나눠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구술로 풀어내자는 기회을 했고 그래서 내가 80~90세와 50~70세를 담당하게 됐다.

    이렇게 책으로 내자는 제안까지 오게 되니 구술사에 대해 이런 저런 공부를 하게 됐다. 그러면서 여성주의 구술사를 알게 됐다. 여성주의적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뭔지를 고민했을 때쯤 다행히 여성주의 구술사와 관련한 학계의 책이 나왔다. 그때는 이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상당 부분 녹음해서 풀어낸 상태였고, 요양보호사 노조 상근도 마침 그만두게 되어 책으로 정리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또 막상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깐 마포지역으로 이사가서 그 지역에서 요양노동을 하려 했는데 노조활동 이력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한 군데 방문 요양을 하게 됐는데 짤렸다. 금요일에 돌봐드리고 월요일에 다시 출근하면 됐는데 일요일날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돌아가신게 아니었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 갖지 말고 천천히 일을 구해보자고 했는데 천천히 안 구해지더라. (웃음)

    다행히 통장에 조금의 여유가 있어 글에 좀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어차피 참 다행인 게 내가 (일자리 구할 때)외모가 좀 돼잖냐. 청소해도 딱 청소아줌마고. (웃음) 그래서 일단 요양보호사쪽 취업은 안돼니 글쓰기에 집중하게 될 수 있었다.

    최=1

    할머니들의 인터뷰는 2010년 말에 이미 다 끝났지만 본격적으로 책으로 정리하면서 2013년 초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것이 정말 중요했다. 2009년, 2010년에 나한테 했던 말들이 2~3년 뒤에 어떻게 기억하고 느끼고 마음에 자리잡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2009년에 살아온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을 때 ‘그래 할께. 뭐 어때. 내가 이 나이에 뭐가 무서워서’ 하면서 80세 할머니들은 모두 술술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도 많고 또 그 상처를 드러낸 뒤 나중에 후회하고 이러면 안하느니 못한 일이였을텐데 올해 초 다시 찾아뵈니 당시 인터뷰를 정말 즐거운 기억으로 갖고 있었더라.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구술하고 또 그것이 공적 자료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걱정이 있었지만 이분들은 그 경험을 정말 좋게 생각했고, 곧 책으로도 나올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굉장히 기뻐하며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어떤 할머니는 대학노트 같은 걸 꺼내들며 ‘이렇게 책으로 나오냐’라고 물어서 내가 다시 책을 하나 집어들어 ‘이렇게 나온다’고 하니깐 그렇게 좋게 나오냐고 깜짝 놀라며 자기가 돈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되묻기도 하셨다. (웃음)

    이 책의 3번째 주인공이 우리 엄마다. 다른 할머니들과 비교해 가장 부유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드글드글한 한이 많은 사람이다. ‘양반이란 것들’, ‘최씨네 양반이라는 것들’에 대해 한이 많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팔자 좋은 노인네지만 정작 본인은 가장 한이 많고 또 어떨 때는 굉장히 행복해하는 등 감정 기복이 널뛰는 양반이었다.

    반면 가장 여건이 안 좋은 김복례 할머니는 빈농에서 다시 도시빈민으로 정말 가장 밑바닥의 전형적 사례인데도 가장 평화롭다.

    우리 엄마는 다행히 2009년에 구술 작업을 하자고 했을 때 ‘하자! 뭐가 무섭냐!’라며 다 풀어놓으면서도 중간 중간에 ‘그런데 큰 아들이 알면 어쩌나’, ‘남편한테는 말 해야 하나’며 계속 고민을 해왔다. 자기가 살아온 생애를 이야기하고 또 그것이 공적 자료화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형제들에게 슬쩍 출간을 설득하니 다행히 들어주더라. 어차피 안 된다고 해도 내가 다 할 꺼라는 걸 아니깐.(웃음)

    다행히 가족모임을 통해 엄마가 구술한 경험과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이야기하면서 엄마 자신도 날 것으로 드러냈던 최씨네, 안씨네에 대한 감정을 조금은 객관화시키고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됐다.

    2009년, 2010년의 구술 인터뷰에서 2013년 책을 정리하는 이 기간까지 할머니들에게 굉장히 유효했던 시간들이었다.

