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의 유목민, 불멸의 예언자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
        2013년 11월 11일 11:09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

    우리 독서 시장에서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장르 가운데 하나가 아마 평전(評傳) 문학일 것이다. ‘평전’은 잘 알다시피, 문제적 개인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재구(再構)하면서도 거기에 평전 작가의 서사적 상상력이 개입하는 이른바 ‘사실적 허구’의 양식이다. 또한 평전은 평전 작가의 비평적 해석과 평가가 깊이 매개될 수밖에 없는 인물 비평 양식이기도 하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전태일 평전>이나 <이광수와 그의 시대>, <체 게바라 평전>, <마르크스 평전> 등은 이러한 평전의 중심적 속성을 충실하게 구현한 사례들로서, 이미 우리 독서 시장의 고전이 된 지 오래인 명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은 이처럼 완성도 높은 평전들을 통해 한 시대의 중요한 인물을 둘러싼 사상․철학․역사의 흐름을 접할 수 있게 되고, 그 인물의 생각과 행동의 편폭에 대한 평전 작가의 날카로운 비평안(眼)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문익환 평전>(실천문학사)은 문제적 개인의 삶을 통해 한 시대를 전체적으로 통찰하게 하는 평전 문학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방대한 노작(勞作)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형수가 5년여의 자료 섭렵과 취재를 통해 공들여 펴낸 이 책은, 재야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자 저항 시인이기도 했던 문익환(文益煥, 1918-1994) 목사의 일대기를 시간적 순서대로 밟아가면서, 그것을 20세기라는 야만의 시대와 때로는 결합하고 때로는 병치하면서 재구성하고 있다.

    이 책에서 문익환 목사의 삶은, 작가의 실증적 노력과 활달한 상상력에 의해 20세기와 치열하게 맞선 예언자적 삶으로 재구성된다. 작가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여러 차례 투옥되고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투쟁의 현장에 있었던 문익환 목사의 실천적 삶의 저류(底流)에, 젊은 날의 오랜 모색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 데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작가가 가장 중점적으로 착목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문익환 목사가 히브리 수난사 속에서 한민족의 수난을 유추했다는 것이다. 문 목사의 몸에 배인 ‘기독교 민족주의’가 구약의 예언자들을 한국적 상황 속에서 발견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되풀이하여 강조하듯이, 문익환의 예언은 심판의 이미지가 아니라 섬김과 사랑의 말씀으로 작동한 것이었다. 오랜 동안 섬김과 사랑으로 묵상하던 이 예언자는 마침내 1976년 3․1구국 선언을 기점으로 하여 뜨거운 말씀의 불덩이를 토해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의 예언은 권위의 명령이 아니라 섬김의 말씀이었고 사랑의 말씀이었고 화해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문익환

    그렇다면 이 평전은 자연스럽게 그 ‘섬김’과 ‘사랑’의 에너지가 어떻게 형성, 발현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실증과 상상 속에서 씌어질 것이다. 작가는 실증(사실)과 상상(해석)이라는 평전의 두 가지 기둥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여기지 않고 방대한 지면을 채워가고 있다. 작가는 책의 프롤로그에서 문익환 목사의 사실적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문익환은 북간도에서 태어나서 초․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21세 때 일본신학교에 유학한다. 동경 시절 알게 된 전도사 박용길과 1944년에 결혼하고, 만주 신경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46년에 월남하여 이듬해에 30세의 나이로 한신대를 졸업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1949년에 다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33세의 나이로 유엔군에 지원해 통역자로서 정전 회담에 참여한다. 그의 신분적 정체성이 최종 확정되는 것은 1955년, 미국에서 돌아와 한신대․연세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한빛교회 목사가 되면서였다. 그후 1968년부터 신․구교 공동 성서번역의 책임위원으로 매진하고, 1976년에 ‘3․1 민주구국선언’에 연루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진다. 이때가 바로 59세. 그는 원로의 나이였지만 재야운동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어 77세에 별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2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수난의 삶을 산다. 그 기념비의 하나로서 ‘방북’은 통일운동의 최고 업적이 되어 후에 남북 양측의 극적인 공감대로 사용되었다.(45-46쪽)

    인용문의 마지막 행에 언급되고 있는 그의 역사적 ‘방북’은 이후에 남한 통일운동의 한 정점으로 평가되기에 이른다. 당시 그의 방북을 두고 소영웅주의적 행동이라고 매도했던 이 나라 주류 언론들은 그의 의지와 실천이 가지는 진정성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냉담했고 침묵했다. 하지만 그는 미움보다는 사랑, 분열보다는 화해, 원한보다는 믿음과 화합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임을 보여준 평화의 사제(司祭)이기도 했다.

