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위자연의 신화 넘어
    치열한 삶의 이야기로
    [책소개]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김시천/ 책세상)
        2013년 11월 09일 02: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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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와《장자》는 유교 중심의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공맹과 대등한 사상적 지위를 누려보지 못한 채 늘 이단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한국에서는 동아시아 고전 중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책이 되었다.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서구 이론의 영향을 받은 해체론적 노자 해석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대중에게《노자》와《장자》에 대한 어떤 고정된 인상이 각인되었다. 탈속, 자연, 유유자적, 현자, 탈정치, 반문명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인상은 과연 올바른 이해의 결과일까?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는 노자와 장자를 전공한 동양철학자가 그간의 노장 공부의 결실을 모아 엮은 책으로, 텍스트의 문맥을 놓치지 않는 전공자의 시선을 통해 노장에 대한 통념이 실제의《노자》,《장자》와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즉 이 책은 두 문헌의 내부에 있는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명하기보다는 기존의 연구 성과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상식으로 굳어진 노장 철학의 주제들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의 시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기존의 논의와 다른 해석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노자》는 천하의 정치적/ 사상적/ 사회적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사람들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헌으로서 정치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을 위한 기술적 지침서와 같은 책이며, 반면《장자》는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 지식인들을 위해 세상과의 불화를 해소하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문헌이 이렇게 이질적임에도《노자》와《장자》는 ‘노장’이라는 말로 한데 묶여 실제와는 동떨어진 고정관념을 낳아왔으며, 이러한 고정관념에 일조한 주제들 중 대표적인 것이 노장을 대변하는 개념이 ‘무위無爲’라는 것,《노자》가 페미니즘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것,《장자》가 기술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해에 따르면 무위는 노장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간주될 만큼 노장의 독보적인 개념도 아니고 탈속적/ 반문명적인 삶과 연관되는 개념도 아니다. 또《노자》와 페미니즘,《장자》와 기술 문명 비판을 연결 짓는 것은 문맥을 간과한 채 원문을 선별적으로 인용하거나 잘못 이해한 것으로, 전통과 탈근대적인 것을 잘못 연결한 결과이다.

    노자의 칼

    저자는《노자》와《장자》를 이렇게 읽어내는 것에서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노장을 어떻게 삶에 유의미한 것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그리하여 노장을 도가나 도교라는 이름의 철학이나 종교로 받아들이지 말고,《장자》의 ‘유遊’(노님) 개념에 입각해 ‘도술道術Tao-techniques’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도술이란 신비한 초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부정하거나 삶에 종속되지 않고 삶을 누리는 기술, 정치와 문명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누리는 기술을 말하며, 이러한 시각은 철학과 종교의 이분법,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결국 이 책은《노자》와《장자》에서 삶의 기술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노래하는 노자의 칼, 춤추는 장자의 방패 – 노장과 ‘모순’

    이 책의 제목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는《노자》와《장자》를 둘러싼 여러 차원의 모순을 환기한다. 우선 글자 그대로 ‘창(칼)과 방패’로서의 ‘모순’이다.

    저자의 이해에 따르면《노자》는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과 같은’ 책이고,《장자》는 권력의 중심부로 나아가지 못한 자가 다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방패와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격이 다른 두 책이 마치 동질적인 것인 양 ‘노장’이라는 말로 함께 묶여 거론되니 이 또한 모순이다.

    한편,《노자》와《장자》는 유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 사회에서 이단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지만, 모순되게도 이이, 박세당, 홍석주, 서명응, 한원진 같은 정통 유학자들에 의해 주석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에 박세당의《신주도덕경》과《남화경주해산보》, 이이의《순언》, 홍석주의《정노》, 한원진의《장자변해》같은 노장 주석서가 쓰이고 읽혔다.

    요컨대 조선 시대에《노자》와《장자》는 이단이면서도 ‘바깥’에 있지 않고 ‘안’에 있었던 셈이며, 저자는 이러한 모순을, 성리학이라는 정치적 교조를 고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금단의 노장을 읽으며 자유를 꿈꾸었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분열된 내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저자는《노자》와《장자》에서 이런 중층의 ‘모순’을 읽어내며, 결국 삶 자체가 그렇게 모순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게다가《노자》와《장자》모두 단일 저자에 의해 쓰인 책이 아니어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데다 모호한 언어로 되어 있어 해석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니, 노장 읽기는 모순으로 가득해 종종 길을 잃게 만드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

    저자는 노장의 모순이 삶의 모순과 유비를 이루기에 오히려 삶에 위로를 준다고 말하며, 나아가 도가나 도교 대신 ‘도술’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철학이나 종교 아닌 삶의 기술로 받아들여 현실적 동반자로 삼을 방법까지 모색한다.

