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좌파가 없는 나라
    2013년 11월 08일 04: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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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작은 세미나 참석 건으로 미국의 뉴멕시코 주, 산타페에 잠깐 와 있습니다. 내일(11월 7일)이면 발표를 하고 바로 노르웨이로의 귀환 길에 오릅니다. 미국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아주 드물게, 특강이나 학회가 생기면 찾아오는 것이기에 이번 미국 방문을 기회 삼아 “미국”에 대한 제 소감을 한 번 정리해볼까 합니다.

타자를 만날 때 맨 먼저 그 타자성, 즉 다름에 착안하는 법인데, 저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미국”을 접할 적에 “미국”이 제가 일상적으로 더 잘 아는 사회들 (북구, 러시아, 한국 등등)과 뭐가 다른가에 대해서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느낄 수 있는 미국의 다름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이 가능하겠습니다: “제가 만나본 사회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좌파가 없는 사회”. 좌파가 없는 나라,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좌파가 있다고 해서, 그 좌파는 꼭 제가/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그 힘을 쓰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힘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민주노총은 기본적으로 “좌파 노조”이었지만 오랫동안 비정규직 문제를 거의 방기하다시피하고 전투적 투쟁을 피해온 바 있으며,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한국 자주파와 비슷한 “반제 투쟁” 위주의 “민족 좌파”긴 하지만 가끔가다 그 좌파 민족주의적 요소가 그 전투성을 다 죽이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독일의 좌파당은 아주 확연히 전투적 계급 좌파지만 의회주의 틀 밖에 나와 투쟁을 전개할 만큼의 힘과 의지는 결여하고 있습니다. 즉, 좌파가 있는 사회인데도, 다들 나름의 문제를 갖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나마 “문제 있는 좌파”라 해도 대중적 좌파가 있는 사회와 좌파가 아예 없는 사회는 또 서로 아주 분명히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좌파가 없다는 것을, 거의 순간순간 일상 속에서 실감할 수 있습니다.

월급을 아예 받지 않고 팁에 의존하는 식당 웨이터의 아부적인 태도에서도,

노조가 없는 대학에서 임금인상을 얻자면 보다 많은 학술논문이나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일반인으로서 접근하기도 어려운 책들을 마구 생산해 다른 대학으로부터 취직 제안을 받아 그 제안을 가지고 본인 대학의 경영자들과 개인 협상을 해야 하는 교수들의 자기 연구영역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려는 극도로 개인 중심주의적 태도에서도,

길거리마다 보이는 배고픈 노숙자들에 대한 대다수 일반인들의 절대적 무관심에서도,

대학이 아무리 수익사업에 전념하고 아무리 인문학 등 “돈이 안 되는 학문”을 줄여가면서 축구팀 키우기에 안간힘을 쓰고 그 코치에게 미국 대통령 봉급보다 더 많은 사례를 주어도 반란을 일으킬 줄 모르는, 너무 얌전해 빠진 학생들의 삶에서도, 바로 이 특징부터 보입니다.

미국 대학농구경기 한 장면

미국 대학농구경기 한 장면

좌파가 없는 사회로서의 특징.

좌파가 없기에 대학이나 (일부 제조업만을 제외한) 대다수의 민영기업에서 노조가 없어도 되고, 그 성장 과정에서 미국의 아동의 절반 정도가 한 번이라도 의존해본, 빈곤인구(약 5천만 명, 한국 총인구와 맞먹는 수준)의 대량아사를 유일하게 방지하는 푸드 스탬프(식량교환권, 일종의 생활보호대상자 식량 확보 제도)를 지금 하는 것처럼 마구 줄여도 됩니다 (관련기사 링크). 어차피 유의미한 반대를 할 단체들이 없을 것이니까요. 정치적으로 본다면, 미국은 ‘극우파’와 ‘보통우파’가 자웅을 겨루면서도 그 누구도 “밑”의 이해관계를 표방하지 못하는 사막에 불과합니다.

