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범죄 급증 이유
사회적 절망과 분노의 투영
[프로파일러의 범죄이야기] 범죄율, 가족범죄, 빨갱이 사냥, 소수자 공격
    2013년 11월 07일 02: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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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 나오는 아동학대 뉴스는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엊그제 울산에서 8살 여자아이가 계모에게 갈비뼈 16개가 부러지도록 폭행을 당한 후 욕조에서 숨을 못 쉬고 죽었다. 그 이전에도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엉덩이 근육이 없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맞아왔다고 한다.

또 한 달 전에는 친부에게 골프채로 맞아 죽은 아이도 있고, 몇 달 전에는 일산에서 세 자매를 굶어 죽을 때까지 학대한 계모의 이야기도 있다. 더군다나 어제부터 아동학대에 엄격한 미국에서도 친부와 계모가 의붓딸을 학대하고 죽여서 쓰레기통에 버린 사건도 보도되고 있다.

노인 학대는 또 어떠한가? 한 해 자식들에게 학대당하고 버려지는 노인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배우자 학대는 또 어떠한가? 이는 다른 것을 떠나 한국의 경이적인 이혼율과 광범위한 싱글턴 현상으로 방증되지 않는가?

보통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대중들의 반응은 거의 유사하다. “어떤 미친 *이 어린 아이(노인, 배우자)를 저렇게 죽도록 때리고 학대했을까?”, “그래 계부, 계모니까, 그랬겠지. 그래도 애들이 무슨 죄라고, 쯧쯧!!!” 분노하고, 비난하고, 피해자 아이를 불쌍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게 전부이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조금 더 나아가서, 왜 가족폭력(아동학대)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하면서 가족이나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게 전부이다.

가정폭력이 의심되는 경우 공권력을 개입시키라는 여론에 떠밀려 내부규정을 바꾼 경찰도 실제 현장에서는 ‘남의 가족 일’에 개입하기를 주저한다.

아동

그리고 언론은 시청률이 떨어지거나 정부 여당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릴 때마다 연쇄성 잔혹범죄, 성 학대범죄, 잔인한 가족학대 범죄 이야기를 보따리채로 바리바리를 풀어 놓기 바쁘고 여기에 더해 자칭 가족범죄 전문가라는 사이비(관변 기생)학자들은, 사건의 본질은 외면한 채 피해자들의 눈물과 아픔을 이용해 소셜-폴리페서로 자신을 홍보하기에 바쁘다. 가관이고 혹세무민의 극치이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왜 이토록 잔혹한 학대가 일어났을까요? 가족인데……, 아무리 의붓자식이라도 그래도 자식인데…….”, “자기 아내(남편)인데…….”, “자기 부모인데…….”

그런데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별 고민 없이 대답한다. 단답형으로, “가족이니까!”

사람들은 가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환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인류의 역사와 사회에서 주류 담론의 형성은,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중심이었으니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말할 수 있듯이 환상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하는 말은 사실 가족에 대한 진실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가족이 그 대표적인 대상이다.

가족은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기초적인 틀로 인식되어, 오히려 가족에 대해서 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터부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는 인류사를 관통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가 내재한다. 과거 전근대사회에도 그랬을까? 아니 맥락이 다를 것이다.

서구문명의 기초 중에 하나가 되는, 로마시대 전후를 통해 보면 가족(familie)은 노예집단을 의미했다. 이는 사회의 기본적인 생산구조로 보면 이해가 된다. 제국이나 왕국, 봉건 제후집단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구성요소인 신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민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민의 자본주의적 형태가 바로 핵가족 개념이다. 그렇기에 가부장제는 인류사를 관통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인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결국 가족은 공적 영역에서 소외되었던 것이고 이는 외형적으로는 국가의 확장과 맥을 같이 한다.

이는 동양문명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양에서 오히려 봉건적인 가족형태/관념이 정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환된 것을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을 통해 지배하는 방식은 매우 고전적이고 매우 유용한 지배 방식이다.

따라서 가족(관념, 행동, 구조 등)에는 지배와 피지배를 구성하는 엄연한 논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인류사회에서 가족은 있는 그대로 가족이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구성되어야 하는 어떤 것, 진행형이다. 즉 이상적인 가족제도라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하는 주장 자체가 정치적인 데마고그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사람은 다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이다. 이것은 살아남은 자, 말할 수 있는 자의 말이기에 이미 (소외되어 말을 잃고 사회적으로) 죽은 자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 암묵적으로 간과하는 매우 정치적인 선동이다.

가족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것의 반영이다. 국가가 축소되면 미성숙한 사회로 가지 못하므로 다시 가족으로 간다. 가족이 확대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에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행동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뚜렷하다. 기승전결, 원인과 결과라고 해도 좋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이는 맞는 아이가 맞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으로 절대 오해마시길, 나는 여기에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가치를 판단하는 차원은 아니다.) 가족 폭력의 원인은 말 그대로 어떤 것에 대한 ‘분노’가 원인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그 주체가 가지는 한계상황에 기인한다. 그럼 왜 한계 상황에 직면했을까?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국가와 가족은 생산구조의 틀 내에서 적절한 분업이 이루어진다. 즉 가족에서 하는 일과 국가에서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구분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점차 국가영역은 확대되고 더 나아가 그 중 일부는 사회로 분담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발전적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양한 요인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고 변화 자체가 불균등하다는 것이고 이 의미는 무엇인가 부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국가영역이라고 사회적으로 규정된 일은 국가가 해야 하는데 문제는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것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 즉 주로 가족의 몫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문제는 가족에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원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원이 있었다면 국가가 했겠지. 그것이 바로 지배전략이다.

