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개혁적 정치관료'에 불과한가
    [진보정치 현장] 의회 내 활동과 의회 밖 활동의 유기적 연계라는 숙제
        2013년 10월 29일 09: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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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선거가 가까워지면서 타지역 강연 일정이 잡히기 시작했다. 홍성YMCA 의정지기단 교육을 다녀왔고, 최근에는 녹색당 선거연수에서 선거전략에 관한 강연을 맡았다. 진주의 시민정치조직인 ‘진주같이’도 만났다.

    홍성Y의 의정지기단은 이미 행정사무감사를 모니터링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노동당, 녹색당의 당원과 이에 근접해 있는 무정파 시민들이 모인 ‘진주같이’는 주민정당의 한 맹아로 꼽기에 손색이 없었다. 녹색당 연수에서 참가한 한 당원이 지역정치전략에 관해 묻길래 나는 그분에게 “본인이 속해 계시는 ‘진주같이’를 오히려 모범사례로 소개시켜달라”고 답하기도 했다.

    타지역에서의 면담이나 강연은 만나는 사람 서로에게 힘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정작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나의 활동이나 지방의회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나는 훌륭한 정치인도 아니고 스스로에 대한 회의에 젖어 있는 활동가일 뿐이다. 다만 지역특성상 나와 같은 포지션에서 의정활동을 수행한 정치인은 이전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모범교재는 아니어도 사례연구의 대상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질이나 의심을 받아도 좋다. 그러나 이 지역의 내 주변에서 내게 묻고 뜯어보는 사람은 드물다.

    김수민

    ‘진주같이’ 강의 장면

    지방선거 결과로 처음 의회에 진출했을 때 혹자는 “원내활동에 시민사회 역량이 몰입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의회주의’의 뜻은 여러 갈래로 갈라질 수도 있고 그에 따라 긍정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는 문제이나,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이 의회활동으로 수렴되는 것은 진보적인 세력일수록 방지해야 할 현상이다. 나도 그것을 가장 경계했다.

    문제는 그러나 정반대 지점에서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의회라는 섬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이주민도 개척자도 아닌 표류자에 가까웠다. 물론 초반에 의외로 순조로운 모습을 보였다. 어린이 무상예방접종, 주민참여예산제 도입 등 주요 공약을 관철시키는가 하면, 낙동강변 난개발계획을 막아냈다. 조례 대표발의 건수도 의원 가운데 가장 많다. 운이 7할, 능력이 자란 것이 3할쯤 되었을까. 하지만 시민사회 역량의 강화와는 상당히 무관하게 흘러왔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나름대로 결집했던 모임들은 선거가 끝나자 지방정치에서 멀어져갔다. 그들이 갈망했던 건 직접적 정치참여와 사회경영의 기회라기보다는 ‘선거’였던 듯하다. 그 뒤에도 무르익으면 모이고 선거가 끝나면 흩어져갔다.

    나를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은 물길을 지방정치로 돌려놓지 못한 책임과 무능을 자책했다. 흩어진 사람도 남은 사람도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성급히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단 신기할 만큼 지역 의제에는 무관심한 현실은 현실대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모임의 시민은 “왜 자주 안 나오시냐”고 내게 가끔 묻는다. 차질 없이 자주 모이는 모임인데 거기 참석하는 분들은 그 모임에서 힘을 얻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 모임은 스트레스를 푸는 화목한 공간이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거꾸로 내가 자주 나가지 못하는 것은 가끔 거기서 힘이 빠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욕한다는 건 모임의 활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게 박근혜 욕, 이명박 욕, 새누리당 욕, 국정원 욕에서 맴도는 모임이 크게 재밌을 리는 없다. 그 모임의 성원들에게 내 관심사 혹은 나에게 초점을 맞춰달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이나마 지방정치를 논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고객’이 아닌 ‘시민’으로 지역사회에서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조차 불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싫으면 다른 지역 지방의원을 초빙해도 괜찮다.

    그동안 나는 의회 안에서의 고립된 실천을 떨치기 위해 거리로 나서거나 다른 단체의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학교무상급식, 단수피해 시민소송, 파출소 증설, 폐지설이 나돈 지역밴드 락 페스티벌의 개최, 골목길 불법주차를 예방하는 화물 공영주차장 청원 등 각종 서명운동은 지난 의정활동에서 매우 주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런 사안별 캠페인은 굵은 물줄기를 이루지 못하고 그것이 일단락되는 즉시 증발하고 말았다.

    올해 작정하고 아이쿱(ICOOP) 구미생협에는 감사로, 시민정치조직인 살구(살맛나는 구미)시민정치캠프에는 간사격으로 참여했지만, 결국에는 의정 일정에 치이고 말았다. 소수 인원이지만 그럭저럭 활기를 띠던 ‘정치와 책읽기’ 같은 모임도 내가 제대로 챙길 수 없는 시기가 되면 열리지 못한다. 녹색당 당원모임도 마찬가지다. 조직들에 제안할 만한 것들을 준비해도 이행하지 못하거나 말도 못 꺼낼 때도 많다. 제안을 해도 거기서 끝나던 경험도 한몫하고, 아예 스스로가 먼저 ‘조직 역량이 안 된다’고 거두어들일 때도 있다.

