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무, 그 물새, 그 바다
[파독광부 50년사] 부산 동삼동과 그 앞바다의 기억들
    2013년 10월 11일 10: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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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내려온 김에 며칠을 고향 동삼동에서 지내기로 하고 누님댁에 거처를 정했다. 하루는 옛 마을을 그리면서 길을 걷고 있는데 “정의 형님 아임니꺼?” 하는 굵직한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돌아보니까 얼굴에 살이 뚱뚱하게 찐 마흔 댓 되어 보이는 중년남자가 서 있었다.

“지를 몰라 보겠능기요?. 지가 바우 아잉기요.”

그제야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바우였다. 반가웠다.

“바우가? 니가 우짠 일이고? 니는 어데 사노?”

나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옆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막걸리 한잔씩 들면서 24년 만에 처음 보는 재회의 술잔을 나누었다. 얼마동안 서로간의 안부와 집안 형편과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음과 답이 왔다 갔다 한 후에 그는 내가 조금 입을 대고 남겨둔 술잔을 가리키며 나를 재촉했다.

“형님 이거 어서 드이소. 그 다음에는 우리 집에 갑시더. 오래만에 와서 지가 사는 거를 보고 가야 안 됩니꺼.”

그래서 나는 술잔을 남겨둔 채 일어나서 그와 함께 그가 사는 집으로 갔다. 나는 큰 아파트 몇 동이 서 있는 곳을 지나면서 옛날에 논두렁길을 오르던 추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형님 생각 나능기요? 여기가 다 우리 논 아이었능기요. 그 자리에 아파트 여덟 개를 지었는데예, 저 위쪽에 옛날에 우리 집 서 있던 자리에 지은 아파트에 지가 삽니더.”

바우는 제가 산다는 아파트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동삼동이 주택지로서 발전하면서 새로운 아파트가 여기저기에 세워질 때에 동삼동의 땅값은 끝없이 치올랐다.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많은 돈을 받고 땅을 팔아서 그 돈으로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도 간신히 나온, 배운 것이 없는 바우는 자기의 생명줄인 유산 받은 논 여덟 마지기를 팔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땅을 팔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했다고 했다.

“저 앞에 있던 x 씨네 집 다 망했습니더. 큰아들은 파산선고를 당하고는 어디로 간지 알 수 없고 마누라는 달아났다는 소문이 들립디더. 작은 아들은 안 죽었능기요. 하나 있던 딸내미는 노름에 미쳐 남편이 자살했고, 지는 어디로 가서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소문이 났심더.”

나는 그 집이 망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몸이 오싹했다. 옛날에 만났던 그 스님의 예언이 적중했던 것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너무도 사실과 같아서 나는 속으로 정말 풍수설에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형님도 그 집 아들하고 친했지예. 참 사람 사는 거 알 수 없는 겁니더.”

우리가 제일 위 쪽에 있는 아파트에 당도했을 때 바우는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었다.

“이기 우리 집입니더. 이 아파트 지 꺼 아임니꺼.”

방에 들어가니 집이 넓었다. 제일 위 층의 아파트 세 개를 하나로 만들었는데 75평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셋인데 다들 욕실과 화장실이 달린 방을 쓰고 있었다.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도 천대를 받았던 바우가 오늘 걱정 없이 사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 그는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수입의 근원인 논을 팔지 않고 오래 버티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사람이 바우가 그 토지를 팔면 팔 층짜리 아파트 여덟 개를 지어서 어느 것이든 바우가 원하는 건물 하나는 바우 앞으로 주겠다고 했다.

“그분도 알고보이 형님처럼 예수쟁입디더. 어느 교회 장로라고 해서 믿고 그렇게 하자고 결정하고 토지를 팔았습니더. 우리집 아래에 있는 7층은 모두 전세로 내 주었습니더.”

자기가 운이 좋았는지 땅을 싼 사람이 참으로 정직해서 바우의 돈을 잘 처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우가 한 푼도 손해가지 않도록 자기가 직접 주선해 주더라고 했다. 땅값과 전세 받은 돈의 이자로 바우는 걱정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형님 도둑놈들밖에 없는 세상에 그분 같이 정직한 사람도 있읍디더.”

