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얼굴
    [비판과 비평] 진보적 자유주의 비판 ②
        2012년 06월 13일 11: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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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종석씨가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최태욱 이근식 고세훈 박동천 지음. 폴리테이아 출판)라는 책에 대한 비평을 통해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연재를 3회에 걸쳐 할 예정이다. 그 중 두번째  글이다. 첫 회를 볼려면 여기를(편집자)

    ‘좋은 자유주의’를 꿈꾸는 사람들?

    우리들의 통념 속에 존재하는 자유주의란 19세기의 자유방임주의나 20세기 후반의 신자유주의다. 자유주의란 단어와 함께 작은 정부, 자유무역, 탈규제, 사유화와 민영화 등 일련의 경제적 자유주의와 관련된 여러 개념들이 당장 떠오른다.

    더 나아가 이런 자유주의적 담론은 불평등, 시장 전체주의, 공공성의 파괴, 노동자 계급의 빈곤과 타락과 곧장 연결된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인해 쌓여가는 노동자계급의 고통과 팍팍해지는 민중들의 삶으로 인해 이제 자유주의는 공공의 적으로 공격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함으로써 자유주의는 더 이상 경쟁자가 없는 유일한 체제 이데올로기가 되는 듯했다. 이런 분위기에 고무되어 일본계 미국 보수논객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을 통해 역사과정에서 인정투쟁 끝났다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하기도 했다. 자유주의에서 역사는 끝났다는 말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몰락은 시장전체주의가 그 자체로 낡은 사회 체제임이 보여준다. 임마누엘 왈러스틴이 [자유주의 이후]에서 밝히고 있듯이, 20세기 후반은 사회주의의 몰락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몰락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심각한 수술이 필요한 체제인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을 반영하듯,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와 자신들의 자유주의를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이하 [자유주의])의 저자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와 자신들의 자유주의를 구별한다. 자유주의는 19세기의 자유방임주의만 있는 것도 아니고, 20세기 후반에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최장집은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핵심이 아니며 진정한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한다. 자유주의는 소유권을 절대시하고 사적이익을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이념이 아니라 인권, 만민평등, 갈등하는 세력의 공존을 제도화 한 사상이라고 한다.(87쪽)

    박동천은 자유주의란 하나의 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자유주의 우파, 사회주의 좌파라는 도식은 일차원적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149쪽) 자유주의에도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며, 20세기 자유주의의 가장 진보된 형상은 바로 사민주의라고 주장한다. 사민주의야말로 자유주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20세기 자유주의의 새로운 얼굴이라는 것이다.(172쪽)

    이렇듯 [자유주의]의의 저자들은, 나쁜 자유주의에 대한 ‘좋은 자유주의’를 제시함으로써 자신들이야말로 진보의 새로운 얼굴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좋은 자유주의’는 사민주의적인 복지국가와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이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강력한 소득 재분배 정책을 시행하는 복지국가”인 것이다.45쪽)

    유종일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전망으로서 기회균등과 분배의 평등, 참여에 의한 민주적 거버넌스를 제시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벌개혁, 복지국가, 노동시장 안정과 참여 민주주의의 실현을 구체적 과제로 제시한다.(246-258쪽)

    그러나 필자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정책 패키지는 신자유주의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이들은 자신들이 케인즈주의의 계승한다고 하지만 이들이 수용하는 케인즈주의는 고전적 케인즈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새케인즈주의이다. 더불어 이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사민주의는 신자유주의에 적응한 사회자유주의다. 말하자면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를 통해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우스꽝스런 광대”들이라는 말이다.