미국은 과연 어떻게 해서 산업화된 국가치고 거의 유일하게 이런 괴물적인 사회정치적 형태를 띠게 됐을까요?

백 년 전의 미국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힘차게 자라는, 극히 정상적인 산업사회이었습니다. 사회당의 1912년 대선 득표율(6%)은 예컨대 독일이나 프랑스의 사민당들의 총선 득표율보다 못 미쳤지만, 급진적 노동운동 (IWW 등)의 사회적 위상이 높았으며 계속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잭 런던(‘강철군화’의 작가) 등과 같은 100년 전의 미국 문호들은 대표적인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이었습니다(런던은 사회당 당원).

여담이지만, 제가 며칠 전 택사스주립대에서 특강했을 때에 그 수강생 중에서는 런던이라는 작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좌우간, 100년 전의 미국은 러시아나 독일 사회주의자에게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극도로 정상적 사회이었는데 그 보수화 과정은 미국이 세계체제의 패권국가로 부상된 1930-50년대에 이루어진 셈입니다.

1930년대의 뉴딜 정책은 노동운동을 민주당에 복속시킴으로서 사회당의 지지기반을 파괴했으며, 1940년대 말~1950년대의 매카시즘은 급진좌파 (공산당 등)를 전멸시켰습니다. 베트남 침략 반대 운동의 질풍노도 속에서는 좌파적인 사회운동은 재등장됐지만, 정치세력화되지 못하고 결국 쇠퇴됐으며, 그 잔존 세력은 “학계 좌파”로 간신히 연명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 “학계 좌파”는 실질적인 반자본 민중운동과의 유기적 연결 없이 결국 “담론연구”에 빠져 현실과의 접점을 잃었으며, 궁극적으로 1990년대에 포스트주의의 파도에 휩쓸려 계급투쟁의 지향성 자체를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미국의 좌파를 촘스키 선생과 같은 자유주의적/아나키스트적 비판자들이 대표하는데, 급진사회주의 (볼셰비키 등)를 “전체주의”라고 비난할 만큼 급진성이 결여된 촘스키마저도 미국 국내보다 국외에서 오히려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참, 역시 여담이지만, 저는 텍사스주립대의 서점에서 제가 꽤나 좋아하는 촘스키 책이 있는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그 대학에는 아예 교내 서점 자체가 없더랍니다. 교내 군 모병 센터야 물론 있지만요…

미군 모병 과정의 한 장면

미군 모병 과정의 한 장면

재미있는 부분입니다만, 좌파/실질적 반자본 반대파가 없는 세계체제의 유일한 초강대국/패권국가인 미국은, 세계체제의 낙오자인 북조선과 어떤 의미에서는 유사성을 보입니다. 미국처럼 북조선에서도 체제에 대한 반대세력의 정치적인 결집이 불가능하니까요.

북조선 같으면 이와 같은 구조는 장기간의 대미(對美) 비대칭적 대립 속에서 공고화됐는데, 미국 같은 경우에는 초강대국과 그 자본이 일부 반대자 (공산주의자나 전투적 흑인해방투쟁 운동가 등)를 궤멸시키고 일부 반대자(상당수의 노동운동가나 학자 등)를 체제에 흡수시킬 수 있는 여력을 충분히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조선 체제만큼, “무(無)좌파적” 미국체제도 공고합니다. 세계대공황은 이미 5년째인데 미국에서는 “점령하라!”운동과 같은 즉흥적인 분노 분출은 있어도 민주/공화당 양당 독점체제를 도전할 수 있는 그 어떤 급진적 정치세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체제인 셈이죠.

이 체제는 지난 70-80년 동안 굳어졌으며,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좌파 사회”인 미국이 (반대파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점부터 간파해야 할 것 같고, 비민주적인 자본독재의 사회인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셈입니다. 예컨대 미국 학계가 낳은 개념적 기본틀을 접할 때 이 접근법들이 사실상의 독재사회에서 생산되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일단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관찰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듯합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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