    여성주의 구술사,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누군가의 이야기

    여성주의라는 것이 남성에 대한 여성을 위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여성주의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차별 중 성별에 대한 차별을 주요한 사회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가부장제, 계급에 대한 차별 등에서 여성주의는 그 중에서 가부장제로 인한 차별과 억압에 주목하는 입장이다.

    할머니들의 구술사라는 건, 지금 국사책 등 역사를 누구의 시선에서 누가 정리했는지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대체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시선으로 정치하게 정리한 것이고 대체로 이긴 자들이 정리했으며, 이는 상대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가진자들, 많이 배운 자들이 정리한 역사에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생애를 포함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면 가진 자들의 역사가 한 사회의 역사이거나 객관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여기서 발언하지 못한 자들의 삶도 끄집어내면서 정리하는 역사만이 역사는 아니겠지만 여러 계층들의 사연들이 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록되지 못한 차별받고 못 배운 사람들, 특히 성적 차별 관계에서 여성을 주목한 것이었고 할머니들을 선택했다.

    80~90세대를 인터뷰 대상자를 선정한 과정은 단순했다. 3명에게 제안했고 3명 모두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나 살아온 거 뭐할라꼬’라고 예의상 한 마디 하셨지, 내가 질문도 하기전에 자기 삶의 어느 중간부터 갑자기 ‘망할 놈의 서방은 6.25 피난 갔다 와보니 자살했더라’, ‘나는 13살때부터 담배공장을 다녔지’라고 자기 이야기를 툭툭 털어놨다. 말할 준비가 자기 마음에 꽉꽉 차있던 것이다.

    그런데 50~70세대는 4배수를 해서 제안했다. 12명에게 부탁해서 3명이 승낙한 것이다. 남성들도 그러한 사람이 있겠지만 특히 여성의 경우 자기의 삶을 공적 자료화하는 것에 상당히 주저해야 할 만한 관계들이 있는 것 같다.

    구술생애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무엇을 발언할 것인가는 순준히 화자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이 화자는 누구한테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계속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저 여자(최현숙)가 내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까 고민하면서 계속 주저하고 한걸음씩만 나가다 찔러도 보고.

    결국 글쓰는 것은 필자가 권력을 가지지만 무엇을 말할지는 화자의 권력인데 여기서 내가 어떤 질문을 던져 어떻게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할 것인지, 과거에 기억하던 일을 30세나 어린 한 여성의 질문 방식을 통해, 달리 기억해내고 다르게 정체화한다.

    평양 할머니를 중요한 사례로 보는데, 미군부대에서 양색시들한테 옷 팔러 갔다가 결국 미군과 살림도 차리고 성매매까지 하는 이야기를 하시지만, 초기 인터뷰에서는 옷 파는 이야기만 하셨다. 여기서 내가 계속 요양 방문을 하다보니 지속적으로 친분 관계가 쌓이면서 차츰 성매매 이야기를 하기 사작했다.

    ‘아들네 부부가 나보고 성매매했다고 회개하라고 하는데 지랄하고 자빠졌네, 누구덕에 지가 목사가 됐는데, 내가 도둑질을 했냐 살인을 했냐’라면서. 여지껏 그 경험을 누구에게도 발언하지 못하고 숨기고 마음에 싸집놓다가 공적자료화 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냈다는 점들이 구술생애사 과정, 글로 쓴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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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생애사, 스스로와 가족들도 치유되는 화해의 과정

    독자: 책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의 가족들이 출판에 반대하지 않았나?

    최현숙: 평양 할머니의 경우 본인은 실명으로 써도 좋다고 했지만 내가 더 조심스러운 마음에 ‘김미숙’이라는 가명을 붙였다. 미군 상대 성매매 이야기와 목사인 아들네 부부 이야기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분은 본인의 인지능력과 판단에 있어 책으로 출간하는데 동의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식들의 동의는 구하지 않았고, 대신 구술내용 중 자식들에게 구태여 명예훼손이 될 부분은 옮기지 않았고 일부러 가명을 붙였다.

