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통일의 모습을 보며
    [파독광부 50년사] "내 조국은 언제 통일이 된다는 말인가"
        2013년 10월 29일 01:54 오후

    Print Friendly

    1989년 11월 9일 초저녁. 한 사오십명 되는 독일인들과 함께 나는 우리 동네에 있는 조그만 비석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 비석이 서 있는 자리에 1938년 11월 9일까지 유대인들의 예배당이 있었다.

    1938년 11월 7일 헤르쉘 그륀츠판(Herschel Grynszpan)이 파리에서 독일대사의 비서 폼라트(E. vom Rath)를 쏘아 죽이자 그 당시 나치정권의 선전장관 요셉 괴벨스(J. Goebbels)는 이 사건을 이유로 <자발시위>라는 가명 아래 나치당원을 자극시켜 11월 9일 밤 독일전국에 걸친 유대인의 교회, 공동묘지, 가옥과 상점을 파괴하며 유대인 박해 학살운동을 벌였다. 이날 밤에 거의 모든 유대인의 예배당은 불태워졌고 7000여 개의 유대인의 상점이 파괴되었으며 91명의 유대인이 생명을 잃었다. 이러한 만행으로 인해서 생긴 피해 책임은 또 유대인 자신들이 져야했으며 삼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체포 구금되었다.

    이 밤을 <크리스털의 밤>이라고 불렀다. 타오르는 불길에 깨어지는 유리창들이 수정처럼 번쩍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했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유대인 예배당도 예외 없이 불길의 밥이 되고 말았다.

    불탄 예배당이 서 있었던 그 자리에 세워진 비석이 지난날의 참상을 상기시키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비석의 뒤쪽에는 그 당시 교회가 불에 탈 때 교회로 연결된 모든 길은 나치당원들에 의해 차단되었고 소방대의 차가 대기해 있었으나, 그것은 불타는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교회를 태우는 불이 독일인이 사는 옆집에 건너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살았던(살고 있는?) 동네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이 땅 위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짐하기 위해서 뜻 있는 소수의 독일인들과 함께 나는 그때의 일과 희생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 오니 TV에서는 굉장한 뉴스를 방영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의 장벽이 터졌다.

    독일통일

    동서 독일을 가르는 장벽을 허무는 모습(사진은 통일부 블로그)

    장벽 속에 갇혀있던 동독사람들이 터진 둑을 밀어제치며 흘러나오는 물처럼 끊임없이 장벽의 틈을 부비고 자유의 세계로 밀려 들어왔다. 장벽의 이쪽과 저쪽에서는 기쁨에 가득 찬 아우성이 깊은 밤하늘에 메아리되어 퍼져 울리고 있었다. 생전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부둥켜안고선 행복에 벅찬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워 장벽 사이를 부비고 서독으로 발을 디딘 한 젊은이는 두 팔을 하늘로 치켜 올리면서 기쁨에 못 이겨 어린아이처럼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9일.

    끝내 동독 독재자의 때는 종말을 고했고, 자유를 찾던 수많은 젊은 생명을 잃게 만들었던 장벽은 무너졌다. 원한에 서리고 피에 젖었던 그 장벽이 무너지는 날, 동서의 국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것을 보며 나도 기쁨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또 우리의 장벽 삼팔선은 언제 무너지느냐고 하늘을 향하고 물어보았다.

    1년 후,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하는 날. 독일은 또다시 기쁨으로 가득찼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통일을 맞는 기쁨의 날이요 즐거움의 날이었다.

    나는 독일을 부러워하면서 함께 기뻐했다. 고속도로를 가다가 동독의 2기통짜리 트라비(Trabbi) 차를 만나면 나도 반가워서 빵빵하면서 크랙슨을 눌렀다. 같은 운명으로 나라와 국민이 절단되고 갈라졌던 국가 중에는 다만 한국만 남았다. 월남 월북이 통일이 되었고 남북의 예멘이 무혈로 합쳐졌으며 이제는 동서 독일이 피흘림 없이 통일을 기뻐하고 있다.

