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차라리 ‘괴물’이 될까요?
    [영화와 세상] <화이>, ‘괴물’ 통해 ‘더 나쁜 괴물’ 저격하기
        2013년 10월 22일 10:50 오전

    Print Friendly

    * 홍명교씨가 앞으로 부정기적으로 영화 칼럼을 보내주기로 했다. 첫 글이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다. <편집자>
    ————————————–

    지난해 이즈음 남산예술극장에서 상연되었던 극단 그린피그의 연극 <싸이코패스-푸른수염이야기>는 제프리 다머라는 미국의 연쇄살인마와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을 버무려 만들어진 분열증적인 무대였다. 13개의 막이 비전형적인 방식으로 흘러가며 우리 시대의 싸이코패스적 온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연극은 연쇄살인마로 지목된 주인공 ‘명보’의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연쇄살인죄로 상징되는 잔혹성과 변태성을 조직폭력배, 검찰, 자본가, 정부의 홍보담당관 등으로 확장시킨다. 이를테면 싸이코패스는 강호순이나 유영철과 같은 ‘살인범’들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지배자들, 정치권력이 아니겠느냐고 도발적으로 되묻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다지 도발적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것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게 아닐까? 역시 싸이코패스적 인물, 즉 ‘괴물’이라 부를만한 주체들의 문제를 다룬 영화 <화이>의 문제적 인물 ‘화이'(여진구 분)는 대단히 파괴적인 방식으로 아버지, 또는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아빠, 왜 절 키우신거예요? 대답해주세요. 왜죠?” 그것은 그가 이미 트라우마를 넘어서 정신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만큼 실재에 직면했을 때의 질문이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언어화’시키지 않으면 새로이 직면한 세계를 견뎌낼 수 없기에 끊임없이 가짜 아버지 혹은 관객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이것은 영화를 보는 시선으로서의 감독 또는 관객이 스크린 안팎의 ‘세계’를 향해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괴물적인가, 왜 괴물이 되었는가. 우리는 응당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사태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태를 어떻게 대하는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화이에게 찾아온 이데올로기의 균열

    공포의 대상이자 규율의 준거로서의 다섯 아버지들은 화이에게는 하나의 사회이자 학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다. 화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도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게 편하다고 말하고 일정한 루트 안에서 생활하는 컬트적인 공동체의 사생아다. 그런데 이런 컬트적이라 할만한 재생산 구조에 ‘짝사랑’과 ‘과거’라는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화이의 파국적 질문에 대한 유사-아버지 석태(김윤석 분)의 답은 마주한 가짜 아들 ‘화이’와 자신이 동일하게 지녔(다고 생각했)던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모범답안이다. 그것이 경악스러울 만큼 반사회적이고 ‘괴물적인 것’일지언정 석태 나름대로는 하나의 정답임엔 틀림없다.

    그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랑'(?)을 다 하여 아들이 벌인 참극조차도 현실로 받아들이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곤 자신의 숨겨진 과거와 그 트라우마에 대해 낱낱이 고백한다. 괴물이 되니 괴물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는 독일 음울한 낭만주의 소설가인 E.T.A.호프만의 짧은 소설 <모래사나이> 속 화자인 ‘나’의 결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똑같이 괴물(모래사나이)을 보던 소설 속 주인공은 ‘괴물을 삼켜 괴물이 되어버’리는 대신 죽음을 택했다. 문제는 화이 역시 결코 석태(김윤석 분)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석태가 갖는 이런 인식은 사회의 보편적 규준 내에서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자신의 트라우마를 응시한 사람일지라도 사회적인 규율, 즉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윤리 통념을 벗어나는 ‘바깥’으로 ‘탈주’할 수 있는 미치광이는 거의 없다. 이데올로기는 탈주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순들 안에 머무르고 또 균열을 내며 응시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영화 '화이'의 한 장면

    영화 ‘화이’의 한 장면

    (위키백과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500만명(믿기지 않지만!)의 싸이코패스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중 99퍼센트 정도를 제외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몇 만 명이다. 사회구성원들의 분열증이 극심해지고 대안의 자리를 찾지 못할 때 사회는 파괴될 것이다. 헌데 이 광기의 시대를 사는 또 하나의 문제적 인간 석태는 살인마가 되는 것을 택했다. 사회적인 관계, 타인에 대한 태도를 정립할 기회와 가능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괴물과 사회

    사회적 현상을 가장 민감하게 드러내는 영화의 특성상 ‘괴물적 주체’는 최근 영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 괴물이 얼마나 잔혹한 존재인가에 대해 드러내어 그를 처벌 또는 공포의 대상으로 응시하거나(<악마를 보았다>, <추격자>, <이웃사람>), 괴물적 주체가 자아의 분열과 회한을 거쳐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숨바꼭질>)

    일련의 영화들 사이에서는 ‘괴물’이란 존재를 일망타진하여 처치할 대상으로 보거나, 괴물이 ‘괴물적 사회’가 낳은 문제적 주체라는 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현격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 어찌됐든 가장 위협적인 ‘타자’로 등장하는 괴물을 공포와 경계의 대상으로 보는 이상, 영화가 타자를 공포와 배제의 대상으로 보길 촉진하는 오늘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고, 그와는 다르게 괴물적 사회에서 불가피하고도 운명적으로 괴물성을 갖게된 비극적이고 불우한 주체로 그린다면 사회적 시선을 견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화이>는 그런 총체적 이해를 견지한 채로 괴물적 인물들에 대해 다루는 영화다. 괴물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싸이코패스, 혹은 강박증적 주체들이 가득한데, 화이의 다섯 아버지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선인의 상징인 이경영, 즉 화이의 진짜 아버지도 어떤 측면에서는 싸이코패스에 가깝다.

