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파시즘론 비판
[비판과 비평] 수사적 의미 있어도 실천전략적 함의 부족
    2013년 11월 25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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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정부의 성격과 ‘파시즘’ 논란에 대해 남종석씨의 글을 2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파시즘 논란에 대한 평가와 비판적 의견을 담고 있으며, 또한 2회 글에서는 이러한 규정이 진보좌파의 이후 전망과 진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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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근혜 정권이 파시즘이라고?

지난 6월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이 기소되자 청와대와 국정원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다. 국정원은 곧바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

8월 5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김기춘 씨가 취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격렬해진다. 첫 신호탄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을 ‘내란음모죄’로 구속기소한 것이다. 연이어 고용노동부는 전교조에 노조 아님을 통보했고, 검찰은 공무원노조를 압수 수색했다. 정부여당은 합법적인 대중정당인 통합진보당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했다.

정당해산심판은 1988년 헌법재판소 설치 이후 단 한 번도 활용되지 않던 행정권이었다. 최근 6개월 정치는 실종되고 국정원, 검찰이 정세를 주도했다.

박근혜 정권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무엇인가가 아니다. 이석기 그룹이 내란음모를 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를 발언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는 쟁점이 아니다. 전교조가 노조인가 아닌가는 더더욱 쟁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련의 사태가 쟁점이 되고 있는 정국 그 자체이다. 경제민주화니 복지니 하는 것들은 이제 여론에서 주변적인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모든 쟁점을 ‘종북 논쟁’으로 몰아감으로써 논쟁의 지반 자체를 전환시켰다. 대한민국은 종북이나 아니냐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다. 공안정국의 칼바람이 언제 휘몰아칠지 모를 일이다.

이석기 의원 구속 및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청구, 전교조 ‘노조 아님’ 통보, 남북 대화록 공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논쟁에서 우파는 일관되게 종북 논란을 확산시켰고 야당과 진보진영은 이런 쟁점에 그저 끌려가기만 했다. 보수우익들은 물을 만나 연일 종북 척결을 외치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정당해산심판 청구에 직면하여 박근혜 정부를 ‘유신정권의 재등장’이라고 비판했다. 몇몇 진보지식인들은 이 정권에게서 파시즘적 징후를 읽어내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공안 몰이는 유신독재의 부활이자 냉전적 권위주의 통치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그 근저에는 파시즘적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파시즘으로 보는 것은 단지 이 정권에 대한 수사학적인 비판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지난 10월 26일 비판사회학회의 주제는 박근혜 정권의 파시즘적 본성에 관한 논의의 장이었다고 한다.

이 학회에서 발표된 글에는 절망한 대중들의 증오감의 증대(일베 현상), 반공으로 무장한 풀뿌리 우익세력들의 활보(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사고의 확대와 공안정국 등 복합적인 요소가 어우러진 현재의 상황을 파시즘적 징후로 읽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가 드러나 있다. 더불어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등에 칼럼을 쓰는 진보적 지식인들은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너무도 자주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박근혜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공안정국이 민주주의 및 사회운동에 심각한 위협요소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정권을 파쇼정권으로 인식하는 것은 현실적인 설득력도 없고 실천적인 함의도 없다는 입장이다.

유럽의 극우정당을 곧바로 파시스트와 동일시할 수 없듯이 포스트 민주화 시대의 보수세력을 파시즘과 동일시하는 것은 현재의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를 파시스트 정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 정부의 작동원리를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진보좌파의 실천전략을 짜는데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을 악마로 규정하여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전략은 인민주의 전략일 뿐 제대로 된 진보좌파의 실천전략은 될 수 없다.

이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박근혜 파시즘론을 비판한다. 필자는 파시즘에 대한 일반적인 논리를 정리하고, 박노자와 김동춘의 ‘파시즘론’을 비판한다. 두 번째 파트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필자의 대안적 접근을 제시한다.