    방북 직전인 1989년 새해 첫날 그는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이제는 그의 대표적인 시적 브랜드가 된 역설의 시편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남기고 있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이건 진담이라고//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가기로 결심했다구/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돌아가는 거지//(중략)//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그야 하는 수 없지/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 「잠꼬대 아닌 잠꼬대」(<두 하늘 한 하늘>, 창작과비평사, 1989) 중에서

    이 시편에 가득한, 마치 어린아이 같은 맑고 고운 눈빛과 그와 상반될 것만 같은 강렬한 실천 의지는, 그의 신앙과 민족 통합의 ‘꿈’을 이끌어간 근본적인 두 가지 힘이다.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그야 하는 수 없지/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라는 시의 마지막 연은 그 같은 행동의 진정성과 절박성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해 4월 “역사를 산다는 것은 벽을 문으로 알고 부딪치는 것”이라고 했던 그대로, 그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분단의 장벽을 돌파했다.

    그 후 그의 몸은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통일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봇물은 터져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만큼 20세기라는 무자비한 괴물과 대결하여 그 괴물이 낳은 자식들인 ‘분단’과 ‘폭력’과 싸우면서, 그는 불멸의 이름을 얻은 예언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평전은 인간 문익환이 치러낸 그 지난한 싸움과 상처와 영광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2.

    자크 아탈리는 그의 <21세기 사전>에서 “20세기는 1918년에 시작되었다”(39쪽)고 도발적으로 썼다. 왜냐하면 “1917년 10월에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약 9개월간에 걸쳐 소비에트 권력이 국가적 위상을 확보”(39쪽)한 이래로 세계사는 두 개의 진영으로 차갑게 갈라져 지난 역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대립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때로부터 20세기는 인간 역사의 진보 가능성에 대한 열렬한 환호와 참담한 회의가 숨가쁘게 교차한 시기로서의 속성을 점증해가게 된다.

    한편 20세기는 어느 한순간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대량 학살과 난민, 망명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야만이 20세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지속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20세기적 질서가 살아 있는 한 인류는 ‘칸막이 없는 공생’이 불가능”(43쪽)했던 것이다. 문익환 목사는 “이 불행한 세기의 원년(1918년)에 태어났다”(44쪽)고 작가는 적고 있다. 그 불행한 세기 동안 문익환 목사가 자신을 지탱하는 기둥을 삼은 것이 “자기가 딛고 선 땅이 바로 ‘한국이라는 이름의 히브리’였음을 발견하는 것”(57쪽)이었다.

    책의 제1장 ‘문익환의 선사시대’에서 작가는 문익환의 생을 형성한 “기원”(66쪽)을 찾아나선다. 그 기원은 “한 사람의 신학자로서 그는 마음속 깊이 히브리 백성들을 공경했고 그들의 역사를 흠모했다. 각종 이념과 폭력이 난무하는 20세기의 사막을 횡단하는 동안에 시종 꿈을 만들어준 정신적 반려로서, 또 삶을 학습시키는 텍스트의 세계로서 평생을 동반해준 것도 히브리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가 말년에 옥중에서 쓴 <히브리 민중사>는 보란 듯한 증거이다.”(70쪽)라는 진술 속에 축약되어 있다. 요컨대 <히브리 민중사>의 한 구절인 “모든 기쁨,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면서 자신은 말없이 땅을 밟을 뿐인 발바닥!”(70쪽)이 바로 문익환의 삶의 기초이자 궁극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발바닥’은 문익환이라는 실존이 지향한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 ‘발바닥’의 정신으로 문익환은 시종 ‘꿈’을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그의 ‘꿈’은 한갓 몽상이 아니라 반드시 실행해야 할 다짐이었고 절박한 역사의 요청에 대한 반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히브리 사람들이 살아온 저항과 수난의 역사를 통해 한반도의 그것에 눈뜬 것이 바로 문익환의 삶과 정신이 발원한 기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제2장 ‘점화된 불꽃’에서는 북간도에서의 유년 시절을 채록하고 있다. 해란강과 일송정 그리고 김약연과 윤동주와 송몽규로 상징되는 북간도 체험은, 문익환의 정신적 원형을 이루고 있는 풍부한 기억을 그에게 선사한다.

