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체사상보다 더 사교같은 '선진성 신앙'
    '경쟁''선진성'의 유일신을 숭배하는 사교집단
        2012년 06월 15일 10: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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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전의 일인 것 같은데, 서울에 처음 가서 살게 됐을 때에 제가 한 번 라디오 방송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에 대한 혐오증이 심하여 절대 구입하지 않지만, 라디오 정도는 저희 가족이 들어간 셋집에 애당초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방송은 국내외 “사학계 원로”의 좌담이었는데, 거기에서 맨끝에 북조선 이야기가 나와 특별히 보수적인 한 “원로”는 “이게 나라, 나라라기보다는 그냥 邪敎집단일 뿐”이라고 마구 내뱉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본인도 예컨대 토지개혁 때에 지주로 지목돼 재산을 빼앗기고 월남한 데에 대해서 엄청난 원한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소리의 어조로 봐서는 “邪敎집단”에 대한 감정들은 사뭇 개인적이었던 듯합니다. 그의 흥분된 목소리와 “邪敎집단”이라는, 욕설에 가까운 북조선 사회에 대한 규정은 왠지 머리 속에 박혀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됩니다.

    박노자 교수

    “邪敎집단”? 이 말 자체는 과연 학자가 쓸 용어인가 싶습니다. “옴진리교” 등 내부 결속과 외부와의 이질화가 강한 일부 신흥 종교집단들이 테러 행위 등 반사회적인 행동을 보일 때 당연히 그 행동을 단속하고 처벌해야 하지만, 해당 집단의 종교신앙 그 자체를 “”邪敎”라고 지목하여 배제, 차별한다는 것은 이미 인권침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옴진리교”도 그렇지만 예컨대 통일교 등 일부 신흥종교들의 유아독존적, 독선적 태도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끔찍한 독선, 자폐성, 자기 절대화는 그들만의 전유물도 아니지 않는가요?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식의 한국 “보통” 개신교 집단들의 신학 정도면, 벌써 인류의 대다수를 지옥으로 보내는 최악의 독선이 아닌가요? 한국의 보수적인 “주류” 개신교도 그렇고 통일교 류의 신흥종교들도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어떤 고질적인 병리의 증후군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 정신나간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광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고독과 자기고립, 무력감을 견뎌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들 종교집단의 모습입니다. 헌데 문제의 근원인 자본주의에 메스를 대지 않고 개개인의 신앙 그 자체를 문제로 삼는다면 이건 새로운 배제와 차별로 이어질 뿐이지 그 어떤 해결도 되지 못합니다. 전 그래서 “邪敎집단”과 같은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종교집단들에 대해서 말이죠.

    “邪敎집단”이라는 말은 학자의 입에서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지만, 북조선식 “유일사상”, 지도자 숭배 등의 문제성은 가시적입니다. 계급성이 결여된 그 사상만을 가지고, 계급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여 실천한다는 거야 불가능하죠. 예컨대 절대화된 “반외세”, 본질화된 “미제”의 像 속에서는 지금 “점거하라” 운동을 전개하는 가난하고 화난 젊은이들과 연대할 만한 그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식민지 트라우마의 결과겠지만, 계급적으로 복잡하게 분화된 미국이나 일본 사회를 획일화된 “적”의 이미지로 그리기만 하면 큰 문제죠. 북조선을 몽땅그려 획일적인 “전체주의적 악마”로 그리는 미제 보수 언론의 수준, 즉 바로 “적”의 수준 이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조선 사상의 문제성이야 한 눈에 당장 쉽게 들어오지만, 남한의 실질적인 “국시”의 문제는 오히려 교묘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어서 문제점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북 측의 “유일사상”과 달리 그 “국시”는 꼭 그렇게까지 명시적이지 않죠. 그러나 남한의 거의 모든 사회, 정치 세력들의 거의 모든 움직임 속에 그 “국시”가 녹아져 있어서 그 독으로 무수한 타자들에게 씻겨지지 않는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 “국시”, 숨겨져 있는 남한의 진짜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선진성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에 비해서는 정말이지 통일교나 “옴진리교”는 아희들의 장난에 불과하죠.

    개화기의 “문명개화” 열정, 식민지 시기의 “실력양성” 논리, 이승만 시기의 “미국의 우방 자유대한 건국” 이야기,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그리고 1990년대의 “국제화” 등의 계보를 이은 “선진성 신앙”은, 우파 쪽에서는 완전히 “숨겨진” 것도 아닙니다. 대놓고 “선진화”를 들먹이죠.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선진화”는 “기업하기 좋은 국가”, “복지 사회”, “다문화 사회”,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민국” 등등을 의미하는데, 그 모델은 대체로 영국이나 일본 등 복지주의 요소가 약간 있어도 발빠르게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선진국”들입니다. 문제는 “선진”의 구호 뒤에 숨겨져 있는 현실이라는 거죠. 구호야 비까번쩍, 비까후가하지만,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실질적 “내용”은 주체사상 이상으로 살인적입니다.