바우가 사는 방은 제일 윗층이어서 동삼동 앞바다와 오륙도를 넘어 동해바다를 훤하게 내다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앞 바다가 아치섬까지 메워지고 없어져가는 일이었다.

“형님 생전에 지가 배우지 못해서 한이 됐는데, 돈이 있으이 인제는 부러운 거 없습니더. 큰 아는 내년에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교 가고, 작은 놈들도 모두 대학공부 시킬랍니더. 대학교 가는 기 딴 거 있습니꺼? 지 애비 돈만 있으면 가는 거 아입니꺼. 아 놈들이 지 애비 닮아서 머리가 나빠도 엉터리 지방 대학이라도 간판만 따면 안 되능기요.”

이제는 일어서 가야겠다는 나를 붙잡으며 제 처가 곧 돌아오면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시간이 없어 사양하고 그를 만나 참 반갑다고 하면서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라고 했다.

나는 그 집을 나오면서 숨김없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바우의 부모님은 정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바우의 아버지는 동생이 있었는데 자기가 동생보다 훨씬 더 잘 살았지만 나이 많은 어머니를 동생에게 맡겼다. 바우 아버지는 욕심이 놀부와 같았다. 그러나 동생은 흥부가 아니었고 놀부의 동생인 작은 놀부였다. 어머니를 모시는 동생은 형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순순히 내어줄 형이 아니었다. 형제간에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그때마다 동생은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형에게로 올라갔다. 어머니를 형의 마루에 내려놓고 그는 큰 소리를 냅다 질렀다.

“니 에미 여기 왔으니 니가 맡아라” 하고는 자기 어머니가 옆에 있는데도 “니 에미 x할 놈” 하면서 욕을 퍼붓고는 내려갔다. 그 다음에는 형의 차례였다. 그의 입에서 차마 남에게도 할 수 없는 욕설이 거품을 품으며 나왔다. 형은 욕설과 함께 늙은 어머니를 업고 논두렁길을 번개 같이 내려왔다.

“이놈들아 날 죽여 놓고 싸움해라.”

그의 등에 업힌 늙은이는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목 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동생이 사는 집 뒤 언덕에 어머니를 내려놓고 형은 또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한참 퍼붓고는 올라갔다.

동네사람들이 보다 못해 두 형제를 잡아 매질을 하겠다고 위협해도 그들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러한 바우의 아버지는 자기는 서당 문 곁에 가지도 못했어도 잘 사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바우를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래도 불평 없이 순진하게 고분고분했던 바우가 오늘날 걱정 없이 사는 것을 보고 나는 기뻤다.

바우가 사는 아파트를 나와 언덕길을 내려오며 앞바다가 메워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앞바다!

오륙도와 아치섬을 휘감고 밀려온 현해탄의 물결이 자갈밭에 찰싹거리며 나에게 꿈을 속삭여 주던 앞바다. 아침 붉은 해가 저 먼 수평선에 얼굴을 내어 밀면 나는 또 얼마나 물 위에 펼쳐진 황금빛의 다리 위로 내 꿈을 그 붉은 해에게 보냈던가? 여름에는 돌고래의 일종인 상괭이들이 물 뿜는 소리와 해녀들의 숨쉬는 휘파람소리가 울려퍼지던 그 아름답던 내 고향.

나는 고향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고향의 땅을 발아래에 느끼면서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들이마시며 나는 또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여름방학이면 나는 밤에는 가끔 아버님을 따라 칼치도 낚으러 갔고, 낮에는 앞바다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배를 띄우고 낚시질을 하면서 놀았다. 가끔 문어도 낚았다. 문어 낚기는 참 쉬웠다. 전화 줄에 아기 손바닥만한 대나무 판을 달고 뒤쪽에는 납을 붙이고 앞쪽에는 우산살만큼 굵은 철사를 휘어서 갈고리 두 개를 만들어 달았다.

