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답하라 1994 : 나와 당신의 과거
    [TV 디벼보기]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2013년 11월 07일 04: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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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은 추억이 된다. 기억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자체 뽀샵을 거쳐 흑역사는 풋풋한 청춘의 치기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과거에 잘나가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반짝반짝했던 청춘은 있고, 누구나 자신의 청춘은 아름다웠노라고 말한다. 허지웅이 말했다. “모두에게 젊은 날은 있었고 대부분 주관적으로 애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걸 신화화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은 꼰대가 된다.”

    응답하라__1

    응답하라 1994

    그땐 그랬다. 서태지가 있었고, 농구가 있었다. 삐삐 인사말을 녹음하고, 공중전화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 그때 우린 지금 보다 어렸고, 처음으로 사랑을 했는지도 모른다. 10년 째 바닥을 기던 야구팀이 그때는 잘 나갔다. 기아타이거즈가 아니라 해태 타이거즈 였다. 대학의 공기는 자유를 선사하기도 했다. 감시하는 어른 없이 처음으로 강촌으로 외박을 허가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던 시간이었다. 강촌, 청량리역, 입석 열차는 그 이름만으로도 청춘이었다.

    응답하라. 우리의 호시절.

    진보가 지리멸렬해질수록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때가 호시절이었지.’ 그랬다. 2000년 창당, 2002년 지방선거, 그리고 2004년 국회의원 10명. 한양빌딩의 4층과 5층, 그리고 7층의 일부를 쓰던 그 시절은 진보정치의 호시절이었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꼴랑 열 명의 국회의원들의 옷차림이나 언행이 종종 언론에 나기도 했다. 그 어느 당보다 많은 정책 연구 집단을 가졌으며, 사람들은 우리의 꿈같은 이야기에 기특해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새세상을 꿈꾸는 자가 새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당가에 뿌듯해 하며, 조직이 가진 형식적 민주주의와 낭만주의에 스스로 도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내게도 유물처럼 서랍 구석에 한양빌딩 당사의 출입증이 남아있다. 민주노동당의 CI가 선명한 그 주황색 출입증은 한 시대의 흔적처럼 남았고, 그때 나의 동지들을 각기 다른 깃발을 들고 뿔뿔이 흩어졌거나 이곳을 떠났다. 서로 각기 다른 정치적 입장을 따라 각기 다른 당을 선택했고, 선배들은 공부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돈을 벌꺼라고 했다.

    요절하지 못해, 시를 쓰는 밤.

    당적이 수년 사이 수 번 바뀌는 동안 나는 적지 않는 상처를 입었다. 어떤 선배는 나의 인사조차 받지도 않았으며, 생전 처음 보는 누군가는 당원의 이름으로 나를 처단하겠다고 했으며, 온라인상에서는 내가 어떤 정치인의 뒤나 닦는 인간이 되어 있기도 했다. 몇몇의 온라인 친구가 끊겼으며, 공적이든 사적이든 자리에서 만나면 흘끔흘끔 쳐다보기도 했고, 혀밑에 도끼를 품고 살기도 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으리라. 그럴 때 마다 문득문득 나는 왜 이곳에 비루한 깃발 아래 남아있는 걸까. 왜 떠나지 못했으며, 무슨 미련이 남아있는 걸까.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도, 빛나는 아이디어를 가진 것도, 대단히 훌륭한 정치적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닌, 그렇다고 그다지 이 동네에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은 나는 왜 아직도 여기에 남아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에 시달렸다.

    요절하지 못했으므로
    계속 쓰는 겨울밤
    시인에게 이만한 형벌이 없다 -류시화,

    시인은 요절하지 못해 쓰는 것이 형벌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곳을 떠나지 못해 계속 남아있는 것이 형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난 겨울 내내 나를 지배했던 생각이었다. 새로운 깃발과 새로운 가치를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게 만났다. 하지만 나는 숱한 상처와 소금 속에서 너덜너덜해져버렸다. 아마도 나를 욕했던, 나의 길을 손가락질 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내가 과연 이곳을 떠날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생계를 이곳에 의탁했던 것 외에 떠나지 못했던, 이 길을 선택했던 어떤 다른 이유가 없었던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회의로 바뀌어 갔다. 진작에 ‘경력 세탁’을 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는 이들을 보며 나는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응답하라. 2014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의 이 시간에 먼지가 좀 더 앉게 되면, 이 시간도 뽀얗게 기억할 수 있을까. 혹은 그때가 좋았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비루하고 남루하나마 이 공간 언저리에 아직도 어슬렁거리는 것이 과연 ‘괜찮았어, 나쁘지 않았어’라고 기억할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미치도록 궁금하다. 물론 이 질문은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겠지만 매일매일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고, 어떤 형태로 남게 될까’라는 질문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 시간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요즘 절박하게 외치고 싶다. ‘응답하라. 나의 미래’ 이 시간은 아무 의미 없는, 그저 그랬던, 혹은 잊고 싶은 30대 마지막의 언저리 쯤 되지 않을까 스멀스멀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나뿐일까.

    스무 살, 그때가 과연 정말 좋았을까. 부끄러운 기억과 감추고 싶은 기억들은 적당히 흐릿해지고 달콤한 시간만 남은 것은 아니었을까. 정말 한양빌딩 시절이 우리의 호시절이었을까. 우리의 청춘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이미 지나 버린 걸까. 나정이의 남편이 칠봉이든 쓰레기든 중요한 것은 그때 우리는 사랑을 했고, 설렜으며, 두근거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94년에도 13년에도 함께라는 것이다. 각기 다른 공간에서 각기 다른 꿈을 꾸고 있어도 우리는 때론 몽상에 가까운 꿈을 꾸었고, 지금도 꾸고 있다.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에 대한 지독한 회의와 체념은 나아진 것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부질없는 희망 같은 건 한번쯤 가져보고 싶다. 우리의 호시절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 모른다고.

    내 인생의 르네상스

    로저 젤라즈니 소설의 한 구절은 한때 지독하게 우울했던 나의 이십대 내내 붙잡고 있던 문구였다.

    “내 과거는 죽었지만, 혹시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에서 더 좋은 시절이, 앞으로 그 세계의 역사에 기록될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의 황금시대는 이곳이 아니라 하나 앞의 세계에 가로누워 있고, 또 이곳에서 내가 암흑시대와 고투하고 있을 때, 단 한 장의 티켓, 단 한 장의 비자, 단 한 장의 일기장 너머에 나 자신의 르네상스가 기다리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필자소개
    [체르노빌 후쿠시마 한국]의 저자, 은근 공돌 덕후 기질의 AB형 사회부적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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