    “기업하기 좋은 국가”는 기업이 모든 법들을 통째로 무시하면서 비정규직 착취 등 극단적인 이윤극대화를 무조건 밀어붙여도 아무 문제 없는 “기업국가”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불법 사내 파견이 법에 걸려도 파견노동자들을 “직고용 계약직”으로 바꾸는 등 정규화 요구를 교묘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피하는 지금의 현대자동차처럼 말입니다(기사내용을 보시려면 여기를)

    “복지 사회”는 착취를 당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던져지는 작은 “당근”들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의료업자들의 소득을 보장해주기도 하는 의료보험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와 달리 “복지” 관련의 정부, “주류” 정당들의 모든 약속들은 예외없이 다 깨집니다. “반값등록금”을 기억하시나요? 실제 작년 이후에 등록금이 평균적으로 4,5%로 내렸을 뿐이고 곧 추가적인 인상으로 이것도 무의미해지고 말 것입니다.

    “다문화 사회”는 주로 가난한 나라 출신의 결혼이민자들에 대한 한글배우기 등 “동화” 추진을 의미합니다. 물론 아무리 동화돼도 “노예”에 가까운 “신분”은 크게 나아지지도 않습니다. “다문화 사회” 속에서 이주여성의 약 20%는 가정에서 물리적 폭력을 당하고 절대 다수는 폭언, 모욕, 정서적 폭력을 당합니(참고하시려면 여기를).주 가능성이 차단된 절대 다수 이주노동자들은 “다문화 사회”와 아예 무관하고요. 그리고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민국”은 위와 같은 약탈, 착취, 폭력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한국 기업인 (방직업)으로부터 “식칼테러” 등 갖은 폭력을 다 당해본 필리핀에서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월마트 등 세계적 수준의 야수들로부터 제품조달 계약을 따내 미국인 “대행”으로 아세아, 아프리카 노동자들을 야만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우리식 세계화”의 진짜 얼굴입니다.

    위에서 보다시피, 보수/”주류”의 “선진성 신앙”은 영국이나 일본보다 더 야만적인, 즉 그만큼 자본의 이윤최대화에 더 적합한 사회의 건설에 대한 굳은 신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국의 노동자/빈민들도, 외국의 노동자/빈민들도 평생 살인적인 “경쟁”의 늪을 벗어날 수 없는, 그 대신 자본의 이윤마진이 그대로 잘 유지되는, 그런 사회를 당연시하고 긍정시하는 것은 바로 “선진성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비주류, “진보”라 해도 “선진성 신앙”의 磁場을 완전히 떠나지 못합니다. “선진성 신앙”의 중요한 요소는 (신자유주의 도입의 사례에서 보인 것처럼) “선진 외국의 경험”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맹종하는 것인데, 이건 보수뿐만 아니라 “진보”의 고질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초중반, 동구권 몰락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계급투쟁”, “반자본주의”가 미국 학계에서 일시적으로 금칙어가 됐을 때에 (지금 이 부분에 대한 비공식적 “금지”는 서서히 풀리는 중입니다) 그 영향을 가장 빨리, 가장 많이 받은 곳은 바로 한국의 “진보”학계였습니다. 자본이 노동자로부터 이윤을 짜내는 것은 그대로인데, 한 때에 학계에서 자본의 “상징 생산”, “상징 교환”, ‘담론 생산”만이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진보” 학계에서 말입니다. 보수학계로서는 지금 초미의 관심사는 “선진적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에 가장 공로를 들였다 싶은 “건국의 대통령”,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이승만이나 일제시기의 전향자, 나아가서 총독부와 친했던 기업인이나 총독부 안에서 일했던 관료들의 “명예 복원”입니다. “선진적인 대한민국 만들기에 초석을 놓은 선진적인 총복부 만세!” , 이것입니다. 이 정도 “선진화”되면 숨이 너무 차서 더 이상 뭘 바라기도 어려운 거죠.

    그 폐쇄성이 너무나 가시적인 주체사상보다는, 망해가는 “선진권” 신자유주의나 “포스트” 등을 무뇌적으로 따라가는 우리들의 “선진성 신앙”의 타율성과 무비판성, 그리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후진적” 타자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야말로 “邪敎”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가 “제2 미국”, “제2 일본”을 만들려다가 결국 평민이 마음 놓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수도 없고, 연애할 수도 없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고, 한 순간이라도 “경쟁”의 압박을 벗어날 수도 없는 지옥같은 사회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약육강식, 승자독식 정글의 먹이사슬의 맨 밑에서 마음과 몸을 망가뜨리면서 아무 의미도 없는 “공부”에 매달리고 각종 폭력에 멍드는 우리 아이들은, 과연 “경쟁”과 “선진성”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邪敎에 집단으로 빠지고 만 우리들을 용서라도 할까요? 우리들이 과연 그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려고 합니까?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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