지배의 손쉽고도 가장 고전적인 방법 중 하나는 도전적인 적대세력들을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자원도 절약하고 적대세력도 제거하는 일석이조의 전략이다. 그것도 보이지 않는 적을 만들어서 결국 스스로를 공격하는 방법, 그때 인간은 한계상황에 부딪치고 그것이 분노가 되고 그 분노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손쉽고 가까이 있는 상대를 향하게 된다. 그게 ‘가족폭력’이다. 결국 승리자는 가해자가 아니다. 승리자는 지배자이다.

국가에 있어서 자원접근에 대한 불균형도가 높을 때, 이른바 양극화될 때 대다수 사람들의 절망감은 높아진다. 그 절망감은 분노로 바뀌고 공격성이 높지만 그 분노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 분노가 지배층과 그 구조를 향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배층과 지배구조는 다양한 방식을 써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물타기를 한다.

문제는 그 때 어느 대상이든 분노를 쏟아 부어야 하는 대상이 필요로 하다는 것이다. 나치가 유대인과 집시를 공격했다면, 이슬람국가에서 여성을 공격했다면, 미국에서 유색인종을 공격했다면, 한국은 전통적으로 빨갱이에게 그 분노를 전가했고 또한 더 깊게는 성적 소수자인 여성을, 그리고 본질적으로 가족과 그 가족의 구성원을 공격하게 된다.

사회통제와 범죄율, 그리고 가족범죄

가족 범죄(아동/노인/배우자 학대, 가족살인 등)는 가족 내 갈등, 스트레스와 관련된다.

지난 11월 3일 뉴욕시 경찰국은, 올해 들어 10월 말까지 뉴욕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 27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64건)에 비해 23%가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올해는 대략 334건 정도, 이는 1956년 이래 살인사건이 가장 적은 기록(뉴욕 인구 10만 명당 2.9건)이고, FBI가 작년 미국 74대 도시(인구 25만 명 이상)를 대상으로 집계한 통계를 기준으로 할 때 전국에서 4번째로 적은 것이다.

참고로 뉴욕에서 살인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 해는 1990년 2,245건이었다.(디트로이트(만만명당 54건), 뉴올리언스(53건), 세인트루이스(35건), 볼티모어(34건), 뉴어크(34건), 시카고(18.5건) 등은 가장 ‘위험한 도시’)

이에 대해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위헌과 인종차별 등의 논란에도 지속되는 불심검문(Stop and Frisk) 관행을 안전 도시로 이끄는 가장 큰 요인으로 언급했다. 결국 강력한 사회통제가 범죄를 낮추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글쎄 그럴까? 본질적인 요인이 제거가 되지 않았는데 범죄가 단순히 낮아졌을까?

미국 뉴욕의 범죄자 체포 모습

미국 뉴욕의 범죄자 체포 모습

범죄와 빈곤, 경제적인 여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다수의 미국 범죄학자들(프레트, 로웬캄프, 조, 제이콥스, 에를리히, 스트렛스키, 거(Gurr), 캔터, 랜드 등등)에 의하면, 경제적인 여건이 나빠지고, 실업률이 높아진다고 범죄가 늘어난다는 생각은, 일반 대중에게 잘못 알려진 오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례나 연구결과도 없지 않지만 이를 반박할 정반대의 사례나 연구결과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오해를 극복하고 정확한 사실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논리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을 빈곤요인 혹은 경제요인이라고 본다면 이런 요인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양한 경로를 가질 것이다.

인간에게 빈곤은 사회적 활동 공간을 줄어들게 한다.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 감소하면 결국 그 활동은 대체재를 찾게 되는 그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공간이다. 즉 외부 활동이 감소하는 대신 내부 활동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가족이라는 공간은 해당 가족이 가지는 자원에 비례해서 커지고 작아진다. 말 그대로 외부공간에서 배척되어 내부로 밀려온 경우 자연히 가족 공간도 클 수 없다. 결국 가족 공간 내부로 활동 영역이 제한되고 그 속에서 다양한 갈등이 증폭된다. 그것이 가족 갈등의 원인이고 가족 내 범죄의 증가로 귀결된다.

근본적인 갈등요인의 제거 없이 이뤄지는 사회통제는 풍선효과만을 양산한다. 가족 내보다는 거리에서 방황하던 갈등유발자들이 거리에서 축출된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게토? 아니다. 그들은 가정으로 일시 돌아온다.

미국에서 감소추세를 보이던 가족범죄가 늘어난 것이 우연이겠는가? 왜 그토록 미국 정치인들이 가족의 가치를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겠는가? 스스로 서로와 서로 증오하고 갈등하고 죽고 죽이게 만드는 가장 손쉬운 지배전략이다. 물론 그들을 다시 거리로 내보내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풍선효과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가족범죄가 없는 안전한 사회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음 회에 계속)

필자소개
배상훈
2000년대 중후반 경찰청 범죄심리수사관(프로파일러)과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팀(프로파일링 부서) 재직했다. 현재는 서울디지털대학 경찰학과 교수이며, 국립중앙경찰학교 (수사) 프로파일링 과목 담당 외래교수이다.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진보정치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임상병리사와 사회복지사를 거쳐 프로파일러의 삶을 살아온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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