    특히 윤동주는 문익환의 가장 결정적인 시적 원체험으로 남아 있을 정도로 깊은 흔적을 그의 영혼 안에 남긴다. 그 북간도에서 문익환은 일제에 대한 저항과 일제에 의한 명동 공동체의 “해체의 길”(144쪽)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섬김에의 의지는 그의 피 속에 담긴 요소였다. 자아 속에 깊이 갇혀 있는 자는 다른 이들에게 절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때로 독선적인 사람처럼 보였지만 근본적으로 남을 우러러보길 좋아했다.(126쪽)

    작가는 문익환의 기독교 체험 속에서 이 같은 ‘섬김’에의 의지가 형성되었음을 발견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섬김’에의 의지는 문익환의 앞으로의 삶을 예견케 해주는 둘도 없는 모형이 된다.

    이어 작가는 문익환의 동경 시절(제4장 ‘외길의 시작’)과 그의 “연분홍 코스모스”(207쪽)인 아내 박용길과의 만남과 결혼, 윤동주의 죽음 등을 서술하면서 그것들이 문익환의 삶과 맺고 있는 깊은 연관에 대해 말한다. 그 과정에서 일제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되고 “문익환은 선대들의 위엄에 찬 고구려 시절을 끝”(247쪽)내게 된다. 히브리 민중들의 고난이 출애굽을 통해 가나안으로의 희망을 이어갔듯이, 한반도의 수난사도 해방이라는 역사적 결절(結節)을 통해 통일된 자주 민족 국가로의 ‘꿈’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익환 평전

    제5장 ‘한없는 침묵과 고독의 성(城)’에서는 문익환이 해방 후 서울에 정착하고 나서의 삶이 펼쳐진다. “문익환이 서울에 닿은 것은 1946년 8월”(251쪽) 그러니까 해방이 되고 1년이 지난 후였다. 그 후 문익환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고 전쟁에도 참여한다. 33세의 나이로 유엔군에 지원해 통역자로서 정전 회담에 참여한 것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평생 화두이자 과제인 ‘분단’의 문제를 육체 안게 깊이 새기게 된다.

    제6장 ‘시(詩) 정신 예언자 정신’은, 문익환의 여러 정신적 저항의 원류가 그의 시 정신과 예언자 정신의 통합에서 가능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전쟁 후 4․19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를 “한국인에서 히브리인으로”(366쪽) 바꿔버린 결정적 계기가 바로 “1968년 신․구교가 함께하는 성서 공동번역의 책임위원으로”(374쪽) 위촉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성경 번역은 신학자로서의 문익환의 위상과 정체성을 한층 강화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제7장 ‘두드려라, 부서질 것이다’는 박정희 군부 정권과의 오랜 긴장과 싸움의 시간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작가는 “야만의 시간”(415쪽)을 지나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434쪽) 발걸음을 옮긴 문익환의 종요로운 전환의 지점을 살피고 있다. 그때 문익환은 <기독교사상>(1971. 11)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오늘날 심하게 변천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의 생존을 찾아야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대로 자주적인 민족 운명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면 분명히 거기에는 거대한 국민 통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현대 사회, 특히 남북 대립이라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정신적 깊이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일치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413-414쪽)

    불가사의하게 변화해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민족적 정체성과 자주성을 지키려는 기독교 민족주의자의 모습이 선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국민 통합’을 역설하는 그의 태도에서 장차 통일의 일꾼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어서 제8장 ‘꿈을 비는 마음’에서 작가는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인 「꿈을 비는 마음」을 두고 “고은의 「화살」, 양성우의 「지금은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등과 함께 최고의 낭송가 성래운의 목소리를 타고 울려퍼지면서 민족시의 명작 반열에 들어섰다.”(543쪽)고 평가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문익환은 이 작품에서 “그도 아니면/이런 꿈은 어떻겠소?/그 무던 앞에서 샘이 솟아/서해바다로 서해바다로 흐르면서/휴전선 원시림이/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그리고 우리 모두/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꿈을 비는 마음」, <꿈을 비는 마음>, 화다, 1978)라고 표현하면서,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그 유토피아에의 꿈이 실질적으로 그의 저항의 에너지를 이끌어온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9장 ‘예언자적 질주’에는 “옥바라지 투쟁을 나날이 본격화”(584쪽)하면서도 광주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굳건히 투쟁의 현장을 지킨 문익환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담겨 있다.

    아마 그 부서진 오월이 없었더라면, 아니 그 부서진 오월 때문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없었더라면, 그의 이름은 ‘과거를 수놓는 많은 별들 중의 하나’로 끝났을 것이다. 문익환은 새롭게 체감되는 역사의 실감을 자신의 양심 속 깊은 곳에 전면 수용했다. 무엇에 대한 양심인가? ‘살아 있는 주검’들이 아니라 ‘죽어버린 생명체’, 즉 장차 부활할 몸체들에 대한 양심이었다.(613-614쪽)

    그의 기독교 민족주의가 한 시대의 첨예한 민중적 저항성과 ‘양심’ 속에서 극적으로 만나는 순간이 바로 이때이다. 특히 기독교의 부활 신앙과 역사적 상상력이 그의 육체와 정신 안에서 이미 하나였음은, 그가 종교적 배타주의자가 아니라 통합과 사랑의 예언자였음을 알게 해주는 확연한 증거이다.