필자는 박근혜 정권을 권위주의적 인민주의로 개념화한다. 권위주의적 인민주의는 스튜어트 홀이 대처리즘을 분석하기 위해 활용한 개념이다. 필자는 1980년 즈음 영국과 미국에서 등장한 신우익의 정치 논리와 박근혜 정부와의 유사성을 밝힐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근혜 정부의 공안 몰이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항하여 진보좌파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2.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박근혜 정부가 파시즘체제인가 아닌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파시즘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풀란차스의 관점([풀란차스를 읽자], 봅제솝, 백의, 1996))과 과천연구실의 작업 ([인민주의 비판], 정인경·박정미 외, 공감, 2005)에 의존하여 파시즘의 특징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전간기(interwar period)에 유럽에 등장한 파시즘은 부르주아 국가형태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 시기의 파시즘운동은 자유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 혁명의 위협 속에 등장한 독특한 국가형태였다.

전간기의 고전적 파시즘은 대중운동의 형태를 띤 국가주의/민족주의 프로젝트였다. 파시즘은 경제위기로 인해 실업자는 늘어나고, 중산층의 사회적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기존 정치권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응도 못 하는 시점에 부상한다.([인민주의 비판], 47쪽) 그들은 팽창적인 민족주의 수사학으로 자신들의 대의를 정당화했다.([풀란차스를 읽자], 299쪽). 경제위기로 소외받고 무시당한 대중들은 이 프로젝트에 열광적으로 호응한다.([풀란차스를 읽자], 308쪽) 자유경쟁에서 버림받은 대중들은 파시스트의 비합리주의, 반지성주의적 선동에 능동적으로 동참한 것이다.([인민주의 비판], 47쪽)

나찌

1930년대 독일 나찌당의 집회 장면

파시스트들은 노사정 협의를 통해 노동자계급 일부를 통합하고,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위기에 대한 상징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파시스트의 코포라티즘적 전략은 대자본의 희생에 토대를 둔 노동자계급의 실질적인 이익의 실현이 아니라 노동자들로 하여금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자발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반동적인 통합전략이었다.([인민주의 비판], 45쪽) 파시스트들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영향하의 노동운동을 철저히 탄압·배제하고 보수적인 노동자계급을 통합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킨다.([풀란차스를 읽자], 309쪽)

파시즘 체제는 예외적인 국가주의 프로젝트였다. 이 체제는 ‘주적의 창조’를 함으로써 대중들의 원한을 동원하고, ‘억압적 국가장치’를 체제 작동의 전면에 내세우는 공공연한 테러독재 체제였다.([풀란차스를 읽자], 315쪽) 파시스트들은 비록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지만 의회를 무력화하고, 반대당를 불법화하고, 거리에서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했다. 폭력적 국가기구(정치경찰과 유사권력네트워크)가 전면에 나서 ‘적의 소탕’에 앞장선다. 파시즘 체제는, 그람시적인 의미의 기동전과 진지전을 능동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법적 제도적 통치를 초월한다.([풀란차스를 읽자], 316쪽)

파시스트들은 ‘주적의 창조’를 통해 효과적으로 대중들의 ‘원한’과 ‘증오’를 동원했으며, 이 를 지도자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시켰다. 카리스마화된 지도자는 버림받은 대중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 대중들은 근원적 통일체로서 표상된 민족에게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팽창주의의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었다.([인민주의 비판], 48쪽) 파시스트들은 노동자계급을 통합하고 대중들의 원한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자본의 이해를 철저히 대변했다. 고전적 파시즘은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작동하면서도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은 독특한 체제였던 것이다.([풀란차스를 읽자], 312쪽)

3. 박근혜 정권은 파시즘체제인가?

박근혜 정부를 명시적인 파시즘 정권으로 규정하는 이는 없다. 이 정권이 파시즘으로의 전화 가능성이 있다거나 구조적 파시즘의 논리로 비판의 날을 세운다. 전자는 박노자이고 후자는 김동춘이다.