    필자는 먼저 케인즈주의의 변화과정을 간단히 정리한다. 이를 통해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인용하는 케인즈주의는 케인즈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적응한 새케인즈주의임을 밝힐 것이다.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주도세력임을 밝힐 것이다.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 : 고전적 케인즈주의

    <!–[if !supportEmptyParas]–> [자유주의]의 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는 경제학자 존 메그나드 케인즈이다. 박동천이 쓰고 있듯이, 케인즈는 급진적인 자유주의 개혁자이다. 케인즈는 그 자신이 캠브리지 동성애 써클의 일원이었고, 마약, 알콜에 대해 개방적이며, 여성의 참정권을 옹호하고, 노동자계급의 체제 내 통합을 지지했다.(171쪽)

    영국노동당의 변화를 주도했던 브라운과 블레어

    [현대경제학 비판]에서 윤소영 선생이 지적하고 있듯이, 케인즈의 경제정책학은 분명 오늘날 사회주의자들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케인즈는 균형 국민소득이 완전고용 국민소득보다 부족할 때(이를 디플레이션 갭이라 한다), 정부수요와 금리 정책을 통해 국민소득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업이 존재할 때 정부가 적극 나서서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케인즈는 완전고용 정책을 지지한다.

    또는 케인즈는 임금의 하방경직성을 주장한다. 임금의 하방경직성이란 명목임금은 한 번 올라가면 잘 내려오지 않는 현상을 지칭한다. 이는 임금이 시장에서 개인간 협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과의 협상을 통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라는 제도를 통해 임금이 결정되기 때문에 임금은 경직적인 것이다. 이는 케인즈가 노동조합의 존재를 제도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고세훈이 케인즈가 노동자계급을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자였다고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127쪽) 케인즈의 거시경제학은 노동자계급에게 완전고용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한 임금 상승을 허용함으로써 계급타협을 이론화한 것이다. 그는 실질임금 상승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유효 수요의 증대가 경제성장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후 케인즈주의가 사회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비록 다양항 이념적 토대를 지니고 있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완전고용 보장, 높은 세금과 정부수요(복지 공급), 투자의 사회화라는 측면에서 케인즈주의 정책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전후 황금시절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경제적 조건이었다.

    용어의 혼란이 있긴 하지만 전후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자유주의와 대립물은 아니다. 케인즈의 체계에서 정부는 수요의 주체이지만 공급자는 여전히 기업이다. 정부는 조세나 재정적자(채권)을 통해 유효수요의 주체가 되지만 정부에게 공급하는 주체는 기업인 것이다. 더불어 케인즈주의는 금융투기를 억제하고 기업이 생산적 투자를 하도록 개입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추동했던 것이다.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케인즈 체계에서 정부수요의 증대는 기업 생산의 증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케인즈주의는 근본적으로 자유기업에 대한 옹호이기도 하다. 케인즈가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최장집 등은 자신들은 케인즈주의라고 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케인즈주의의 핵심이 뭔지도 모르고 하는 헛소리이다. 다만 앞에서 보았듯이, 전후 케인즈주의는 노동자계급에게 실질임금의 성장과 완전고용을 보장하려고 했던 점에서 계급 타협체제였던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신자유주의의 품에 안긴 진보적 자유주의

    <!–[if !supportEmptyParas]–> 1절에서 보았듯이, [자유주의]의 저자들은 자신들을 사회적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긴 한데 케인즈주의로 수정된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의도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전후 케인즈주의의 변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케인즈주의의 후예(171쪽)이거나 케인즈주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자유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한다.(241쪽) 그러나 케인즈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문제는 [자유주의]의 저자들이 어떤 케인즈주의를 수용하는가이다.

    전후 케인즈주의는 1970년대 화폐주의와의 논쟁을 거치며 새케인즈주의로 변모한다. 이윤율의 저하와 장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케인즈주의도 극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새케인즈주의는 화폐주의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중앙은행 독립을 승인하고, 인플레이션 관리를 경제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한다.

    새케인즈주의는, 케인즈가 주장했던 금리생활자의 안락사에 반대하여 경제의 금융화를 주도하고, 주식시장을 부양한다. 누군가는 이를 비꼬아 “주식시장 케인즈주의”라고 했다.

    새케인즈주의자들은 완전고용도 포기한다. 비록 이들은 금융정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는 정규직 일자리가 아니다. 이들은 효율성 임금론을 내세워 임금을 개별화하고, 불안정 고용을 조직함으로써 저임금 체계를 구조화 한다. 또한 실업을 조직함으로써 고용을 위협하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저하시켜 비용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임금, 저인플레이션, 저금리가 이들의 구호인 것이다.