    나머지 김복례 할머니들은 가족들 2명과 집단 구술을 했다. 정신대 피해서 정략적으로 혼인했던 한 남성과 살던 그 짧은 시기에 매독을 옮아 그로 인해 평생 얼굴의 장애와 언어 장애 등을 앓고 계신 분이라 내가 그 분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구술사 제안도 그 할머니의 자식을 통해서 하게 됐고, 구술 과정에서도 가족들이 참여했다. 물론 여기에는 한계도 있다. 이 분은 읽어보면 알겠지만 극한 빈농에서 도시빈민으로 살면서 정말 가난했던 이야기밖에 없다.

    자식들 안 굶기려고 뼈 빠지게 노동한 이야기밖에 없는데, 가족들과 함께 공동 구술 형식으로 가족 공동체의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지만, 자식 앞에서 어디까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겠는가. 이 할머니가 정신대를 피해 한 번 혼인했었다는 사실은 자식들도 구술 과정에서 처음 알게 됐다.

    그래서 자식들이 너무 충격적이라며 이 이야기를 빼달라고 요청해서 초반에 뺐다가 다시 설득해 그 내용을 살리기도 했다. 집단구술은 공동체 안에서 상처와 화해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이런 한계도 있었던 것 같다.

    안형철 할머니가 우리 엄마인데, 단순히 엄마니깐 한 번 풀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한테 제안했더니 좋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형제들에게는 사실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워낙 내가 빨갱이짓 하고 다니고 이혼도 하고 2008년에는 커밍아웃도 하고 출마까지 하다보니 형제들의 이해도가 높은 편이다.(웃음)

    그래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하면서 일단 구술을 통해 엄마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고 하니깐 형제들이 농담삼아 ‘책으로 한 번 써봐 ‘혼불’ 이런 제목으로’ 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사실 진짜 책으로 낼려고 지금 준비중이라니깐 말하니깐 일순간 싸해지더라.(웃음)

    일단 내가 메일로 그간 써왔던 것들을 보냈더니 조용하더라. 나는 조용하면 오케이라고 생각한다.(웃음) 여동생은 아버지의 폭력 문제가 나오는 부분에서 자기의 느낌이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고, 나도 아버지랑 부딪히면서 보지 못한 또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엄마를 통해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편협했고 내 중심적이었는데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한테는 여지껏 말을 못했다. 이 책이 아버지에게 또다른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기술과정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배려해서 썼고, 사실만 썼다.(웃음)

    독자: 책 출간에 대해 다른 할머니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최현숙: 평양 할머니는 옛날 일은 정말 잘 기억하는데 요즘 일은 자꾸 까먹는다. 인터뷰 초기에 본인이 인터뷰했다는 사실을 몇 달 뒤에 가면 기억을 못한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저렇게 인터뷰 했었다고 설명해주면 ‘아 그게 댁이야?’ 맞아 나 그거 했어’라고 말씀하신다. (웃음) 또 이 분이 숫자 이런 걸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분인데 최근 찾아갔더니 또 기억 못하시길래 도시가스 할인해준 이야기를 해드리니깐 그때서 날 떠올려 주셨다.

    김복례 할머니는 굉장히 기뻐하시면서 돈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셨다. 그 분의 큰 딸은 울면서 너무 고맙다고 하셨다. 엄마의 한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대체로 다들 만족하시고 좋아한다. 어쨌든 처음에는 나같이 쓰잘데기 없이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뭐하러 쓰냐고 하셨으면서도 결과물이 나오니깐 막상 기뻐하신다.

    최현숙, “자기 상처 아픈 이유는 타인의 해석때문에 아픈 것”

    독자: 질문을 드리기도 전에 할머니들이 술술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는데, 다른 진행 없이 정말 듣기만 한 것인가? 김미숙 할머니의 경우 성매매 경험을 좀 뒤에 말씀해주셨다고 했는데 짐작한 바가 있어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노력했던 건지 아니면 어느 정도 친분관계가 쌓일 때 할머니께서 먼저 예고 없이 풀어내신 건지 궁금하다.

    최현숙: 듣기만 하지는 않고 전략적 접근을 한다. 어떻게 질문하느냐에 따라 어떤 기억들이 나오는지. 질문한 사람들이 뭘 질문했는지에 따라 그 기억이 건드려지는 것이다.

    김미숙 할머니는 굉장히 용기있고 호기심이 많고 강한 분이다. 이 양반은 요양보호사 사이에서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본인 스스로가 7~8년을 파출부 생활을 고생스럽게 해왔는데 요새 요양보호사들은 4시간을 꽁으로 먹고 간다며 맨날 욕하신다.