미끼는 개구리를 잡아서 갈고리가 있는 쪽에 묶고 바다 밑바닥에 내리면 납 있는 쪽이 무겁기 때문에 개구리가 위쪽에 보이게 되었다. 위에서 전화 줄을 잡고 낚시질하듯 조금씩 움직이면 문어가 개구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면서 차츰 차츰 개구리 위에 걸터앉았다. 전화 줄을 더 움직이기가 힘들게 되면 문어가 완전히 덮치고 앉아 개구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할 때였다. 그때 힘껏 전화 줄을 잡아당기면 문어가 갈고리에 걸려 올라왔다. 잡은 문어는 배의 중간에 칸을 막아서 바닥에 구멍을 뚫고 항상 신선한 바닷물이 들어올 수 있게 만든 물통에 넣어 두었다. 나는 이 물통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하루는 배를 타고 동네아이들과 놀고 있었는데, 여중학생 스무여 명을 거느린 여선생이 나더러 학생들을 아치섬까지 데려다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을 배에 싣고 아치섬을 향해 노를 저었다. 내가 뒷노를 잡고 동네 아이가 앞노를 잡았다.

아치섬-1

지금은 육지와 연결돼 있고 또 해양대학이 있는 아치섬 모습

지금은 육지와 연결돼 있고 또 해양대학이 있는 아치섬 모습

아치섬은 웃서발에서 가끔 헤엄을 쳐서 건너갈 수 있는 약 오리정도 떨어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아치섬에 약 삼백 미터 가까이 왔다. 갑자기 여학생들이 비명을 올리기 시작했다. 배의 널판이 물에 뜨기 시작했고 배는 물로 가득 채워졌다. 배에 물이 가득한 것을 본 여학생들이 놀라서 일어서기 시작했음으로 배는 뒤집힐 것 같았다.

나는 우선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해! 누구든 움직이면 물에 던진다.”

정신없이 위협을 하며 어찌된 영문인지 조사를 했다.

아버님이 어제 밤에 친구들과 뱀장어를 낚으러 가셨다가 잡은 뱀장어를 살려두기 위해서 물통 속에 넣고 물마개를 열어두셨다. 배에 많은 사람이 탔으니까 그 무게로 인해 배가 내려앉은 만큼 물이 아래에서 들어와서 물통을 가득 채운 후에 그 물통을 넘어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가 배 밑바닥을 가득 채우고는 이제는 깔려져 있던 널판을 띄우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번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호령을 하고는 물구멍을 마개로 막은 다음 동네아이더러 물을 퍼내라고 했다.

동해와 남해가 서로 부딪치고 갈라지는 현해탄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밀려드는 곳이 태종대와 아치섬 사이다. 그래서 아치섬 바로 앞에는 물결이 세었다. 물과 사람이 가득해서 가라앉기 바로 직전에 찰랑거리는 배를 저어나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구멍은 막았으니 물은 더 들어오지 않았고 배는 침몰하지 않고 견딜 것 같았다.

나는 여학생들에게 배는 가라앉지 않는다 하고는 빨리 섬에 도착하고 싶으면 운동화를 벗어 물을 퍼내라고 했다. 여선생은 겁에 질려 입술이 새파랗게 되어 있으면서도 운동화를 다 버리게 되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참겠다고 했다. 나는 여학생들을 골고루 자리에 나누어 앉게 하고 힘을 들여서 노를 저었다. 빈 배라도 물결에 이겨내기가 힘들었는데 약 20cm만 남기고 전 몸이 물에 잠긴 배를 저어서 앞으로 나가기가 어린 나에게 무척 힘이 들었다. 노를 젓는 팔에 힘이 빠졌다. 배가 도저히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정말 체력이 기진맥진해졌을 때에 나는 배를 간신히 섬에 댈 수가 있었다. 여선생은 투덜거리면서 학생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나는 교육자가 비록 자기와 학생들이 물에 빠져 죽을까봐 간이 콩알만 해서 벌벌 떨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얼마나 실제로 위험했는지 몰랐다고 하더라도, 어린 학생인 나에게 “재수 없이 배를 잘 못 탔다가 다 죽을 뻔 했다” 하면서 투덜거리기만 하고 가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나왔다.

