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붕괴사의 연대기적 나열
[책소개] 『정신사적 고찰』(후지타 쇼조/ 돌베개)
    2013년 11월 09일 02: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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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사적 고찰』은 전후 일본의 대표적 비판적 지성으로 꼽히는 후지타 쇼조(藤田省三, 1927~2003)가 현대 사회에 나타난 문제적 현상을 진단하고 그 정신사적 연원을 고찰한 책이다. 유기적으로 연계된 각 에세이마다, 역사 속 ‘붕괴’의 순간마다 존재한 ‘전환’의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각 시대별 결정적 국면을 짚어낸 후지타 쇼조 특유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 후지타 쇼조

후지타 쇼조는 전후 일본의 비판적 사상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에 태어나 갑작스러운 패전을 맞은 뒤 전시 체제와 검열이 사라진 일본 사회의 왕성한 지적 열기 속에서 청년기를 보낸 그는, 1950년 도쿄대 법학부에 입학해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문하 ‘마루야마 칠드런’의 일인자로서 일찍이 촉망받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첫 논문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는 일본 천황제 사회의 내부 구조를 남김없이 분석한 획기적 성과로서 커다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후지타 쇼조는 일본 사회의 ‘강요된 과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를 겁내지 않고 늘 대담하게 방법론을 모색하는 사상가였다. ‘사상의 과학 연구회’에 참여하고 미일안보조약 개정반대투쟁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등 1960년대까지 사회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던 그는 1971년 교수직을 자진 사임하고 9년간의 ‘낭인 생활’을 보내게 된다. 고도성장 궤도에 진입해 대대적 사회 혁신의 동력을 잃어가던 일본 사회에서 ‘본원적 경험의 상실’이라는 현상을 진단한 그는, 깊은 위기감과 정신적 갈등 속에서 그러한 문제의식의 밑바닥까지 도달하는 근본적 고찰에 집중했다.

그런 10여 년간 그는 고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한편, 중세 나아가 고대에 이르는 인류학적 역사관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이 책 『정신사적 고찰』은 바로 그러한 시기에 지어진 후지타의 역사·정치 에세이다. 일본 ‘전후 정신’의 최종 주자를 자임한 사상가로서, 후지타 쇼조는 이 책에서 각 역사적 시대마다 나타난 ‘붕괴’의 순간들과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전환’의 가능성에 대해 깊이 있게 숙고하고 있다.

정신사적 고찰

후지타 쇼조의 전기와 후기를 잇는 에세이의 정수

1975년부터 1981년까지의 글을 모은 이 책은 1982년 출판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각계의 주목을 받았다. 좌파 마루야마 학파의 수재로 여겨졌던 후지타가 오랜 침묵을 깨고 귀환함을 알리는 작품이었을 뿐 아니라, 기존의 근대-전근대의 구도를 벗어난 인류학적 시야와 고대와 중세에 대한 착목 등 새로운 시점을 선보인 저작이었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후지타의 저작들 가운데서도 『정신사적 고찰』은 단편들의 함축적 응집을 통해 지적 도약을 시도한 후지타 쇼조식 에세이의 정수라 할 만하다. “그동안 책이란 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기분으로 거의 갖다버리듯이 내 왔다”고 술회한 그가 “이번만은 성의를 다해 솜씨를 발휘했다”고 예외적으로 자평하며 유작으로 삼고 싶다고 밝혔을 만큼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깊은 애착과 힘을 기울여 ‘완성’된 역작이기도 하다.

단절과 전환, 일본 붕괴의 역사와 새로운 시대 건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일본의 붕괴사를 연대기 순으로 나열한 것’이라 평하고 있다. 기존 사회의 총체적 붕괴와 혼돈 즉 카오스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시대 건설에 필요한 양의성兩意性(‘밝음과 어두움’, ‘죽음과 탄생’ 등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동시에 나타나는 성질)을 발견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본질적 문제가 대립의 말살로 인한 ‘경험의 상실’임을 집약해 내는 한편, 지난 역사적 전환의 갈림길에서 버려져 현재는 묻혀 있는 가치들과 가능성을 이제 반드시 발굴해 내야 함을 힘있게 상기시킨다.

고대에서 율령국가로, 중세에서 메이지(明治)로, 메이지에서 쇼와(昭和)로, 전전(戰前)에서 전후(戰後)로, 그리고 전후 초기에서 고도성장기로 변모하던 역사적 순간들에 출현한 시대적 단절과 전환은 각각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한 권 속에서 유기성을 잃지 않고 단단하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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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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