    그는 아내가 병에 걸려 시체처럼 하얘지는데도 ‘집’과 ‘기도’를 고집한다. 심지어 나중에야 밝혀지지만 어린 시절 다리가 잘리는 참극을 당했을때도 그런 상해를 입힌 친구를 위해 기도하다니! 그것이 진심일지언정 그런 자기-희생정신은 미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가 현 체제의 질서를 교란하고 전복시킨 ‘성공한 미치광이’라면, 이경영은 ‘패배한 미치광이’다.

    재개발 사업의 주체인 모 그룹의 회장 문성근도 싸이코패스다. 그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은 적을 만드는게 싫다고 말하면서 온갖 참극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그 밑의 행동대장이나, 나쁜 짓을 도맡아 하며 악의 무리들과 결탁한 형사 박용우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미치광이 뿐이다.

    이이제이?

    이런 미치광이들의 사회에서 화이가 문제적인 주체가 되는 것은 에필로그에 이르면서다. <화이>는 괴물을 잉태하는 사회의 괴물성에 대해 응시하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나 <숨바꼭질>에서처럼 구조적 모순의 끈을 놓치지 않다가 단 한번도 조우하지 않았던 두 주체를 마주치게 한다. 심지어 이 문제의 괴물 화이는 처절하고 비극적인 클라이막스 이후에도 ‘괴물’이기를 기각하지도 않은 듯하다. ‘괴물’로 하여금 괴물을 잉태한 사회, 그리고 그 사회의 맨 꼭대기 지배계급에 대한 ‘처벌’ 또는 ‘테러’를 실행케 하는 것이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다스림)’랄 수 있는 이 처벌은 분명 통쾌한 스펙타클을 선사한다. 또 이런 결론은 괴물과 그 괴물을 잉태한 괴물적 사회의 불협화음을 드러내는 것에서 끝나는 다른 영화들과 결을 달리한다.

    나는 화이가 선인의 길을 택했다고도 악인이 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존재할-수-없는-복수의-화신이 되었을 뿐이다. 이쯤되면 화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미 죽었고, 일종의 ‘복수-신’같은 것으로 거듭나서 이 답 없는 사회에 종언을 고한다.

    하기에 어떤 면에서는 확실히 그 에필로그가 저 모든 참극을 목격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으로 치닫는 과정에 대해 어떠한 설명,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 운명적으로 자신의 거울단계를 직시한 화이가 그런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원인까지 모조리 꿰뚫게 되었는가에 대해 드러내고 있지 않아서, 에필로그 자체가 감독의 판타지처럼 다가온다.

    장준환 감독은 우리 사회가 정말 밑도끝도 없고 대안도 없이 암울하다고 느끼고 있거나, 이런 상황에 대해 대리충족이라도 해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를테면 노동자 탄압과 온갖 죽음들의 근본적 원인제공자로 재벌 자본가 이모씨를 악마적 화신으로 지목하고, 이 비극들을 지켜본 이상 죽여버리지 않을 수 없기에, ‘걍 죽인다’, 뭐 이런거다. (누군들 안그렇겠냐마는,)

    그러나 어떻게 괴물이 더 나쁜 괴물을 겨누게 되었는지에 대해 드러내지 못하면 그 스나이핑은 실패나 마찬가지다. 관객의 무의식은 저 악의 뿌리인 자본의 수장에 대해 ‘아마도 실제론 죽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둘의 관계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응시가 이루어졌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를 다 찍고 편집해놓고 보니 너무 암담한 것 같아, 탄산음료 한 모금 대접하려고 갖다 붙인 것일 수도 있다.

    ‘파국’에 맞서 ‘파국’-되기

    누구나 한번쯤은 ‘내가 괴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인식은 인간을 히스테리증으로 이끄는데 이것은 트라우마,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맞닿아 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적당히 미치지 않을 정도로만 질문을 던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어느 정도의 신경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갈 곳이 없을 때 주체는 분열한다.

    화이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는 재개발 공사에 대한 항의 현수막이 내걸린 저 높은 공사 중 빌딩 위 어딘가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스나이퍼가 되었다. 그러나 체제의 구조적 변혁을 위해선 그런 복수심 가득한 싸이코패스 스나이퍼보다는 적당히 미친 사람들이 서로-관계를-맺으며-서로를-보호하고 집단적인 저항주체가 되고-또-되게하는게 낫지 않을까. 요즘 흔히 언급되는 ‘파국에 대한 응시’가 주체 스스로 파국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어선 곤란하지 않겠는가.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 회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