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성애 활동그룹과 좌파정당
    [세계 LGBT 운동의 역사] 브라질 LGBT 운동 ③
    By 토리
        2013년 11월 12일 02: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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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편 ② 기사 링크

    1980년에 결성된 PT(브라질 노동자당)는 동성애 해방을 공개적으로 논의한 첫 정당이다. 노총 지도부 출신이자 당 지도부였던 룰라는 1981년 첫 당대회 때 이 이슈에 대해 발언한 바 있다.

    “우리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다루거나 공권력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이 받아야 마땅할 존중을 옹호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큰 노력에 함께 하도록 초대할 것입니다.”

    본 연설에서 PT의 의도는 명확했다. 즉 동성애에 대한 낙인을 바꿀 뿐 아니라 PT의 정치 의제에 동성애자들이 함께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1년 뒤 1982년 선거에서는 반차별 강령이 최초로 전국 프로그램에 포함되었으며 정당 내 게이 레즈비언 위원회를 조직하여 당원들에게 운동의 과제들을 교육시켰다. 또한 Socialist Convergence라는 트로스키주의자 그룹이 PT의 동성애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1982년 브라질은 독재 이래 첫 입법부 및 주지사 선거를 가졌다. 이들 선거는 동성애 운동의 정치적 경로를 결정지은 선거이기도 하다. 이후 선거 운동이나 입법 캠페인 등에 있어 선례가 되었고 연방정부와의 관계까지도 결정지었다.

    우선 활동가들은 어느 정당 편을 들지는 않았으나 대신 ‘직접 전략’을 선택했다. 후보의 성적 지향이나 정치적 성향을 가리지 않고 접촉하여 선거 후 동성애운동의 요구를 지킬 것을 정치적으로 약속하도록 하였다. 이 전략은 어느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지 않은 그룹들 사이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요구안들을 모든 후보자들에게 내보였고, 정치 토론회에 후보들을 초청했으며, 질문지를 보냈다. PT는 이러한 노력에 가장 호응적인 정당이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유일한 정당이었고 당의 집회에 활동가들을 초청하였다. PT는 모든 정당들이 설문에 응하고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세울 것을 요구한 유일한 정당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이 가능했던 것은 어느 정도 브라질의 선거제도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했다. 후보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의 유권자들을 상대로 호소했으며 정당의 방침과 규율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컸다.

    브라질은 멕시코의 경우와는 달랐다. 멕시코 (동성애) 활동가들은 정당 규율이 많이 퇴색된 상황에서도 시민사회와 페미니스트들과 더 강한 동맹을 맺었고 좌파정당과의 관계는 약했다. 이러한 차이는 집합적 정치적 정체성 형성 뿐만 아니라 활동가들의 직접 요구안의 내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브라질 활동가들은 국가를 상대로 요구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정체성 담론을 채택하였고 동성애자들을 권리 기반 소수자 그룹으로 규정한 경향이 있었던 반면, 멕시코 활동가들은 “성적 다양성”이란 슬로건 아래에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이는 요구안에서 보다 넓은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게끔 하였다.

    브라질과 멕시코의 차이

    1970년대 말 브라질과 멕시코에서는 둘 다 좌파정당에서 동성애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좌파들에게 이 이슈에 대한 행보를 결정짓는 첫 발걸음이었다. 또한 많은 전투적 당원들에게 “신좌파”라는 이슈를 어떻게 합치시킬 수 있을지, 혹은 이데올로기적 유연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당 활동가들이 처음 이 이슈를 다룰 때의 기준은 무엇을, 혹은 누구를 대변할 수 있는가/없는가였다. 1970년대 양쪽 국가 모두 정당들은 협소한 지하조직의 구성체였고 역사적 공산주의자 정당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었다. 동성애자 해방 운동의 요구들이 부상한 것은 좌파 정당들로서는 잠재적 지지자층들 앞에 새로운 과제가 제시된 것이었다. 정당들은 과제를 앞에 두고서 다음과 같이 고민하였다. 어떤 요인들이 이 요구를 만들어내는지, 어떤 요인들이 (잠재적) 지지자층들을 형성하는지.