물론 미쳐 물구멍을 막을 생각을 못하고 그 많은 사람들을 실은 책임은 나에게 있었으나, 나는 그들을 살리려고 마음속으로 ‘하느님 나를 죽이시려면 이 사람들을 섬까지 실어다 준 후에 죽이소서. 그때까지는 나에게 힘을 주소서’ 하면서 이를 악물고 노를 저었지 않았는가.

돌무더기로 메어지는 바다를 보면서 이제는 나 같은 바보짓을 하는 어린아이가 없겠구나 하고 어린 시절의 일을 생각할 때 눈언저리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코리나가 기다리고 있는 누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저녁에 딸과 함께 고추친구 보덕 군을 찾아갔다.

친구는 온천장에 살고 있었다. 독채인 큰집으로 부유하고 여유 있게 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벌써 쉰이 된 친구를 쳐다보면서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아쉬움과 서러움을 풀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보덕이와 나는 자주 서리하러 갔다. 주로 고구마, 감자, 오이 등이 우리의 희생제물이 되었다. 특별히 감자를 훔칠 때는 감자 뿌리의 반쪽만 파내었다. 그렇게 하면 감자나무가 그대로 서 있고 잎이 시들지 않기 때문에 주인이 감자를 서리 당한 줄 몰랐다.

그러나 감자는 여름에 한번 정도 밖에 해먹을 수 없었고, 고구마는 거의 집집마다 심었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여름 내내 훔치러 갈 수 있는 곳은 오이밭이었다.

제일 자주 우리의 공격목표가 된 곳은 샛구석에 있는 조 씨 오이밭이었다. 그 밭은 서리하기가 지리적으로 아주 좋았다. 샛강 가에는 시커먼 찰흙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샛강에 가서 수영복만 입고 벗은 옷은 제일 나이어린 아이에게 맡긴 후 몸에 시커먼 진흙을 칠하고 개울을 따라 올라가 조 씨 오이밭에 기어 들어갔다. 양손에 하나씩 오이를 따서 다시 뒷걸음질로 기어 나와서 옷을 지키고 있는 곳까지 도망을 갔다. 개울에 몸을 씻은 다음 바닷가에 앉아서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와 함께 씹어 먹는 오이는 정말 맛있었다.

그러나 공격이 심한 곳에는 방어도 철저했다. 우리는 두 번 실패한 적이 있었다. 공격이 실패한 것이 아니고 공격은 성공했으나, 결과는 우리의 완전한 패배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오이 서리는 주로 달이 없는 그믐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는데, 어느 그믐날 저녁에 우리의 서리 계획이 실천에 옮겨졌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수영복에 살그머니 기어서 오이 밭으로 들어가니 이외에도 밭 가장자리에 굵은 오이들이 달려 있었다. 바로 밭 가장자리는 우리뿐만 아니라 오고가는 사람들도 지키는 주인의 눈이 보이지 않으면 따 가기 때문에 오이가 아직 어릴 때 밭주인이 따서 팔았다. 그래서 우리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횡재에 기뻐하면서 이번에는 여러 개씩 따서 가슴에 안은 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쳤다.