    이런 과정이 거듭될 때 정치인이 택하는 경로는 결국 사적 인맥, 친목조직이다. 한마디로 일단 자기 표를 챙기는 활동으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아마 공직자를 보유하고 있는 지역의 정당조직, 정치모임은 대부분 새로운 선수를 내세우는 데 곤란을 겪을 것이다. 단체가 얻어가는 정치적 호응을 특정인물의 인기가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이 별로 인기 없고 사적 인맥이 두텁지 못한 정치인마저도 그런 상황에 처한다.

    요즘은 내가 재선을 하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지난 지방선거보다 더 많은 진보적 의원이 구미시의회에 입성하든 그것이 과연 무슨 큰 의미를 띠는지 고민이 깊다.

    선거 한 번 잘 치러 얻은 의회권력을 가지고 제도권 내에 갇혀 묵묵히 이행할 뿐인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관료, 잘해야 (진보적도 아닌) ‘개혁적 정치관료’에 불과하다. 지금 내가 바로 그렇다.

    며칠 전 어느 날 어느 집에서 열린 모임에 초청받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근사한 양주도 나왔다. 멋도 모르고 초반에 빨리 마셔서 페이스를 조절하려고 하는데, 조금 떨어져 있던 일행이 자꾸 ‘원 샷’을 권했다. 남 모르게 홀로 기분이 나빠졌다. 그 바로 몇 시간 전 송전탑반대운동을 펼치려던 주민들 중 한 분이 “며칠 전에 한전이랑 합의 봤다. 알린다는 게 좀 늦었네. 미안하네”라고 ‘통보’가 와 ‘멘붕’에 빠진 상태였다.

    그 밖에도 생활쓰레기 수거 사영화 등 각종 문제가 닥쳐 한창 외롭게 싸우던 나날이다. ‘왜 이 잔들이 끊임없이 내게 권해지는가. 독박 쓰듯 속으로 연신 들이켜야 하는가. 기분 좋게 취하든 아니면 필름이 끊어지든 그 어느 쪽이든 왜 내게 잔이 집중되는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답답함에 가슴을 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구미 지역 진보진영은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미 또는 미리 패배하고 있다. 어떤 분들이 꿈꾸듯 내년에 선거구별로 한 명꼴로, 전체 의석 중 1/3의 당선자가 배출되어도 나는 하나도 낙관적인 전망을 해줄 수 없다. 빠르게 고갈되는 시민적 역량만 현장에서 느끼게 될 것이다.

    정치세력이나 정당, 정치인이 선거를 중시하지 않는 건 웃기는 현상이다. 반면, 그간의 무능과 미숙을 선거로 털고 가려는 마음가짐은 슬프디 슬픈 것이다.

    ‘시민사회의 잠재력은 큰데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그간의 자평을 뒤집어 엎고 ‘애초에 울궈 먹을 것이 없었고 내가 그걸 새로 만들지 못했다’는 반성으로 접어든다. 일단 모여 있는 대오에 중점을 둔 사고방식이 가장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세운 가장 중대한 목표는 내년 선거 승리가 아니라 ‘준-활동가’의 육성이다. 내가 만난 홍성 의정지기단 같은 분들 말이다. 진전해 나가는 것도 좋지만 순리에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나의 의회 입성은 시간을 거슬렀던 것이다.

    각자가 짬을 낸 시간을 두고 역할을 분담할 사람들이 나 같은 활동가들이 느낀 자괴감에 물을 주어 싹을 틔울 것이다. 사실 그동안 그러한 준활동가들을 몇몇 찾아냈다. 그들은 후퇴 없이 더디나마 자신의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고속성장이 아닌 불가역적인 변화를! 어쩌면 그간의 노력이 적지 않게 성공하고 있었을지도, 그 성공을 정리하고 간직하지 못해서 실패로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미 정치의 수구성, 보수성은 주민들의 의식 수준이나 흔히 회자되는 지역주의에 원인이 있지 않았다. 옛날은 몰라도 얼마 전부터는 그렇다. 분석하자면 ‘내인론’, ‘내 탓’ 밖에 없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진보가 참패한다면 주민들이 지방선거를 박근혜 정권 후원에 쓴 결과가 결코 아니다. 어차피 ‘자기 탓’이 더 크다면 환상을 빨리 버릴 수 있고, 목표도 분명해진다. 가슴을 친 이튿날, 또다시 질기디 질긴 싸움에 나선다.

    필자소개
    전 구미시의원. 스스로를 정당인보다는 사회운동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녹색당 소속. kimsoom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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