    가장 먼저 정당 내 동성애운동 논쟁을 이끌어냈던 곳은 브라질과 멕시코 둘 다 트로츠키 그룹이었다.(브라질의 Socialist Convergence, 멕시코의 Revolutionary Workers Party, PRT) 양 정당 혹은 그룹 모두 게이 레즈비언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반차별 강령을 프로그램에 삽입하였다.

    PRT는 남미지역에서는 최초로 전체 혁명 과업 중 일부로 동성애 해방을 정의하였다. 멕시코 공산주의자 정당(PCM)은 이 주제에 관해 논쟁을 열었고 남미지역 공산주의자 정당 최초로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반면 브라질 공산주의자 정당(PCB)는 이 이슈를 무시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부상한 대중적 기반의 좌파정당-브라질의 PT는 앞서 언급했듯이 동성애 해방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한편 멕시코의 대중 기반 좌파정당이라 할 수 있는 민주혁명정당(PRD)는 좌파 내 동성애 이슈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정당 준비위 지도자들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비판하는 강령을 거부하였고 이는 1995년에나 채택되었다. 민주화와 물질 풍요 시대의 변화, 대중 기반 정당의 부상에서 좌파정당의 중심축 역시 중산층 청년들로 바뀌고 있었고 청년들의 반문화운동 경향 역시 흡수하고 있었다.

    Herbert_Daniel

    무장게릴라였고 동성애 활동가였던 허버트 다니엘(사진은 위키)

    1979년 초 브라질 앰네스티가 소수자 문제 논의를 시작했을 때 많은 브라질 대안 매체들의 주목을 받았다. 반독재 투쟁가였으며 이후 제일 중요한 브라질 AIDS 활동가가 된 Herbert Daniel의 경우 앰네스티 문화위원회 차원에서 논의를 제안하였다.

    “다른 주제들은 이미 좌파 내에서 수용되었고 논의되었다.” 다니엘은 논쟁을 통해 동성애 해방이 좌파들의 광의의 의제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편견을 이해하기 위해 동성애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성애를 이해하기 위해 편견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다”

    브라질 앰네스티는 문화위원회의 논의 제안을 토의한 후 거부했다. 거부의 근거는 동성애가 비도덕적이고 선전되어서는 안된다는 동성애혐오적 적대감에서부터 동성애 이슈를 다루는 것이 사람들을 나누어 버릴 것이라는 절충적인 것까지 다양하였다. Daniel과 다른 위원회 멤버들은 브라질 앰네스티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토론회를 열어야 했다.

    이 사례는 당시 브라질 좌파 내 동성애 해방운동의 위치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소수자 권리”라는 이름 하에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었지만 동성애는 여전히 낙인의 문제였다. 낙태와 마리화나 합법화, 그리고 성노동과 함께 동성애는 “저주받은 이슈”의 카테고리 내에 있었다.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과 사람들을 나눌 수 있다는 우려는 좌파들이 계속 부딪쳐야 할 우려였다. 개인 좌파들의 동성애에 대한 혐오적 이해를 극복하고 그들의 요구를 우선시하는 것은 정치적 댓가가 따르는 것이었다.

    좌파들 내에서 논쟁을 제기하면서 활동가들은 많은 반대 논의에 부딪쳐야 했다. 동성애 자체가 맑스주의 개념에서는 자본주의 타락이나 부르주아 섹슈얼리티 형태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또한 문화적 식민성을 강조하는 좌파 네셔널리즘의 틀 내에서는 국가 전통에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게릴라 전통에서도 동성애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Daniel은 “게릴라에 있을 때 나는 내가 동성애자라고 말할 수 없었다. ‘큰 사회적 혁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내면적 친밀한 감정을 포기했다. 동성애, 생리, 비정상, 겁 등은 투쟁의 발전을 방해하는 문제로 ‘게릴라의 한계’로 인식되었다. 근 7년간 금욕해야 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레즈비언 게릴라 역시 ‘게릴라 내 가사분담’과 동시에 ‘페미니스트로서의 내부 투쟁’ 둘 다로부터 소외를 경험하였다. <계속>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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