박노자는 비판사회학회 발표문 “박근혜 스타일 : 사회적 파시즘과 정치제도적 자유민주주의”에서, 파시즘을 “독재의 방식으로 조직돼 조직노동은 배제·어용화하고 시민사회를 탄압하거나 끄나풀로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총동원적 운영방식”이라고 규정한다.

박노자는 주변부 종속국가의 군사정권을 ‘주변부 파시즘’으로 개념화했던 손호철 선생 등의 입장에 동의한다. 박근혜 정부도 주변부 독재정권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노자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부정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속살은 지금도 파시스트적이며….. 그 어떤 본질적 변화도 지난 20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한국은 여전히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넘쳐나고 통치자들은 시민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하며, 통치스타일은 “유신적”이라는 것이다.

박노자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의 절차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파시스트적 스타일의 통치를 지속할 것이다. 이 정부는 안보의식을 고취하고 군사주의적 세뇌를 강요하며, “비국민을 색출”하여 고립시키고, 사회주의자/평화주의자/환경주의자 등을 “영원한 블랙리스트”로 배제할 것이다. 상처받은 대중들에게 “약간의 물리적 당근”을 제공하고 “소외된 룸펜들에게 국가주의”를 고취하여 이들을 민간 극우파로 양성함으로써 대중적 토대를 더 확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박노자의 묘사에 대부분 동의한다. 한국사회는 국가주의 정서가 매우 강하고, 반공주의 세력이 온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좌절한 청년층 가운데 우익을 표방하는 집단이 점차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불어 박근혜 정부가 통합진보당 등을 “내부의 적”으로 찍어내어 대중들의 공분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비국민을 선량한 시민들로부터 구별해내고 이들을 철저히 고립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노자가 묘사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박근혜 정부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 박노자는 한국에서 온존하는 국가주의를 파시즘적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민을 국가주의/민족주의로 통합하는 것은 근대 부르주아체제의 고유한 논리이다. 부르주아 체제는 자유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자유주의는 사회통합에 한계가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썼듯이,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인민의 민족화(국가화)’이다.

박근혜 정부가 강조하는 국가주의란, 그 자체로 파시스트적 전략이라기보다 부르주아 국가 일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민의 민족화/국민화’일 뿐이다. 파시스트의 민족주의 전략은 이를 훨씬 초과한다. 파시즘의 배외주의는 상상적으로 호명된 민족 외부의 존재를 ‘주적’으로 창조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적인 수사학을 남발하고 물리적 폭력을 공공연히 행사한다. 이를 통해 상상의 공동체를 강한 결집력인 통일체로 만든다.

반면 북한을 ‘주적으로 표상’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논리는 대중적인 열정을 생산할 수 없다. 북한은 더 이상 남한과의 체재경쟁 대상이 아니다. 북한이 남한보다 우월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국방부 관료와 일부 주사파들뿐이다. 대부분의 한국 시민들에게 북한은 그저 왕조적 통치스타일이 지속되는 기이한 ‘정치체제’일 뿐이다. 북한을 주적으로 표상하여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은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는 보수우익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지층 내부 단속용이지 공격적 프로젝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박근혜 정부의 대중동원은 파시즘의 대중운동에 한참 미달한다. 종북몰이에 앞장서는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나 반공주의 세력들은 대중운동이라기보다 “풀뿌리 보수주의” 네트워크이다. 용돈 받고 ‘종북 놀이’로 소일하는 집단과 전간기의 파시스트 대중운동은 질적으로 구별된다.