    케인즈주의의 변모와 함께 사회민주주의도 극적으로 변한다. 사민주의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금융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 노동시장을 분절시켜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금융에 대한 모든 규제를 제거함으로써 투기를 조장하며, 복지체제를 잔여적 체계로 전환시킴으로써 기업 비용 감소에 극적으로 참여한다.

    사민주의가 앞장서서 신자유주의를 실천한 것이다. 블레어/브라운의 영국 노동당, 슈뢰더의 독일 사민당 등 대부분의 유럽 사민당은 신자유주의의 적극적 실천가가 된 것이다. 4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유럽 주변부의 개혁 역시 사민주의가 주도하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이다.

    [자유주의] 저자들은 케인즈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케인즈주의를 수용하겠다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케인즈주의의 역사적 변모라는 문제의식은 없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찬찬히 따져보면, 이 책에서 수용하고 있는 케인즈주의가 어떤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if !supportEmptyParas]–>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신자유주의

    [자유주의]의 3부는 김대중 정부의 민주적 시장경제를 분석하고 있다. 최초의 진보적 자유주의 실험이 바로 김대중 정권의 ‘민주적 시장경제’란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비록 한계는 지녔지만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관치경제를 개혁하고, 공정한 시장경쟁 질서를 구축하려 했으며, 보편적 복지의 틀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시민사회를 참여시키고,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함으로써 민주적 참여의 문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아시다시피 김대중/노무현 10년간 민주정부는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의 전위를 자임했다. 김대중씨는 금융시장 개방을 주도함으로써 한국을 투기자본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노무현정부는 한국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주식투기와 부동산투기의 천국이 되었다. 이는 케인즈가 주장한 ‘금리생화자의 안락사’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입장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3대 노동 악법이 통과된 시기이기도 하다.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변형시간근로제의 도입이 그것이다. 이 악법들은 불안정 고용, 비정규직화, 살인적 해고를 정당화 하는 수단이었다. 더불어 노동자들 내부의 소득격차와 사회적 양극화의 원인이 된다. 이 또한 케인즈주의의 완전고용 정책과는 무관하다. 더불어 김대중 정부의 복지 공급 확대는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의 마련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대중적 오해를 교정해 보자. 우리는 흔히들 신자유주의를 정부의 경제개입을 반대하는 밀턴 프리드만류의 화폐주의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신자유주의 핵심세력은 새케인즈주의다. 이들은 국가의 경제개입도 지지하고, 복지공급도 주장하며, 일자리 창출도 필요하다고 한다. 다만 이들이 말하는 복지는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고 일자리는 불안정 일자리이다. 그러므로 김대중 정부의 복지 개혁을 신자유주의와 대립되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자 지적 태만이다.

    8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도사로 불리운 레이건과 대처

    [자유주의]의 저자들이 찬양하는 김대중 정부의 실천은 정확히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변모한 새케인즈주의이다. 경제의 금융화, 노동의 불안정화, 잔여복지체제의 확립, 부동산 경기 부양 등. 이 책의 저자들은, 진보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민주당 정권의 정책이야말로 신자유주의를 확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다름 아닌 한국적 신자유주의 세력인 것이다.

    합의제 민주주의 :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통치성.

    <!–[if !supportEmptyParas]–> [자유주의]의 4부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미래를 제시한다. 이 글에서 필자들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핵심을 ‘합의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최태욱은 합의제 민주주의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요약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형 조정시장경제이고 정치적 측면에서 연합정치이다.

    조정시장경제란 간단히 말해 독일-북유럽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도 영미식 자본주의, 독일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조정시장자본주의란 독일-북유럽 자본주의를 모델로 삼는 것이다. 장기적인 생산적 투자, 이해관계자의 참여, 고숙련-양질의 노동력, 큰정부와 장기고용으로 이뤄진 경제체제를 말한다.(303쪽)

    연합정치란 조정시장경제에 조응하는 정치연합을 의미한다. 이는 다양한 정당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각 계층을 대변하는 정당, 정치세력들이 협의를 통해 연합통치를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연합정치란 경제체제에서의 이해관계자의 참여에 조응하여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합의하에 공동의 정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기층의 계급타협을 정치적 수준에서 정당연합/정책연합으로 실현하자는 것이다.(321쪽)