옷을 벗어둔 곳에 와서 몸을 씻는데 몸에 어떤 진득진득한 것이 묻은 것을 느꼈다. 냄새를 맡아보니 페인트 냄새가 났다. 그제야 오이를 살펴보니 오이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우리는 치오르는 화를 죄 없는 오이에게 풀었다. 오이를 냅다 바위에 내동댕이치고는 옷을 주워 입고 불빛이 있는 마을로 들어왔다. 불빛에 비췬 우리 모습을 보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 몸에 빨간 페인트가 묻혀 있었다. 바지와 하얀 러닝셔츠도 빨간 페인트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보덕이네 집에 가서 휘발유로 온몸의 껍데기를 벗기듯 문질렀으나 피부에 깊이 묻은 페인트를 완전히 제거할 도리는 없었다. 바지와 셔츠는 어쩔 수 없이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보덕이의 바지와 셔츠를 빌려 입고 나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도적처럼 내 방문을 열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 이튿날 동네에서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몸에 빨간색이 묻은 사람은 오이 도둑이라고. 우리는 부끄러워서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휘발유로 몸을 문질러 며칠 후에 붉은색이 거의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긴소매 셔츠를 입고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또 한번은 오이를 따서 옷 벗어놓은 자리에 오니, 옷도 없고 옷을 지키던 꼬마도 없었다. 우리는 꼬마가 장난하느라고 옷을 가지고 어디에 숨었구나 생각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닷가 자갈밭에 앉아서 오이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그러나 오이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도 꼬마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사정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는 수영복차림으로 우선 꼬마가 사는 집으로 갔다. 창문 아래에서 꼬마를 부르니 꼬마가 나왔다. 그는 빈손으로 나왔다. 우리는 낮은 소리로 꼬마를 나무라면서 발로 꼬마의 엉덩이를 찼다. 그래도 꼬마는 제가 옷을 숨기지 않았다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옷을 꼬마에게 맡기고 밭으로 올라간 조금 후에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무엇이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꼬마에게 들이닥쳤다. 기겁을 한 꼬마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일사천리로 집으로 도망을 쳤다고 했다. 무서워서 바깥에도 나가지 못하고 이불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우리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나서 나왔다고 했다.

또 다시 우리는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있었다. 틀림없이 오이 밭주인의 소행이라고 단정했다. 이런 궁리 저런 궁리 끝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밭주인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바지와 셔츠는 무릎을 꿇고 살살 빈 후에 다시 찾았지만 그 이튿날 그해 도적맞은 모든 오이 값을 우리 부모님들이 배상해야 했다.

나는 아버님의 벌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상 외에도 아버님은 거기에 대해서 관대하셨다. 아이들 모이면 장난하는 것은 예사라고 하시면서 아버님은 총각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이웃 동네 돼지도 훔쳤다고 하셨다.

우리가 열대여섯 살이 되었을 때 고갈산 꼭대기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보덕이와 나는 며칠 집을 떠나서 지낼 준비를 다 갖추고 고갈산으로 올라갔다. 산꼭대기에는 큰 바위들이 이리저리 겹쳐 있어서 그 아래에 동굴 같은 자리가 많았다. 산꼭대기 근처에 거의 30m나 높은 큰 바위가 서 있는데, 그 바위 꼭지에 또 하나의 큰 바위가 놓여있었다. 위에 놓인 바위가 마을에서 쳐다보면 짚신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 바위 이름을 장사(壯士)신 바위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 장사신 바위 근처 큰 돌 아래에 두 사람이 들어가서 잘 수 있는 넓은 장소를 발견하고 평평한 돌로 자리를 고르게 한 다음 가지고 왔던 짐들을 정리해서 챙겨 놓고 구석구석마다 뱀이나 해충이 들어오지 못하게 담배를 뿌렸다.

저녁에 밥을 지어먹고 나니 어두움이 빨리 들이닥쳤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캄캄한 흑암뿐이었고 저 아래 우리 마을에는 여기 저기 등불이 비취고 있었다.

보덕이나 나나 다 겁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쓸수록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고 그러한 생각은 저절로 말이 되어 입술 밖으로 나왔다.

장사신 바위 아래에 생수가 나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깊은 계곡을 이루었는데 그 골짜기를 보짓골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불려진 사연은 옛날에 고갈산에 나무들이 울창했을 때 어떤 치한(癡漢)이 소녀를 유괴해서 죽이고 그 소녀의 음부를 도려내어 골짜기의 소나무 가지에 꽂아 두었다는데서 기인했다. 바람만 살랑거리며 스쳐가도 죽은 소녀의 원한어린 혼이 산발을 하고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무서워서 젊은 남녀처럼 꼭 끼어안은 체 잠이 들었다.