    《노자》와《장자》에 대한 통념은 올바른가

    두 문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인위나 억압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초탈한 태도로 살아가는 현자의 격언쯤으로《노자》와《장자》를 떠올리는 통념과 거리가 있다. 저자는 노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많다고 보고 이를 점검한다. 여기서의 논점은 ‘무위자연’이 노장을 대변하는 개념인가,《노자》가 페미니즘과 닿아 있는가,《장자》가 기술 문명에 반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유가는 ‘유위有爲’를 주창했고 노장은 ‘무위’를 주창해 유가를 비판했으며, 유위는 인위에 상응하고 무위는 자연에 상응한다는 것이 통념상의 도식이다.

    하지만 저자는《논어》,《맹자》,《순자》,《묵자》등 여러 고전 문헌들의 ‘무위’ – ‘유위’ 용례를 분석해, 무위와 유위가 대립되는 개념이고 무위와 자연이 상응하는 개념이라는 상식은 틀린 것임을, 그리고 무위란 “제자백가의 공통 개념으로서 어느 특정 학파가 전유한 것이 아니며, 기본적으로 정치 행위 이론”임을 밝힌다. 따라서 무위자연을 도시와 문명을 떠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과 연관 짓고, 무위자연이 노장이 추구하는 삶의 대명사라고 이해하는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럼《노자》와 페미니즘의 관계는 어떠한가? 저자는《노자》가 여타 문헌에 비해 여성성을 중시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것이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의 차원은 아니라고 말한다.

    《노자》의 몇몇 표현들을 들어《노자》를 페미니즘과 연결시키는 것은, 유가는 뭔가 부정적인 사상 체계이고 도가는 뭔가 긍정적인 사상 체계라는 도식적 선입견 때문에《노자》에 나오는 여성성 강조의 표현 하나도 과도한 의미를 담아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노자의 시대는 가부장제 완성의 정점이었는데 그러한 시대에 노자가 여성을 찬양하고 페미니즘 철학을 전개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일이냐고 저자는 반문한다.

    《노자》에서 볼 수 있는 여성성의 강조는 여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적 강함에만 의지하는 정치는 온전하지 못하니 군왕은 여성의 유약함을 가장하는 교묘한 ‘술수’ 또한 겸비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자》가 기술 문명을 비판했다는 상식 또한 잘못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식이〈천지〉편에 나오는 ‘기심機心’이란 말을 “편리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원문의 맥락을 따른다면 ‘기심’을 “최소 투자 최대 효과의 심리”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그렇다면〈천지〉편의 이야기에서 기심을 비판하는 것은 “기회주의적 심리를 비판한 것이지 고도의 기술적 성취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양생주〉편에 나오는 포정의 이야기에서는 기술에 대한 긍정을 읽을 수 있다. 소를 잡는 데 있어서 기술을 넘어 도의 경지에 오른 포정의 칼놀림을 보고 문혜군이 ‘양생의 도’를 터득했다는 이 이야기로 미루어,《장자》에서는 기술이 비판되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를 수 있는 방법으로서 긍정됨을 알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노장, 삶의 기술로서의 ‘도술’을 위하여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 ‘노장’은 “《노자》와《장자》라는 텍스트에 담긴 내용 혹은 그와 관련된 문헌에 담긴 철학적, 사상적, 종교적 전통”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노장이 유가 전통에 포섭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노자》와《장자》가 한대漢代 이래 제자백가의 하나인 ‘도가’로 분류되고 20세기에 ‘도교’의 기초 경전으로 이해되면서 노장은 철학적, 종교학적으로 언제나 도가와 도교라는 더 큰 범주와 철저하게 관련돼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노장을 철학이나 종교로서 대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지속시키며 향유할 방법을 모색하자고 말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노장을 도가/도교 아닌 ‘도술’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며 이를 위해 저자는 다시 ‘유遊’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저자는 ‘유’ 개념을 현대라는 패러다임으로 가져와 ‘유’를 정치를 부정하기보다 정치를 누리고, 문명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문명을 누리는 태도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유’에 이르도록 해주는 것이 양생養生nourishing-life의 기술(자의적 권력에 맞서 자신의 생명과 삶을 보전하는 기술)과 달생達生mastering-life의 기술(양생의 기술을 삶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하는 기술)이며, ‘도술’이란 이러한 삶의 기술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우리 시대라는 틀 안에서의 고전 읽기를 고민해온 저자는 이처럼 노장 전공자로서의 진지한 노장 읽기를 통해 통념에 가려져 있었던《노자》와《장자》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동시에 이러한 고전을 삶 속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그리하여 이 책은 저자 자신의 바람처럼 학술적 연구서이면서 작은 이야기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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