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규, 그는 누구인가?
    [책소개]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문영심/ 시사IN북)
        2013년 10월 19일 12: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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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6 34주년을 앞두고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가 나왔다. 그동안 10.26과 관련한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김재규와 10.26에 대해 철저하게 드러난 사실만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한 책은 없었다.

    이 책은 강신옥·안동일 등 김재규 변호사들이 34년간 고이 간직해온 자료와 기억, 가족의 증언, 김재규와 운명을 함께 한 박흥주·박선호 등 5명의 충직한 부하들이 남긴 이야기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경기대학교 김재홍 교수가 어렵사리 입수한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 진술>, 그 외 방대한 자료들의 토대 위에 있다. 이 책은 김재규 변호사들이 검증한 최초의 10·26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속에서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은 인간의 체취를 물씬 풍기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책을 읽는 내내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나 희곡을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작가는 그동안 밥을 벌려고 방송작가로서 일하는 동안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오지 않았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유신 말기에 청춘을 보낸 작가는 이 책을 쓰는 1년여 동안 매일처럼 유신의 악몽에 가위 눌려야 했다.

    김재규. 1976년 12월4일부터 1979년 10월26일까지 34개월 동안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사람. 그는 1979년 10월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해 살해하고 1980년 5월24일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심장을 쏴버린 박정희의 오른팔. 유신을 허물어 버린 유신의 핵심.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엉성하고,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치밀하게’ 일을 저지른 사람. 모순으로 가득한 그의 행동 탓에 그동안 그와 관련해 너무나 많은 구구한 억측과 오해가 뒤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작가가 이처럼 혼란스런 그의 언행을 따라가면서 떠올린 핵심 단어는 ‘역설’이다.

    대한민국 권부에 총성이 울린 것은 세 번이었다. 박정희가 나라를 지키라는 군대를 이끌고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쳐들어와 초병을 죽이고 5·16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이 맨 처음이다. 그 박정희를 김재규가 총으로 쏘아 살해한 사건이 10·26이다. 그 뒤 군부의 전두환·노태우 일파가 다시 군을 이끌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 12·12 쿠데타이다.

    내란죄는 국토를 참절하고 국헌을 문란케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성립하는데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는 두말할 나위 없는 내란죄다. 그러나 김재규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으려고 움직인 흔적도 없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군사독재를 끝내려고 거사를 했는데 내가 집권하면 역시 군사독재가 되기 때문에 나는 집권할 생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전두환·노태우는 나중에 내란죄로 기소돼 각각 무기징역과 12년형을 받았지만 사면됐다. 박정희는 기소조차 되지 않고 국립묘지에 묻혔다. 내란죄를 저지르지 않은 김재규만 사형당했다. 김재규는 내란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도 못 되고 내란죄로 처형된 셈이다. 김재규 사건 자체가 우리 역사의 모순이며 역설이다.

    김재규

    이 책을 읽다 보면 전두환의 합수부가 주도한 군사법정이 의도한 대로 김재규가 단순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박정희를 살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받아들이게 된 데서 우리 현대사가 일그러지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박정희에 저항했던 민주화 세력이나 정치인조차 김재규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폄하했다. 혹시라도 그가 민주화의 공을 독식할까 두려워해 탄원서에 서명하는 것조차 꺼렸다. 당시 모두가 그가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사형당하는 것을 방치하고 말아 신군부가 다시 등장할 빌미를 주지 않았는지 저자는 의심한다.

    김재규가 민간법정에서 법의 보호를 받으며 공정한 재판을 받았다면, 김재규가 말하고 싶었던 진실을 자유로운 언론이 국민에게 알렸다면 우리 역사는 지금과는 훨씬 달라지지 않았을까.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도 피를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여기게 되지 않았을까. 저자가 새삼스럽게 10·26을 끄집어내 햇빛 아래 말리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저자는 김재규 33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김재규가 부마항쟁으로 전쟁터처럼 변한 부산 시내를 암행했을 때 우연히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게 됐던 사람이다. 그는 작가에게 그 날 김재규와 박흥주가 최루가스에 맞아 초주검이 된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나중에 신문을 보고 자기가 만난 사람이 김재규란 걸 알고 언젠가 시간을 내 고인에게 인사나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뒤늦게나마 고인의 빈소를 찾게 됐다고 작가에게 털어놓았다. 30여 년 전에 딱 한 번 만난 사람의 마음속에도 당시 김재규의 절박함과 고뇌는 잊을 수 없을 만큼 뚜렷하게 각인됐던 것이다.

    김재규를 직접 만나본 이들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국선변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김재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던 인권 변호사도 당연히 처음에는 그를 변호하는 데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를 만난 지 30분 만에 자신의 생각이 180도 바뀌는 것을 의식하며 당혹스러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마치 오래 전에 떠나보낸 연인을 그리듯 고인의 묘를 찾는다. 거사 30분 전에야 겨우 김재규의 뜻을 전해들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신군부의 갖은 유혹과 협박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 한마디도 김재규를 비난하지 않고 묵묵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단순히 김재규의 인품이 고결해 그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작가는 당시 그들은 박정희가 왜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또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재규밖에 없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정보부를 채홍사로 삼아 한 달이면 열흘이나 여자 연예인이나 여대생들을 강제로 끌어다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이며 부마사태를 “야당의 사주를 받은 ‘뽀이’들이 저지르는 난동”쯤으로 받아들였던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 이 책은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야수이자 괴물이었다는 걸 분명히 말해준다.

    저자는 김재규를 둘러싼 이 같은 역설과 모순에 분노하는 이들이 있는 한 김재규가 그토록 원했던 제 4심, 즉 정당한 문민의 재판은 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이 그 시작이 되기를 희망한다.

    박근혜 시대, 다시 김재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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