자다가 무엇이 축축하고 차가운 것과 요란한 벼락 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손전등을 켜서 살펴보니 물방울이 돌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고, 바깥에는 천둥소리와 함께 억수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저히 거기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고 모든 것을 물에 적시기 전에 이사를 해야만 했다.

바깥을 내다보니 어디가 어딘지 분별할 수 없었고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에 비취어 서 있는 돌들이 짐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만 했다.

나는 우선 이불에 모든 것을 넣어 둘둘 말아서 이삿짐을 차렸고 보덕이는 손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밤을 새울 수 있는 마른 곳을 찾았다. 조금 있으니 보덕이가 한 삼십 미터 떨어진 곳에 젖지 않고 밤을 새울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그리로 옮기자고 했다.

우리는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모든 짐을 옮기느라고 몸이 흠뻑 젖었다. 짐을 다 옮기고 난 후에 오후에 모아두었던 나무에 불을 붙였다. 따스한 불에 젖은 옷을 말릴 수는 있었지만 굴 안으로 퍼지는 연기 때문에 견디기가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몸이 조금 마르고 굴 안이 따뜻하게 되자 우리는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우리는 둘 다 감기에 걸려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렸고 우리가 밤을 지낸 바위굴도 빗물의 습격을 당하고 있었다. 머리맡 젖은 자리에 언제 물방울이 생겨서 굴 안을 적시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는 순간 서로의 생각을 알아냈다. 우리는 말없이 이불을 말아 묶었고 행구를 차린 다음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집에 오니 부모님들이 밤새 잠을 못 주무시고 걱정을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벼락은 바위에 자주 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다. 동네에서는 간밤에 뒷산에 허깨비 불이 날아다니더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대학시절에 우리는 뽈나구(뽈라기, 뿔나기,⇒ 천징어)를 낚으러 가기로 하고 보짓골 아래에 있는 조롱박골 가는 개울에서 미끼로 쓸 새우를 잡았다 (한국에서 검은 개울 새우가 나는 곳은 이곳뿐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기억난다). 밥을 끓일 냄비에 쌀을 담고 생선회를 쳐서 먹을 수 있게 칼과 상치와 초장을 그릇에 담고는 태종대로 갔다.

보덕이는 먹을 것이 든 냄비를 들었고 나는 낚싯대와 살아 있는 새우가 든 조그만 소쿠리를 들었다. 우리는 해변을 따라 뽈나구 돌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직 물이 나지(= 썰물) 않았음으로 여기저기에는 돌을 징검다리처럼 뛰어서 건너야 했다. 한 손에는 낚싯대를 들고 한 손에는 새우그릇을 들고 넓은 간격을 뛰어 넘을 때는 바위들이 매끄러웠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한번은 내가 힘껏 뛰었는데도 미끄러져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들고 있는 소쿠리를 놓지 않으려고 꼭 붙들고 위로 치켜 올렸으나 소쿠리를 잡은 채로 온 몸이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새우들이 뿔뿔이 흩어져 헤엄을 치면서 나를 하직했다. 전신이 물에 젖은 것도 안타까웠지만 미끼로 가지고 왔던 새우를 다 잃어버렸으니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보덕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나에게 마구 화풀이를 했고 나는 그의 빈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채 불에 옷을 말리고 있었는데 보덕이가 내 볼기를 무엇으로 쳤다. 무엇인가 싶어 만져보니 가지고 왔던 초장을 내 볼기에 쳐서 붙였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면서 웃음을 터뜨렸고 보덕이는 칼을 휘두르며 뽈라구 회는 못 먹게 되었지만 정의 볼기 회나 먹자 하며 나를 쫓아왔다. 웃는다고 자갈밭에서 도망하기가 힘들었다. 우리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친구와 나는 수없는 추억들을 눈물이 날 정도로 웃으며 회고했다. 나는 근 25년만에 찾아온 고향에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그동안 말할 수 없이 시달리던 향수를 달래고 다시 독일땅으로 돌아왔다.<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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