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여는 열쇠로서의 노동
[책소개] 『멍키스패너』(프레모 레비/ 돌베개)
    2013년 10월 19일 12: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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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감춰진 창조력을 일깨우는 자유의 도구일까? 또는 생계를 위해 불가피한 무엇일까 아니면 삶에 행복을 열어주는 비밀의 열쇠일까?

국내 독자들에게도 많은 알려진 프리모 레비의 또 다른 대표작 『멍키스패너』가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된다. 이 책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떠돌이 조립공 파우소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노동’, ‘일과 자유’에 대해 흥미롭고도 진지한 성찰을 시도한 작품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직업의 영역, 곧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며,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행복으로 가는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를 소설 속 주인공 파우소네라는 인물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총 14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 소설은, 일터를 향한 여정에서 만난 주인공 파우소네와 일인칭 화자(작가의 분신)가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 형식을 띠고 있다.

주인공 파우소네는 철탑, 다리, 석유시추 설비를 조립하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도는 피에몬테 출신의 숙련 노동자로, 자신의 인생과 일을 사랑하는 개성 넘치는 독학의 철학자다. 어릴 적부터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가정을 꾸리는 삶보다는 조립공이라는 떠돌이 건설 노동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작품의 제목으로 삼은 ‘멍키스패너’는 주인공 파우소네가 사용하는 조립 공구로, 그에게 있어 이것은 단순한 공구를 넘어 실존적인 존재 의미 자체를 상징한다. 중세 기사가 허리에 칼을 차듯 그가 허리에 꽂은 멍키스패너는 곧 그의 분신이자 자부심의 상징이 된다.

파우소네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고, 그 일이 자신의 삶 자체이면서 존재의 의미가 되는 인물이다. 그에게 일이란 돈을 버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예술가가 그러하듯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순수한 즐거움에 있다.

따라서 “나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기만 하면 “주인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작업을 마치 첫사랑처럼 대하고 거기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붓는다. 그는 고용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즐거움과 자유를 맛보기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 구성을 살펴보면, 개략적으로 서로 다른 세 개의 이야기 상황이 중복되어 있다.

첫번째 단계의 기본적인 상황은 파우소네와 화자가 러시아 공사 현장의 구내식당에서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하고 배를 타고 소풍을 가는 이야기들(「테이레시아스」, 「포도주와 물」, 「시간 없음」)로 구성되어 있다.

두번째 단계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파우소네가 화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별똥별을 모으는 기계(「봉쇄」), 사람이 되고 싶은 원숭이(「조수」), 지게차를 모는 연인(「대담한 아가씨」), 인도의 현수교 공사(「다리」) 등 파우소네가 경험했던 기묘한 이야기들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른 하나는 화자 자신이 파우소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후반부의 이야기들(「멸치Ⅰ」, 「아주머니들」, 「멸치Ⅱ」)이 여기에 속한다.

멍키스패너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창조하는 손’

『멍키스패너』는 화학자와 작가를 병행하던 레비가 전업 작가의 길을 선언하며 내놓은 첫 번째 장편소설로서 자신의 작가 인생에 있어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다. 또한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 『주기율표』 등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증언하거나 회고했던 전작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인간답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했던 작가의 새로운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조립공이라는 건축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흥미롭다. 레비가 보기에 이 시대의 노동자들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잃어가고 있는 인간의 본성, 곧 두 손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자이자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중 파우소네는 그런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가 파우소네의 손을 묘사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손은 길고 단단하고 재빠르고 그의 얼굴보다 훨씬 더 잘 표현했다. 필요에 따라 가래, 멍키스패너, 망치를 모방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생생히 보여주고 분명하게 해주었다. 회사 구내식당의 고요한 대기 속에서 현수교의 우아한 케이블과 데릭의 뾰족한 철탑을 그렸고, 언어가 궁지에 처할 때면 도와주었다. 옛날에 읽었던 다윈에 대한 책이 생각나게 했는데, 아주 유능한 손이 도구들을 제작하고 재료들을 구부리는 과정에서 인간의 두뇌를 무기력한 상태에서 일깨웠고, 지금도 마치 개가 장님 주인에게 그러하듯이, 인간을 안내하고 자극하고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239~240쪽)

레비는 “인간의 두뇌를 무기력한 상태에서 일깨”우고 “자극하고 이끌고 있는” 유능한 손, 곧 호모 파베르의 손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본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잊혀가는 장인들에게 바치는 장엄한 헌사

파우소네의 아버지는 비교적 짧은 에피소드로 등장하지만, 소설 속에서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인물이기도 하다. 파우소네의 아버지는 구리판을 두드려 냄비나 그릇을 만드는 일을 한다. 아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일에 대한 사랑과 확신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자신의 직업을 끝내 바꾸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제품들이 나오면서 그가 만든 그릇은 진열장에서 찬밥 신세가 되고, 그의 직업도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일에 대한 의욕이 줄어들고 결국 평소에 말했듯이 “손에 망치를 든 채” 쓸쓸하게 죽어간다.