파시스트들은 엄청난 규모의 군중대회와 기동전을 통해 세력을 과시하고 적대적인 세력을 공공연히 공격한다. 일베와 같은 우익들은 진지전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대중동원력을 지니지 못한다. 일베 등은 담론적 정당성을 지닌 구성적 존재이기보다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하위 집단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가 ‘공안통치’를 통해 ‘갈등의 정치/적대의 정치’를 구성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의회주의를 넘어서거나 억압적 국가장치의 전면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정원 대선개입 물타기와 지지층 단속, 새누리당의 선거 승리를 위한 포석으로 보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안 몰이를 주도하는 것이다. 이 정부는 어느 때보다 법에 의한 판단을 선호하지만 통합진보당이나 전교조, 노무현 재단을 법적 판결에 맡김으로써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여론의 전환이다. 사회적 혐오의 대상(통합진보당)을 소환하여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4. 구조적 파시즘?

김동춘은, “한국적 파시즘의 새로움과 낡음”에서, 박근혜 정부는 ‘구조적 파시즘’의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구조적 파시즘이란 “공정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정권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집단이 ‘안보’의 이름하에 국민들을 무한대로, 무차별적으로 사찰하고 모든 국민이 자신이 피의자로 지속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체제”를 일컫는다. “미국처럼 국내외의 적을 상정하고 모든 정치적 대립을 적과 나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체제”가 이런 구조적 파시즘에 접근해 있다고 본다. 한국도 “냉전극우세력 주도”하는 구조적 파시즘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미국 헤게모니하의 세계체제의 작동원리를 구조적 파시즘으로 보려는 요한 갈퉁의 입장은 미국체제에 대한 수사학적 비판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분석적 함의는 없다.

전후 자유주의 세계체제는, 조바니 아리기가 쓰고 있듯이, “냉전의 발견과 복지국가”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동서양 진영의 적대에 기반을 둔 냉전체제는 경찰국가로서 두 강대국의 위상에 토대를 두고 건설되었다. 반면 국내에서는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체제가 지속되었다. 이것은 루즈벨트-트루먼의 합작품이다.([장기 20세기], 지오바니 아리기, 그린비)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은 광범위한 억압수단을 동원하여 자유주의 진영 내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봉쇄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늘 ‘대외적인 적대의 구성’을 통해 내부를 통합하고자 했다. 김동춘이 강조하듯, 이는 “메카시즘 시절이나 9.11테러 이후”만 그런 것도 아니다. 공화당 정부만 그렇게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민주당 정부 또한 냉전체제의 관리에 있어서 결코 공화당에 뒤지지 않았다. 오바마는 전쟁광 부시보다 더 전쟁을 선호한다. 미국은 종속국가들에서 쿠데타를 지원하고, 자국 내의 반란세력을 감시, 분열, 조작 했으며, ‘적과 아’라는 이분법으로 세계를 갈라 쳤다. 이것은 미국 자유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만약 이를 두고 구조적 파시즘이라고 한다면 전후 미국 헤게모니하의 자유주의 체제는 그 자체로 ‘파시즘 체제’가 되어버린다. 복지국가와 냉전적 대결구도는 대립 쌍이거나 대체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갈퉁의 논리대로 구조적 파시즘 개념으로 미국 체제를 분석한다면 전후 복지국가 자체를 파시즘이라고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파시즘’은 특정한 국가형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국가 일반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아무런 분석적 힘도 설득력도 없다.

물론 김동춘은 자신의 논지를 “구조적 파시즘하의 간헐적 극우몰이”로 구체화한다. 전쟁·분단을 겪은 한반도 내의 냉전적 구도 속에서 상수화 된 안보 위기 담론, 억압적 국가기구를 통한 공공연한 탄압, 극우반공주의 세력들의 공격적 대중동원 등이 구조적 파시즘으로 볼 수 있는 근거라고 한다.