    본인이 파출부 하셨을 때 했던 일을 다 시키려 하신다. 방바닥을 철수세미로 닦으라고 한다던가 대문을 비누칠해서 닦으라고 한다던가.(웃음) 아무리 파출부가 아니라고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셨다. 그러다 정말 할머니랑 싸울 것 같더라. 그래서 그냥 싸우고 그만둘지, 관계를 잘 만들어서 구술사를 계속 진행할지 고민하다가 전략적으로 다른 핑계를 대서 일단 그만두기도 했다.

    이 분들은 고생도 많이 하고 아픈 경험들이 많다보니깐 잘 모르는 이에게 이야기를 줄줄 꺼내놓지는 않는다. 믿을만한 사람이 적절한 방식으로 건들면 잘 풀린다. 시간이 뒤죽박죽되도 좋고, 이 얘기 저 얘기로 널뛰어도 좋으니깐 그냥 쭉 이야기 하시라고 한 뒤 그날 집에가서 정리해서 중간 중간 더 질문해야 할 것들을 찾아낸다.

    김미숙 할머니는 처음에는 성매매 이야기를 안 했는데 쭉 이야기하다보니 양색시들한테 옷을 팔았는데 외상을 많이 떼여서 힘들았다면서도 그 시절이 참 좋다고 했다.

    그래서 뭔가 다른 게 있을꺼라 생각했다. 그런데 차츰차츰 댄스홀에 빠진 이야기까지 하신 거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댄스홀에서 댄서로 일한다는건 2차를 나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슬쩍 이야기를 꺼내봤다.

    성매매 여성들과 관련 활동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쓸쩍 꺼내며 ‘정신대로 잡혀간 여성들이나 지금 미군부대에서 성매매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다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정신대는 지금이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미군부대에서 성매매한 여성들은 정말 힘들고 가난하게 어렵게 지내고 있다.국가가 책임져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 할머니가 ‘그래 넌 배워도 제대로 배웠다’라고 하시더라. (웃음) 그러면서 이야기를 꺼내신 거다.

    독자: 구술사 과정에서 오래된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상처를 건들게 되지 않나. 그런데 그걸 드러내고 기술하는 과정이 폭력이 되어서는 안될텐데 내가 던지는 질문이 과연 이 사람에게 치유의 경험이 될 수 있는가라는 판단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구태여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나 염려는 없었는가

    최현숙: 나는 떠날 사람이고 그 사람들은 그대로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니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계속 책임져줄 사람이 아니라 나도 떠나야 하는 사람이니깐. 하다못해 우리 엄마도 그렇다. 멀리 사니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예리한 칼날로 끝까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가지는 상처의 내용들을 보면, 자기의 경험을 아파하는 이유가 남들의 해석 때문에 아픈 것이다.

    여지껏 마음에 담고 차마 말하지 못한 구체적인 이유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 자기는 그냥 산 것인데 사회적 시선, 타인의 시선들로 인해 자기 피해의식이 생기는 거다. 정신대도 그랬고, 미군부대의 양색시도 그랬던 것처럼.

    김복례 할머니의 경우 가족들과 집단구술하면서 알게 됐지만 본인들끼리 가난에 대해 대화한 적이 없더라. 그레서 3명이 모여 이제서야 이야기를 하니 서로 이야기가 다르고 그러다 결국 ‘엄마가 기억이 맞아’ 그런다. 본인들도 지긋지긋하니깐 이야기를 안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 앞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이 이야기도 해야 돼’, ‘이 이야기도 넣어야 돼’라면서 풀어나간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더 지긋지긋한 것들. 지금도 감은 오지만 딱 대놓고는 물어보지 못한다. 만약 필자의 윤리가 있다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내가 어떻게 질문해도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시 더는 질문하지 않는 것이다.

    최현숙은 현재 50~70세 여성들의 구술사를 작업 중이다. 정말로 딱 자기 또래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또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풀어 쓴 할아버지들의 구술사도 게획 중이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가 될 자서전은 조금 미뤄졌지지만, 누군가 불쑥 최현숙에게 나타나 당신의 생애를 이야기해달라고 찾아갈 지도 모르겠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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