그런 아버지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함께 만든 역설적인 기념비, 말하자면 전통적인 기념비나 동상과 달리 직접 쇠를 자르고 용접하여 만든 기념비는 그런 그의 운명을 상징한다. 그들의 기념비, 둥그스름하고 큼지막한 덩어리 빵 파뇨타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낸 어느 미지의 제빵업자를 기리는 동상은 그렇게 스러져가는 직업과 노동에 바치는 장엄한 헌사가 되고 있다.

노동의 두 얼굴, 자유로운 노동과 억압적인 노동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구현할 수 있을까? 레비는 소설 속에서 ‘자유’를 노동과 관련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 공동체에 가장 유용한 자유의 유형은 자신의 일에 유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자기 일을 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파우소네는 숙련된 노동자이자, 아버지가 붙여주려 했던 ‘리베로’라는 이름처럼 노동의 즐거움을 아는 인물이다.

파우소네에게 있어 노동은 삶의 수단을 넘어서서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삶의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토대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숭고한 정신적 고양으로 이어진다. 곧 노동과 인간의 이상적 합일을 보여주는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노동과 인간의 이상적 합일’이라는 덕목은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 입구에 뻔뻔스럽게 붙여놓았던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나치의 구호를 상기시킨다. 물론 레비는 자신이 원해서 하는 노동과 억지로 강요되는 노동을 구별한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아르바이트Arbeit처럼 목적 없는 노동은 고통과 기능의 퇴화를 불러”올 뿐이며(『주기율표』 , 「프리모 레비와 필립 로스의 대담」 참조), 필립 로스의 말을 덧붙이면 “아우슈비츠에서의 일은 (……) 노동에 대한 끔찍한 패러디일 뿐”이라는 것이다.

곧 레비가 얘기하는 진정한 노동은 인간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노동이 아니라, 무엇으로부터도 얽매이지 않고 강요받지 않는 즐거운 노동이다.

노동으로서의 글쓰기, 그 기쁨과 슬픔

<멍키스패너>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는 일에 대한 레비의 성찰이다. 레비는 거의 30년간 화학자의 일과 작가의 일을 병행했다. 작중 레비는 “세상의 눈에는 화학자이지만 내 혈관 속에서는 작가의 피를 느끼면서 내 몸 속에 너무 많은 두 개의 영혼을 갖고” 있었다며 정체성의 혼란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와 여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체험해본 그리스 신화의 인물 테이레시아스와 닮은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멍키스패너>를 집필할 당시 레비는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할 무렵이었다. 레비는 글쓰기에 대해 여러모로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레비가 보기에 글쓰기 역시 노동의 한 분야지만 다른 형태의 노동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글쓰기가 그 행위 자체에서 얻는 의미나 즐거움을 목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레비는 작가가 부딪칠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토로한다. 작가에게도 일종의 직업병이 있을 수도 있고 힘들여 완성한 작품에 실망할 수도 있다.

“당신은 종이에다 아주 어리석은 것을 쓸 수 있지만, 종이는 절대 항의하지 않는다. 광산의 보강 목재처럼 하중이 너무 많아 무너지려고 할 때 삐걱거리지 않는다. (……) 하지만 어떤 페이지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읽는 사람이 깨닫는데 그때는 너무 늦고, 그러면 괴로워진다. 그 페이지는 오로지 당신만의 작품이고, 변명의 여지도 없고, 완전히 당신 책임이기 때문이다.”(71쪽)

그러나 화학자의 일, 손으로 하는 일을 포기한 화자에 대해 동료 파우소네는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유한다.

당신은 정말로 가게 문을 닫고 싶어요? 잘 알겠지만,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잘 생각해보겠어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에요. 서로 비교해볼 수 있고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 수 있지요. 실수하면 고치고, 또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게 되지요. 하지만 당신은 나보다 나이가 많고, 아마 삶에서 더 많은 것을 보았겠지요. (264쪽)

아마도 파우소네의 마지막 말은 레비 스스로가 자신에게 하는 아쉬운 독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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