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고] 진보적 민주주의, 동무, 인민
        2013년 11월 15일 01: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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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정부가 통진당의 정당해산을 청구하면서 그 사유 중에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문제 삼은 대목이 있다. 북한에서 쓰는 용어라는 구실이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우습다는 반응을 보였다. 민주주의 앞에 ‘진보적’이라는 관용어를 붙인 게 뭐가 문제냐 라고 하거나, 북한에서 같은 말을 쓴다고 해서 그게 무슨 문제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대목에서 나는 처음에 약간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북한에서만 쓰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적 민주주의’

    얼핏 생각하면 민주주의 앞에 여러 수식어 중 하나를 붙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마치 ‘한국적 민주주의’가 한국적인 민주주의를 뜻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독재를 미화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 특수한 용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민주주의’는 진보적인 민주주의라는 뜻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역사적 의미가 있고, 특별한 고려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고유명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모택동의 ‘신민주주의’, 동구권의 ‘인민민주주의’, 80년대의 ‘민중민주주의’와 궤를 같이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사회주의자들이 자기 나라의 사정에 맞게 단계론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하는 전략을 담은 용어이다.

    모택동 당시의 중국 사회는 봉건적 토지제도가 온존하였고, 인구의 대부분을 농민이 차지하고 있었다. 서유럽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달리 노동자를 주축으로 해서 사회주의를 지향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사회주의는 커녕 당장의 봉건제부터 변혁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부르주아 없는 부르주아혁명 즉, 인민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부르주아혁명을 수행한 후 사회주의로 나아가자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것이 신민주주의다.

    인민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80년대에 인민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인민’이라는 용어에 담긴 불온한 냄새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신 사용한 것이 ‘민중’이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더 더욱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통진당 당권파들이 강령을 개정하면서 남한에서 통용되는 ‘민중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추진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정당해산 청구를 하면서 이것이 북한에서 쓰는 말이라고 했을 때,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동무, 인민, 그리고 진보적 민주주의

    그런데 생각해 보면 꼭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다. ‘동무’라는 말과 ‘인민’이라는 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동무’라는 말은 ‘친구’라는 말보다 한결 친근한 느낌이 드는 순 우리말이고, 실제로 예전에는 더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었다. 이 말이 금기시되는 말이 된 사정은 해방 이후의 우리 사회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해방 직후만 해도 아직 지주-쌍놈의 신분차별의식, 관료들의 권위주의, 엄격한 장유유서 등 봉건제 사회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있던 시절이다.

    그래서 당시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이것을 타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인들 간의 대등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호칭으로 ‘동무’라는 말을 썼다.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급, 관료, 연장자들이 이 용어를 불쾌하게 생각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6.25때 어린 인민군이 어르신들에게 ‘동무’라는 말을 썼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대단히 컸던 모양이다.

    ‘인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남한에서는 ‘민중’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지만, ‘인민’은 원래 영어의 ‘people’에 해당하는 말이다. 특별히 불온시할 이유가 하등 없는 말이지만, 이 역시 해방 이후의 혼란기에 사회주의자들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했고, 특히 6.25 이후에는 북에서만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진보적 민주주의’도 사실 북에서만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고 한다. 해방 직후 여운형이 사용했는데, 건준 선언과 근로인민당 강령에도 등장하는 용어라고 한다. 이 용어를 과연 여운형이 처음 썼는지 여부는 연구를 통해서 확인해 볼 문제이지만, 그가 왜 ‘인민민주주의’ 라는 용어 대신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근로인민당을 창당한 사람이고, 더구나 당시는 ‘인민’이라는 말을 금기시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중앙일보사를 운영하면서 세계 정세에 밝았고, 세련되고 선진적이었던 여운형이 당시 서구에서 일반화된 사민주의에 대해서 해박했던 점을 근거로 추론해 보건대, 스탈린식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인민민주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짐작을 해보지만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진보적 민주주의’가 건준 선언과 근로인민당 강령에도 등장하는 용어인 만큼 당시에 ‘진보적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북에서도 이 용어를 받아들여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6.25 이후 이 용어는 ‘동무’ ‘인민’처럼 남한에서는 금기어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통진당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크게 불온시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내포하는 의미가 그 동안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동의하겠지만, 남한은 87년 이후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이미 성취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북에서는 남한을 아직 반(半)봉건사회로 본다는 점이다.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북은 스스로 인민민주주의를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민주기지론’이라는 것이 있다. 한반도의 북쪽은 이미 인민민주주의를 성취한 민주기지이며, 이 기지를 굳건히 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해서 남에서도 인민민주주의를 성취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사실 6.25도 이러한 민주기지론에 바탕을 두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인민민주주의를 성취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남한 내의 일부 주사파들이 여전히 이런 시대착오적인 ‘민주기지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진당 당권파들이 추진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에는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민주기지론’의 냄새가 배어 있다.

    헌법학계에서는 우리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에서 ‘민주’는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사회민주주의도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라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수정자본주의 이후 사회주의적 요소가 자본주의 국가들에 도입되었고, 우리 나라 헌법에도 그러한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다. 대한민국 건국헌법의 초안자들도 애초에 이러한 사회경제적 체제를 분명하게 지향하였고, 이승만 독재 이후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지만 아직도 우리 헌법에는 사민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요소들이 꽤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는 여운형이 표방한 ‘진보적 민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에서는 뉴라이트 등 일부 보수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민주주의자들은 진보적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통진당의 일부 세력들이 어떻게 사용하던,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는 용어인 셈이다.

    그러나 그동안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모습이나 뉴라이트들이 보여준 모습으로 보건데, 이들은 헌법 상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자유민주주의로만 축소시키기 위해 강력한 행동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가 보도자료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거니와, 보수세력들은 이번 기회를 이념전쟁의 기회로 삼고 있는 듯하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훼손 시도에 대하여 국가정체성을 확립’하고, ‘진보를 가장한 자유민주체제 위해세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심판청구를 통한 공론화 및 향후 기준 마련’을 하겠다는 것이다.(법무부 보도자료 20쪽) 문제는 헌법재판관들의 성향으로 보아 판결의 결과가 그리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더구나 통진당 내 일부 세력들이 강령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삽입한 과정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정권의 목표는 자기검열의 내면화

    ‘동무’ ‘인민’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복권시킬 때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박근혜 정부가 정당해산 청구 이유로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에서 쓰는 말이라고 주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우습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정당한 반응이다. 좋은 말을 누가 쓰든, 설사 북한에서 쓴다고 해서 남한에서 못 쓸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이 노리는 것은 스스로 자기검열을 통해서 냉전을 내면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통진당에 대한 정당해산 청구는 이러한 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당해산 심판청구를 6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내년 지방선거는 우리 사회를 냉전시대로 되돌리기 위한 거대한 이념전쟁의 전장이 될 것 같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자기 아버지가 그랬듯 북한과 적대적 공존관계를 통해서 공약 파기 이후 드높아진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냉전으로의 복귀라? 박근혜 정부는 우리 사회를 87년 이전으로, 박정희 시대로, 6.25 직후로 되돌리고 싶은 모양이다. 그야말로 앙시앙 레짐이다. 그것도 아주 유치찬란한. 하긴 원래 앙시앙 레짐이 유치찬란하기는 하다. 그러니까 구체제 아닌가? 유치 치사빤쓰들에게는 조롱과 야유, 비웃음으로 하이킥을 날리는 게 제격이다.

    필자소개
    노동당 강원도당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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