    그런데 내 조국은 언제 통일이 된다는 말인가?

    입으로는 통일 통일하면서도 실제로는 남북 서로가 제가 잡은 정권을 확보시키기 위해 동족을 원수와 악마로 이름 붙여 민주인사를 제거하는 구실로 사용할 줄은 알았지만, 그 울타리를 헐고 한 집이 될 생각은 실제로 하지 않고 있다.

    언제 내 평생에 이북에 갈 기회가 있을까?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백두산에 올랐다가 두만강을 따라 동해로 가서 해변을 끼고 청진, 함흥, 원산, 금강산을 구경하고 삼팔선을 따라 개성, 해주를 거쳐서 대동강, 청천강을 건너고 싶다. 평양의 모란봉도 구경하고 깊은 함경도 산골의 강냉이죽도 먹고 싶다.

    독일 내 주위에도 이북에 갔다 온 교포들이 많아졌다. 누가 나에게 그렇게 이북에 가고 싶다면서 왜 이북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북에 가서 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때 이북에 가겠다” 했다. 보여주는 것을 보는 것은 전시장이나 박물관으로밖에 더 생각할 수 없다. 정해주는 호텔에서 자야 하고 태워주는 차에 올라타서 보여주는 것을 보아야 하는 그런 곳은 나는 싫다. 가다가 저물면 어느 민가나 여관에 가서 자고 싶고, 걷다가 배가 고프면 발걸음을 멈추고 주막으로 들어가 그 고장의 별미를 먹고 싶다.

    비록 이북에는 갈 마음이 없어도 이제는 통일된 독일의 동쪽 지방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독일 북쪽의 로스토크에서 남쪽의 드레스덴까지 한번 돌았다. 이러한 여행을 하면서 나는 도시와 그 도시의 건물들의 외모에서 나타나는 빈부의 차이를 느꼈다. 서독의 집은 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것 같이 색칠이 곱게 되어 깨끗하고 부유하게 보이는데 비하여 동독의 집은 양지(陽地)에 앉아서 추위에 떨고 있는 늙은이의 모습처럼 초라했다.

    외면으로 보이는 동서 체제의 차이를 보면서 그래도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제일 잘 살았다는 동독이 이렇게 초라하게 보인다면, 수해와 흉년으로 인해서 수많은 생명을 잃어야 했던 북한의 집들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1990년 내 나이 50세

    1990년은 나 개인에게도 의미 있는 해였다. 이 해는 나의 회사근무 25주년을 맞는 기념의 해였고, 독일인들이 한국의 환갑처럼 크게 지내는 내가 50세가 되는 해였다.

    회사에서 나의 25주년 기념을 위해 크게 잔치를 해 주었다. 그날에도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 없이 아침 브리핑에 들어갔는데,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는지 예외적으로 사장이 세계지도가 투영된 화면 앞에 서서 회의를 진행했다. 앞에 투영된 세계지도가 점점 픽업되면서 아세아⇒ 한국⇒ 부산 그리고 맨 마지막에 영도가 크게 화면에 비취면서 동삼동 웃서발이 나타났다.

    사장은 여기 태평양 변두리의 한 조그만 어촌에서 태어난 이정의가 일본과 알라스카를 거쳐서 북극을 지나 독일의 루르지방에 있는 겔센키륵헨에 오게 되었다고 소개하고는, 내가 25년 전에 독일은 부자나라로서 곳곳에 골프장과 잔디밭이 있는 줄 알았다가 그 골프장이 보리밭이라는 것을 알고는 독일에 대한 첫 실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며, 이제는 진짜 골프장에서 즐기도록 이사진에서 골프채 한 세트를 선물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억지춘향식으로 골프를 배우게 되었다.

