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
    오늘을 위한 전략적인 교훈
    [책소개] 『역사평설 병자호란』(한명기/ 푸른역사)
        2013년 11월 09일 02: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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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과거’가 아닌 ‘현재’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

    1675년(숙종 1) 봄, 만주 벌판을 달려온 한 사내가 압록강의 중강中江에 도착했다. 사내의 이름은 안단安端. 청나라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향하던 도망자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안단은 청군에게 붙잡혀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가 된다. 그리고 1644년, 청이 북경을 차지하자 자신의 주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한다.

    1674년, 오매불망 고국으로의 귀환을 열망하던 안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주인이 북경을 비웠던 것이다. 1673년 오삼계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강남이 혼란에 빠지자, 안단의 주인은 진압군으로 차출되어 강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주인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안단은 탈출을 감행한다. 물경 38년 만의 시도였다. 북경을 출발하여 산해관을 통과하고 심양을 거쳐 만주 벌판까지 무사히 가로질렀다. 탈출의 성공을 눈앞에 둔 안단은 의주의 조선 관리들에게 입국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행운은 안단을 외면한다. 공교롭게도 의주에는 마침 청나라 칙사들이 입국해 있었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안단의 사연을 칙사들에게 알렸고, 칙사들은 안단을 묶어 봉황성으로 압송해버린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끌려가면서 안단은 절규했다.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고 말이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던 안단은 어찌 되었을까?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이 불쌍한 궁조窮鳥를 보듬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안단의 기막힌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병자호란이 남긴 고통의 그림자가 길고도 길었음을 새삼 절감한다.

    병자호란

    참담했던 병자호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병자호란의 결과는 참담했다. 국왕이 무릎을 꿇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붙잡혀 끌려갔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좌절되었던 안단의 비극이 웅변하듯 피로인被擄人들(병자호란 당시 후금군에게 사로잡혀 끌려갔던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은 특히 처절했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전쟁을 일으켰던 가해자 청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청의 침략 가능성을 뻔히 알면서도 별다른 대책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조선의 문제점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병자호란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낼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명과 청이라는 패권국 사이의 ‘조선’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대한민국’을 교차시킨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G2(Group of 2)시대라 일컬어지는 현재, 그리고 G2세력의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두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병자호란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병자호란의 참상을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자 한 것이다.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세세하게 살피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지금 여기’에 큰 의미를 던져준다.

    인조 정권,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파탄을 드러내다

    주지하듯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에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에 종료된 청의 조선 침략 전쟁이다. 1592년의 임진왜란,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인해 이미 쇠락해진 조선은 청이 침략한 지 두 달여 만에 항복하고 만다.

    1627년 정묘호란 뒤 후금後金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으면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점차 조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거기에 조선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이 후금과의 실리적 외교를 제한했다. 문제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점차 세력을 키우던 후금은 1636년 4월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즉위식을 갖는다. 그런데 즉위식에 참석했던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홍타이지에게 절을 올리는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 태종은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 조정은 격분했다.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 등을 탄핵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은 청군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려든다. 청군 철기鐵騎의 가공할 기동력과 전투력을 감당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45일 만에 항복했다.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행했다. 치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더욱 처참했다. 5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청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비싼 속환가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어려웠지만 돌아온 후에도 ‘화냥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렇게 병자호란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조국’마저 앗아갔다.

    인조, ‘정권 안보’에만 급급

    조선은 명과 청,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이자 ‘종속변수’였다. ‘끼어 있는’ 약소국이 자존을 유지하며 생존하려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병자호란과 인조 정권의 행적을 돌아보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먼저 ‘정권 안보’에만 급급했던 인조 정권의 난맥상을 지적한다.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 광해군 정권에게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정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질타했지만 그들 또한 권력을 잡은 뒤에는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적산 탈취, 권력 남용, 인사의 난맥상 등이 잇따라 불거졌다. 그 귀결이 이괄의 난이었다. 이괄의 난 진압 이후에는 어렵사리 되찾은 정권을 보위하는 데 급급하다가 날이 새고 말았다. 새 정권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의 실망은 컸다. ‘당신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라는 냉소와 비아냥이 번져갔다.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도 이 같은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인조 정권은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가 청에 저항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청군의 침략이 시작되자 입도入島조차 못했다. 무능력과 무책임의 산물이었다.