냉전의 구도가 구조적 파시즘의 토양이며,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극우몰이는 파시즘이 구체적으로 가시화 되는 과정이다. 국정원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 반대세력에 대한 종북몰이, 극우 대중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것 등이 박근혜 정부의 파시즘적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구조적 파시즘이라는 개념 자체의 분석적 함의가 없기 때문에 이 이론틀에 기초한 논지는 설득력이 그다지 높지 않다. 김동춘이 파시즘적 양상이라고 열거하고 있는 현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향을 두고 파시즘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비록 김동춘이 열거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이 체제는 여전히 법적 절차에 토대를 두고 움직이고 있으며, 반대여론은 억압되기보다 설득되도록 조작되고 있고, 폭력적 국가장치가 여론의 전면에 나선 것도 억압의 전면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석기 구속과 혁명대오(RO)에 대한 조사가 공안몰이는 맞지만, 그것은 대중들의 대북 혐오증, 반주사파 정서를 동원하여 국정원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공안여론 몰이도 “극우 반공주의에 물든 정신병자”들 외에 대중동원의 효과는 없다.

북한에 대한 남한 대중의 혐오감은 유신시대의 반공주의에 물들어서가 아니라 ‘저급한 왕조체제’이자 ‘인민을 굶겨 죽이는 억압적이고 빈곤한 체제’에 대한 혐오감의 표현일 뿐이다. 북한체제는 자유주의적 가치에 한참 미달하는 체제인 점에서 혐오의 대상이고, 이런 북한체제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조롱 대상이 된 것이다. 그것은 대중적 분노이기보다 “여론의 놀잇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박근혜식 공안탄압에 대한 대중들의 여론도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시사인 여론조사’에서 보여주듯이, 다수의 대중은 통합진보당 탄압이 국정원 대선조작을 희석화하기 위한 여론 호도용이라고 믿고 있다. 법원은 전교조 ‘노조 아님’ 통보에 대해 법원 판결이 있기 전까지 효력 정지를 명했다. 다수의 대중은 전교조가 노조임을 인정한다. 이는 전교조에 대한 찬반을 떠나 이 조직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수 대중들은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선거개입을 했음을 인정한다. 박근혜 정부의 여론 전환도 의도도 크게 성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박-타임

강한 남자(독재자?)의 딸로 타임지 표지에 나왔던 박근혜 대통령

5. 파시즘 논의의 실천적 함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휴전선을 두고 남북이 대결하고 있고, 반공주의 세력이 온존한다. 반체제 진영에 대한 억압적 국가장치의 감시 탄압도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보수주의의 강고한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많은 부분 변했다. 반체제 세력들에 대한 공공연한 억압을 옹호하는 집단들조차 노골적으로 자신의 폭력성을 드러낼 수 없다. 보수주의자들도 한국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파시즘으로 볼 경우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된 양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박노자는 지난 20년간 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공안몰이에 대한 여론의 지지도가 압도적이지 않다는 점만 보아도 이는 쉽게 알 수 있다. 이석기 그룹이 주사파인 것은 맞지만 심지어 종북세력이라 해도 하나의 의견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여론조차 분명히 존재한다. 통진당 해산심판 청구에 반대하는 대중의 여론이 이를 증명한다.

박근혜 정부를 파시즘으로 볼 경우, 이에 대항하는 실천적 전략은 자연스럽게 반파시즘 전선이 된다. 파시즘은 공존할 수 없는 악이기 때문에 “사회적 악”을 제거하는 것이 민주 진보 진영의 우선과제로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낡고 낡은 민주-반민주 노선의 재탕이다.

지난 대선시기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2013년 체제론’을 유포하며 이와 유사한 정치적 입장을 강요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박근혜 정부를 파시즘으로 보려는 심리 내에는 모든 것을 반박근혜-반새누리당 전선으로 통합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이 녹아 있는 것이다.

박근혜의 폭주를 막기 위해 보수 야당과 선택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진보좌파 진영이 민주당과 같은 보수야당과 반파시즘 전선을 만들 이유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다. 민주당은 경제정책에서 박근혜 정부와 근본적 차이가 없다. 이들은 공히 신자유주의 전선의 전위이다.

진보좌파는 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 훼손에 대해서는 강력히 맞서야 하지만 진보좌파 자신의 의제를 실현하는 것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한다. 파시즘 논의는 이 모든 문제의식을 무로 돌려버린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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