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에게 제 몫을 돌려주자
[에정칼럼]프레임 설정 방향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
    2013년 11월 21일 10:02 오전

Print Friendly

다음 질문에 대답해보자.

한국에서 흔하지 않은 질병이 발생해 600명이 죽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는 2가지 안을 제시했다. 1안을 선택한다면 200명을 구할 수 있지만, 2안을 선택하면 600명 모두가 살 확률이 1/3, 모두가 죽을 확률이 2/3이다. 당신은 어떤 안을 선택할 것인가.

그럼 다음 질문에도 답해보자.

똑같은 질병이 발생한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1안을 선택하면 400명이 죽게 될 것으로 보이고, 2안을 선택하면 아무도 죽지 않을 확률이 1/3, 모두가 죽을 확률이 2/3이다. 이 질문에는 어떻게 답변을 하겠는가?

심리학자였던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가 ‘아시아 질병 문제’라는 이름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첫 번째 질문에는 72%가 1안을 선택했다. 하지만 똑같은 내용인 두 번째 질문에는 78%가 2안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왔다.

같은 질문인데도 불구하고 전자는 대다수가 위험 회피 성향을 드러낸 반면, 후자에서는 위험추구 성향을 나타낸 것이다. 결과가 같은 것이라면 응답 비중도 유사해야 하는데 정반대의 비중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같은 대안이라도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를 행동경제학에서‘프레이밍(framing)효과’라고 부른다.

프레이밍효과란

정책결정권자들이 우리 사회에 정책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시민들을 설득할 때, 우리가 과연 어떤 프레임을 가진 시나리오를 받는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 장기적인 변화를 추동해야 하는 사안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 사회가 결정권자의 구미에 맞춰 지속적으로 변해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2차 에너기지본계획에 대해 우리에게 어떻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에너지 수요는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핵발전소든 화력발전소든지 간에 발전소를 더 지어 공급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수요관리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간간이 섞여 있지만 그건 치장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경제발전을 위해 에너지 수요 증가가 불가피하고, 그래서 약간의 위험이 예상되더라도 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규정한다. 정부가 내놓는 에너지 시나리오란 다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에너지 수요를 줄이면 경제적 혼란이 불가피하고, 재생가능에너지는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이런 불확실성에 기대는 건 위험하다는 구도를 강제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제시하는 시나리오는 온통 경제성에 기반을 두고 복잡하게 계산된 수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수요 증가로 인한 피해도 예상했을 테지만, 그것보다는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변동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애초에 다른 대안을 제시할 생각조차 없었거나.

c_pressian

에너지 수요를 관리하지 않았을 때 나올 피해를 강조하는 프레임으로 시나리오가 제시된다면 ‘아시아 질병 문제’의 두 번째 질의 결과처럼 우리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 공급 중심의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외부비용을 강조하고, 수요관리와 재생가능에너지 시스템이 가진 가능성과 불확실성이 제시된다면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공급 중심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건 시나리오 실패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공무원이나 전문가에겐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 확실한듯하다. 확실하게 계산가능한 것만 지표로 내어놓고, 불확실성에 기초한 정책적 목표는 예상하기 힘든 사안이라는 변명으로 귀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정책 방향은 계산된 수치의 결과가 아니라 의지의 산물이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 우리 사회를 바꾸겠다는 사회적 목표를 제시하는 게 정책의 목적이지, 대부분은 알아듣기도 힘든 수식과 변수 조정을 통해 나온 전망 그 자체가 정책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바로 우리 사회에서 경제학이 갖는 위상이다. 어떤 행위를 판단함에 있어 지나치게 경제성만을 따지다보니 다른 가치들은 모두 배제되기 일쑤다. 때문에 ‘경제적으로 봤을 때 최적 효율성’이라는 프레임이 갖는 효과는 정말 견고하다.

핵발전소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가장 경제성이 높은 에너지원’이라는 명제가 자리 잡고 있다. 핵발전소는 발전비용뿐만 아니라 환경비용 등과 같은 외부비용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가장 경제적이기 때문에 핵발전소를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신념이다.

하지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핵폐기물이나 온배수 때문에 사라지는 환경적인 가치들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중앙집중형 에너지 시스템 때문에 사라지는 공동체들의 인문학적 가치는 왜 인정받지 못하는 걸까? 규모의 경제로 인해 발생되는 과잉소비를 우려하는 사회적 가치는 소수만의 문제일까? 그리고 결정적인 건 왜 우리는 그런 가치들을 다시 경제적 가치로 환원한 후 경제적으로 가치가 낮기 때문에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걸까?

우린 지나치게 ‘경제적’인 정책으로 인해 사라지는 많은 것들을 본다. 물론 환경적 가치나 사회적 가치, 인문학적 가치 역시 항상 합리적인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가치들이 경제적 가치와 동등한 위치에서 검토되고 사회적으로 숙의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정부의 정책이 경제적 가치를 프레임으로 두고 있는데, 그 프레임은 그냥 두고 그 테두리 안에서 경제적 가치의 시비를 가리는 건 나중의 일이다. 그간 우리 시대의 ‘경제성’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프레임을 깨는 게 우선이다.

계산 가능한 수치들로 점철되어있는 2차 에너지기본계획을 보며 난 오늘 경제적 가치라는 것의 ‘몫’을 생각해본다. 아메리카 크리족 인디언에게는 이런 예언이 전해져 내려온다.

“마지막 나무가 베어져나가고, 마지막 강이 더렵혀지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달으리라.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 이제, 경제학에게 제 몫을 돌려주자.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