    청군의 침략 사실조차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한번 패한 뒤에는 근왕을 포기하고 숨어버렸던 김자점, 사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들을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하는 데 동의하고 병사의 기본조차 모르면서 장졸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김류, 자신의 가족과 인척들을 강화도로 가는 배에 먼저 태우고 세자빈마저 김포 쪽에 방치했던 김경징 등의 행태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적과 싸우겠다는 호언과 의기는 높았으되 국정 전반은 ‘나사가 풀린 상태’였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반정공신들 못지않게 인조의 책임이 컸다. 인조는 ‘명을 배신한 패륜 정권을 응징한다’는 명분과 공약을 내세워 집권했으되 그것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일관성 없는 즉흥적 대책으로 안팎으로 곤경을 자초했다.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했던 것을 맹렬히 비난했으면서도 자신은 생부 원종 추숭에 더 강하게 집착했다. 국방 대책 마련과 민생 안정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것들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 실천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수사와 궁가들에게 부여했던 경제적 특권을 줄이거나 철폐하라는 요청에는 귀를 닫았다. 그리고 일이 터져 나올 때마다 백성들에게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사과’로 점철되어 있던 시대였다.

    요컨대 인조 정권은 과거 정권을 뒤엎는 ‘파괴’에는 성공했지만, 집권 이후 새로운 차원으로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다. 건설은커녕 ‘정권 안보’에만 급급하다가 ‘국가 안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 피해는 온통 백성들이 뒤집어썼다. 조선 역사의 비극이었다.

    인조, 객관적 사실에는 눈을 감고 주관적 허상에만 매달리다

    저자는 또한 인조 정권이 대외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주관적으로 규정하려 한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명과 후금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후금에 대한 대책 또한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619년(광해군 11) 명의 강요에 떠밀려 조선군이 참전했던 사르후薩爾滸 전투를 대하는 인조 정권의 시각과 해석이었다. 광해군은 후금과 원한을 맺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원정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인조는 명의 거듭된 압박과 신료들의 집요한 채근에 밀려 1만 5천의 병력을 파병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명 장수 유정 휘하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1619년 3월, 심하深河에서 후금군의 기습에 휘말려 병력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왜 이런 참극이 빚어졌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명군의 난맥상 때문이었다. 당시 명군이 절대로 후금군을 이길 수 없었다. 병력, 무기, 작전, 기율, 지휘관의 역량, 인화人和 등 모든 측면에서 명군은 열세였다.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집중시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판에 명군은 병력을 넷으로 나누는 실책을 저질렀다. 네 부대를 지휘했던 두송, 마림, 이여백, 유정 등 장수들은 서로 전혀 화합하지 못했다. 특히 두송은 공을 독점하려는 욕심 때문에 일제히 출전하기로 약속했던 날짜를 어기고 먼저 출전했다가 사르후에서 후금군에게 전멸되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 부대들 또한 후금군에게 각개격파되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군은 유정의 강압에 떠밀려 군량 보급로도 확보하지 못한 채 무조건 전진하다가 후금군의 기습에 휘말렸다. 참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인조 정권은 사르후 전투 참패의 원인을 오로지 조선군 탓으로 돌렸다. ‘광해군이 미리 투항을 지시하고 기밀을 누설했기 때문에 명군이 참패했고 요동 전체가 넘어갔다’고 말이다. 이전 정권의 ‘허물’을 부각시켜 자신의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명 조정으로부터 승인을 얻어내려는 목적이었다. 이 대목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조는 곧이어 명에 출병 기일을 알려주면 병력을 동원하여 후금 토벌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한다. 명과 후금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했던 섣부른 약속이었다. 당시 명은 후금을 공격할 의지나 여유가 없었다. 천계 황제의 무능, 환관 위충현의 전횡 아래서 명의 내부는 곪아터지기 직전이었다. 반면 후금의 정치, 군사적 역량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조가 후금을 치겠다고 섣불리 약속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타고난 존명尊明 의식에 권력을 잡은 직후 넘쳐났던 자신감에서 비롯된 언사였을 것이다. 그와 함께 명과 후금의 역량과 정세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부정확한 정보에 주관적인 해석까지 더해지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매몰되어 실현 가능성이 없는 약속이나 공약을 남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문룡을 비롯한 명의 관리들에게 ‘후금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먼저 다짐했다가 역풍을 맞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요컨대 인조 정권은, 광해군 정권이 아무리 밉더라도 사르후 전투와 관련된 사실은 ‘사실’대로 인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싸움의 주체인 명군의 문제점이나 후금군의 장점은 전혀 알려하지 않고, 원정 실패의 모든 책임이 광해군 정권에 있다고 규정해버렸다. 이렇게 ‘팩트Fact’에 눈감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자세를 지속하면서 문제점은 계속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 전략적인 ‘오늘’을 위한 거울