    흥미로운 사실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주창자들은, 그들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전위 세력임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 절에서 필자는 새케인주의가 노동시장을 개조하여 불안정고용을 확대했다고 했다. 더불어 사민주의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사회자유주의로 전환했다고 했다. [자유주의]의 논자들도 유럽 사민주의의 변모를 인용한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유연안정성 협약’과 이탈리아.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칼 등의 ‘경쟁력을 위한 사회적 합의주의’를 소개하고 있다.(304쪽) 여기에 독일 슈뢰더 정부의 ‘어젠다 2010’도 덧붙일 수 있다. 유연안정성이란 다름 아니라 노동의 수량적 조정(해고의 자유화/비정규직 고용의 증대)으로 노동시장을 신축화 시키고, 저임금을 확대하는 전략이다. 이것을 통해 산업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사회적 합의주의의 골자는 경쟁력을 위해 노동의 양보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불안정 고용을 확대하되 사회안전망을 통해 실업의 문제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며 이를 주도한 것은 사민당 정부이다. 이를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특정 정당만이 이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좌파, 중도 우파가 모두 동의하고, 노동조합이 이와 같은 구조조정에 참여하여 수용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자유주의]의 저자들은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효율성을 옹호하면서 한국의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겠다고 호언장담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으로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겠다는 것인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구조조정은, 유럽 사민주의자들이 주도한 ‘경쟁력 있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결과이다. 유럽 신자유주의와 한국 신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유럽 것은 모범적인데 한국 것은 치유되어야할 대상이란 말인가?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가?

    더 나아가 [자유주의]의 저자들(홍종학, 유종일, 최태욱 등)은 소위 경제민주화 논자들로서 재벌개혁의 전위에 선 지식인들이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 등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이들이 주주자본주의 옹호세력이라고 통렬히 반박하고 있다. 경제 민주화론자들이 주도하는 재벌개혁이란 다름 아니라 재벌을 해체해서 투기적 금융자본의 손아귀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진보적 자유주의가 어떤 세력인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렇듯 합의제 민주주의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과거 국가 정책은 관료의 일방적 논리에 따라 진행되었다면,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은 일방주의가 아니라 ‘책임 있는’ 시민단체, 원로들, 노동조합, 정당들을 참여시켜 합의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이다. 노사정 위원회가 그것이고, 각종 ,NGO가 이와 같은 합의의 주체인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을 저항을 사전에 봉쇄하는 것이다. 합의제 민주주의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전형인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진보적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전위가 될 것인가?

    <!–[if !supportEmptyParas]–> 합의제 민주주의의 주체는 보수주의자들이 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보듯이 보수주의, 권위주의적 질서를 통해서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 보수주의 우파나 시장근본주의자들은 ‘교조적 원리’와 ‘특권주의’로 인해 사회적 타협과 합의를 배제하고 자기계급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옹호한다. 이는 대중의 저항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세련된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나 한국의 민주당, 미국의 클린턴/오바마 정권이 필요하다. 이들 권력은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고, 광범위한 시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중도좌파의 여론을 등에 업고 있다. 우파 언론들은 당연히 구조조정을 지지하기 때문에 중도좌파 여론만 조직되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아무런 저항 없이 관철되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씨가 한국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중심에 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2년 변화된 지형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사회협약에 진보진영이 동참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다는 점이다. 소위 민주당-통진당 연정과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야말로 ‘경쟁력 있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주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야당연합을 지지하는 상황이라면, 민주노총도 그 주체가 될 수 있다.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는 더 적극적일 것이다. 사회적 합의를 위해 이보다 더 화려한 진영을 꾸릴 수 있을까?

    한 가지 사실만 지적하고 글을 맺겠다. [자유주의]에서도 인용되고 있듯이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 유럽 여러 국가들은 ‘경쟁력 있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실천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떤가? 지금 남유럽은 파산 상태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바로 그 사회적 합의주의가 파산상태라는 말이다. 이들 국가를 모범으로 삼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집권하게 된다면 한국 자본주의는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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