    50세 생일에는 집에서 잔치를 준비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생일잔치에 누구를 공식적으로 초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날은 결근해서 집에서 머물며 으레 축하객이 오리라고 단정하고 손님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해 두었다. 열한 시부터 손님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사장과 이사진 그리고 사원들이 둘러갔고 대학 동창들은 오후 늦게 부인들과 함께 와서 밤이 늦어서야 돌아갔다. 일부러 생일잔치에 오라고 초청하지 않아도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 서로 연락이 되어 축하객으로 밀려드는 정성이 반가웠다.

    이렇게 해서 개인적으로 직업상 중요한 날들을 맞았고 보냈는데, 특별히 내 생일에는 그동안 회사에서 아주 친하게 지나던 한 동료가 없어서 섭섭했다.

    그 친구는 지금은 소련의 영토인 옛 독일의 동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카리린그라드)에서 1940년 6월 27일 나와 같은 날에 아주 가난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서 고아처럼 자라났다. 아버지는 전사했고 어머니는 전쟁이 끝난 후 넷 아들을 거느리고 소련에 의한 독일인 강제추방으로 인하여 독일로 향한 추방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이때 전 동유럽에서 추방된 독일인은 천육백만이라고 했다.

    아이들 등에 지웠던 양식이 절단나자 그의 식구는 들에 추수 후에 남아 있는 붉은 사탕무의 잎사귀를 씹으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지친 걸음을 계속했다. 폴란드와 독일 국경 가까이까지 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배고픔에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을 차마 볼 수 없어 아이들이 근처 농가에 먹을 것을 구걸하러 간 동안 다섯 살짜리 막내아들인 그만 데리고 도망하다시피 피난길을 계속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구걸해서 가져온 것을 자기와 막내아이가 함께 먹음으로서 아이들을 더 배고프게 만든다고 여겼고 또 그의 형들은 일곱, 아홉, 열두 살로 어머니가 없어도 농가에서 잔일을 하면서 밥은 얻어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형제를 모두 잃게 되었는데 국제 적십자를 통해 육년 전에 그의 둘째 형을 찾았으나 다른 두 형제의 생사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와 어머니는 계속 서쪽으로 길을 계속했다. 어느 날 소와 말의 사료 지푸라기를 넣어두는 빈 창고에서 밤을 새우는데 갑자기 총을 멘 사람 두 명이 들어왔다. 패잔병을 수색하던 폴란드 군인들이었다. 아이 하나만 딸린 젊은 여인을 발견한 그들은 그의 어머니를 강간했다.

    그 이튿날 날이 밝자 군인들이 피난 가는 수레를 세우고 그를 실어 보내면서 그의 어머니는 계속 잡아두었다. 다음 동네에서 수레가 서 있는 동안 그는 수레에서 뛰어내려 그의 어머니가 남아있던 약 6km 먼 곳을 향하여 다시 돌아갔다. 오후 늦게 지난밤에 자던 창고에 와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의 어머니는 지푸라기에 덮여 누워있더라고 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 엄마하고 부르며 어머니를 흔들었다. 그러나 대답이 없더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랫도리를 벌거벗긴 채 죽어 있었다. 지나가던 피난민들이 그의 울음소리를 듣고 불쌍하게 여겨 그를 데리고 계속 서쪽을 향하여 갔다.

    1945년 늦가을에 그는 남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어느 농가에서 머슴으로 붙어있게 되었다. 그가 열넷 살이 되었을 때 머슴이라는 종살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광부로 자진해서 루르지방으로 왔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배워서 두개의 항을 감독하는 이사에 승진했다. 그는 정직해서 사심이 없었다. 우리 둘은 아주 친해졌고 금년 50세 생일은 함께 잔치를 하기로 결정하고 큰 식장을 예약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지하에서 숨을 거두었고 저 세상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나는 도저히 식장에서 잔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자꾸만 그의 생각으로 인하여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예약을 취소하고 집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손님이 오고가던 하루 종일 나는 그를 잊지 못하고 서러워했다. <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