    ‘복배수적腹背受敵’의 한반도, 무엇을 해야 하나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상황을 ‘복배수적腹背受敵’이라고 표현했다. ‘배[腹]와 등[背] 양쪽에서 적이 몰려오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정면의 중국 대륙과 배후의 일본 열도 사이에 ‘끼인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정면이나 배후에서 기존 질서의 판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면 ‘끼인 자’ 한반도의 처지는 심각해진다.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는 조짐을 보이고, 새로운 강국이 떠올라 패권국에게 도전하는 상황이 되면 ‘끼인 자’는 위기를 맞는다.

    조선 역시 그랬다. 몽골족의 원이 쇠퇴하고 한족의 명이 떠오르던 14세기 후반에는 왜구의 발호가 극심해지고 홍건적이 고려로 밀어닥쳤다. 명이 쇠망의 조짐을 드러내고 일본이 굴기하던 16세기 말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으로 명이 더 쇠약해지고 누르하치의 만주가 떠오르던 17세기 초반에는 병자호란을 겪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이 쇠퇴하고 일본이 다시 굴기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한반도를 할퀴었다. 14세기 후반 이래 주변에서 힘의 전이가 벌어지면 한반도는 어김없이 전쟁터가 되었다.

    현재라고 다를까? ‘복배수적’의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냉전시대 이래 세계의 패권국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쥐락펴락했던 미국이 쇠퇴하고, 지난 100여 년 동안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중국의 부상이 눈부시다. G2로 떠오른 중국의 자신감과 넘버 3으로 내려앉은 일본의 초조감에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조바심이 맞물리면서 한반도 주변의 정세는 예측불가의 상황을 맞고 있다.

    역량 강화만이 살 길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끼인 자’인 약소국이 복수의 강대국 모두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강대국들끼리의 관계가 계속 적대적이 되면 ‘끼인 자’는 결국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조선이 ‘황제의 나라’ 명, ‘형의 나라’ 후금, ‘원수의 나라’ 일본과의 관계를 ‘모두’ 우호적으로 유지하려다가 끝내는 파국으로 내몰렸던 전철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 대한민국은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에서 다시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전략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활로를 찾으려 애쓰되 우리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일정 정도 이상의 독자적인 역량이 없을 경우, 외교적 노력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군사력을 비롯한 국가적 역량이 변변치 못한 상태에서 명과 청의 대결 속으로 속절없이 휘말렸던 병자호란의 전철을 돌아보면 ‘역량 확보’는 절박하다.

    경제적 실력, 군사적 역량, 문화적 매력 등에서 주변 열강이 무시할 수 없는 ‘근사한 민주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 세대만이 아닌 후대 세대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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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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