    제10장 ‘고독 속에서 불타는 연대기’는 “재야의 사령탑”(617쪽)에 올라 투쟁하다가 1987년 민주 세력의 분열로 인해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는 참담한 세월을 적고 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민통령(民統領)’이라는 별칭답게 민중이 가슴으로 신뢰했던 한 시대의 아버지였다. 정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이 불행한 민족의 아들딸을 섬기고 사랑한 온갖 기억들이 전국의 젊은이들과 재야 인사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이어서 제11장 ‘거인(巨人)’에서 작가는 문익환의 삶이 통일이라는 거대한 화두로 옮겨지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 결과 “한반도에서 그토록 완강하게 버티던 난공불락의 냉전 체제가 문익환이 가한 균열로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된 것”(751쪽)이 작가의 판단이다.

    마지막 제12장 ‘황혼이 없는 생애’에서 작가는 “이 시대 민중의 마지막 어버이였던 문익환. 그는 삶에 지친 우리에게 잔잔히 타이른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801쪽)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사랑과 열정의 생애, 문익환 늦봄 문익환 목사의 생애는 가장 정직하고 순결하게 자기 시대를 껴안은 위엄의 삶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결국 문익환 목사의 “정서적 조국은 고구려였으며, 영혼적 혈통은 유목민이었다.”(81쪽)고 말한다. 민족 통합과 민주주의 성취를 위해 밤낮으로 뛰었던 그의 생애를 잘 요약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는 늘 ‘청년’일 수 있었고, 현실의 부단한 움직임과 생을 함께하는 ‘유목민’일 수 있었고,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진단하고 성찰하는 ‘예언자’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익환 평전>은 이처럼 남루했던 우리 20세기 정신사에서 이처럼 거대한 자취를 남긴 한 거인의 삶을, 그리고 범접하기 힘든 진정성과 뜨거움으로 살아간 ‘영원한 청년’ 문익환 목사의 초상을 우리에게 투명하고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다.

    3.

    <문익환 평전>의 맨 앞에는 마치 무슨 아포리즘처럼 성경 말씀의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히브리서 11장 1절)가 그것이다. 우리가 비록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그 믿음의 힘이 얼마나 지속적이며 순결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럼으로써 믿음이 이미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얼마나 확연하게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의 더없는 역사적 증거가 바로 문익환 목사의 77년 생애였을 것이다.

    작가는 “그의 순정은 불가항력의 성격을 띠고 한국 현대사가 가장 참담했던 시기에 그곳에 쏟아졌다. 폭력은 상대방의 능동적 방어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는 그 능동적 방어를 무너뜨리고 불행한 이웃들을 안간힘으로 사랑해버린 것이다.”(58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가 문 목사의 장례식장에서 누군가의 격정적인 목소리로 전해주는 “그래, 이렇게 해서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35쪽)라는 외침 또한 문익환 목사의 삶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순간 20세기의 유목민이 꾼 위대한 ‘꿈’은 비록 미완이나마 우리의 기억과 체온과 삶 속에 깊은 각인을 남기게 되었고, 히브리적 한국인이었던 불멸의 예언자의 삶은 그렇게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가 큰 인물이 부재한 시대라고 믿고 있다. 그 한 원인이 우리 사회가 인물을 키우기보다는 클 만하면 흠집 드러내기를 통해 거꾸러뜨리는 사디즘(sadism)의 정치 관행에 익숙해 있다는 데 있다. 아마 김구 선생이 살아온다 해도 지금의 정치 상황에서 존경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지난날을 잊고 현실적 이해 관계나 이미지 정치에 의해 거대한 망각 속에 빠진다.

    그런가 하면 최근 우리 사회에는 첨예한 이념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여야는 물론 보수-진보 간에 날카로운 긴장이 형성되고 있으며, 미국이나 북한 체제에 대한 시선도 그야말로 다양하게 분화하고 있다.

    이 같은 시대에 통일운동에 순결하게 자신을 헌신했던 거인 문익환 목사가 남긴 삶의 발자취는 우리에게 커다란 역사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김형수 시인이 정성 들여 재구성한 문익환 목사의 사유와 실천을 새삼 바라보면서, 이 질기디질긴 역사적 망각과 싸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필자소개
    한양대 국문과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