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로
    불리웠던 여자들의 낮은 이야기
    [책소개]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최현숙/ 이매진)
        2013년 11월 16일 01: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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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숙을 만난 저 할매들이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은 마음들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자식에게도, 며느리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할 사연까지 내놓으신 건 마음으로 들어주고 함께 울어주던 그 깊은 공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말해준 사람도 들어준 사람도 다 고맙다.”― 김진숙(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보편적 역사의 뒤안길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로 듣는 한국 현대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승자 또는 패자가 돼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보편적 역사’라는 미명 아래 잊히거나 지워진,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다. 한 번도 역사의 전면에서 조명된 적 없는,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들이다.

    ‘15소녀 표류기’는 한국 사회 여성들의 목소리로 한국 현대사를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로 출발했다. 다양한 여성들의 개인사를 묻고 들으며 남성들의 역사, 거대 서사 중심의 역사에 가려온 여성들의 새로운 역사를 발굴하려 했다.

    한국 현대사를 아우르는 시기를 살아온 할머니들, 역동적인 산업 사회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의 여성들, 이른바 ‘386 세대’로 불려온 40대 여성들, ‘88만원 세대’ 또는 ‘삼포 세대’로 불리며 악전고투 중인 20~30대 여성들, 그리고 동시대에 성장하고 있는 10대 여성들까지, ‘15소녀 표류기’는 모두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된다.

    지은이들은 각 세대별로 세 명씩, 열다섯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했고, 그 여자들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생생한 육성 그대로 실었다. 각자 조금씩 시차를 두고 같은 시대를 다르게 살아나간 여성들의 이야기가 흘러가고 겹쳐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자이크처럼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천당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지금까지 지난한 세월을 살아온 할머니들의 구술 생애사로, ‘15소녀 표류기’의 포문을 여는 이 책과 더불어 2권에서 베이비부머 세대의 여성들을 인터뷰하기도 한, 커밍아웃한 여성 정치인 최현숙은 세 명의 “흔해빠지고 사소한 늙은 여자들”을 만나 그 삶을 재료로 우리의 인생과 사회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너나없이 누군가의 어머니로, 할머니로 불러온 그 여자들의 이름은, 김미숙(89세), 김복례(87세), 안완철(81세)이다.

    “내 하느님은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의 하느님” ― 세 여성 노인의 구술 생애사

    김미숙은 1920년대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 무렵 이른 나이에 우연한 계기로 서울에 왔다가 그대로 발이 묶여버린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 일제 강점기 정신대 징용을 피해 결혼하기 전 평양에서는 전매국, 공장 등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아쉬울 것 없이 살았지만, 서울에 발이 묶이면서 아편 중독자인 남편 대신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키우느라 갖가지 노동에 종사한다.

    그중에서도 미군 부대 부근에서 양색시를 상대로 장사를 하거나 댄스홀 댄서로 일하며 미군들과 살림을 산 이야기는 나중에서야 지은이에게 털어놓게 된다. 미군 부대 부근에서 벌어먹고 산 일과 미군들과 살림을 살다 낙태를 한 일 등을 회개하라고 종용하는 아들네를 두고, “내 하느님은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느님이야.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오신!”이라고 일갈하는 대목은 무척 인상적이다.

    다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는 전남 옻방굴 출신의 김복례다. 김미숙처럼 김복례도 정신대 징용을 피해 젊은 시절 이웃 동네 한 남자와 눈속임식 동거를 했다. 남자가 징용으로 끌려간 뒤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 남자한테서 옮은 매독으로 안면 장애를 얻게 된다.

    그 뒤 김복례의 인생은 스스로 한 말처럼 “새끼들 안 굶길라고 안 해본 거 없이 다 하며” 살아온 세월이다. 남편은 새장가를 든 뒤 이렇다 할 가장 노릇을 하지 않았고, 김복례는 오로지 자기 힘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날품팔이와 행상으로 한 푼 두 푼 벌어 아이들을 먹여 살리다 상경해 쪽방촌 곁에서 땅굴집을 짓고 살다가 자리를 잡기까지, 김복례의 인생은 어디에도 집계되지 않은 ‘비공식 노동’으로 연명하며 빈농에서 도시 빈민으로 이동해온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김복례의 이야기는 큰딸과 둘째가 함께한 자리에서 집단 구술의 성격을 띠고 진행됐는데, 세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한국 사회의 격변기를 함께 헤쳐나간 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은이 최현숙의 어머니이기도 한 안완철의 인생사가 펼쳐진다. 안완철은 양반집 막내딸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 가족 중 아무도 자신을 더 돌보고 교육시키지 않은 한을 품고 사는 인물이다.

    양반이라는 굴레에 머리로는 평생을 갇혀 살면서도,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남편 곁에서 자식들을 키우면서는 집 장사, 피엑스 물건 장사부터 사채놀이까지 ‘양반’을 벗어던지고 손닿는 대로 쉼 없이 일해왔다.

    모녀지간이라는 관계의 특성상 지은이는 안완철을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개입하고 함께 이야기를 풀어간다. 가정 폭력이라는 같은 그늘을 이고 살아온 억척스러운 엄마와 별난 딸이 서로 이해해가며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여성주의 구술사 작업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뭇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웃는 여자들’의 낮은 목소리로 다시 쓰는 우리의 역사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안완철은 하루아침에 뒤바뀌어버린 어린 시절 자신의 신세를 떠올리며 몇 번이고 이렇게 회고한다. 세 여성 노인의 인생은 이렇듯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흘러왔다. 한 번도 노동이라 불리지 못한 노동을 하고, 가부장제에서 순종을 강요받으며 어머니로, 한 가계의 가장으로 ‘뼈 빠지게’ 살아왔다.

    그렇게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살아온 평범한 여성들이다. 그러나 그 여성들이 풀어놓는 여러 겹의 이야기 사이사이에서, 시대와 역사가 강요한 조건에 순응하지 않은, 때로는 맞서 싸우고 때로는 협상하며 삶의 전략을 세워온 비범한 모습들도 발견하게 된다.

    이 ‘웃는 여자들’이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재구성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우리는 여성들의 삶을 틀 지어온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러나 그 틀 안에 다 담길 수 없던 여성들의 욕망과 투쟁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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