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 같지 않은 꿈 이야기
    [책소개] 『이상한 나라의 꿈』(박희병 정길수 편/돌베개)
        2013년 10월 06일 12: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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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년의 우리소설’은 신라 말기인 9세기경부터 조선 후기인 19세기까지의 우리 소설, 즉 ‘천 년의 우리 소설’ 가운데 시공의 차이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명작만을 가려 뽑은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한국 고전소설의 새로운 레퍼토리’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학과 고전문학을 전공한 박희병, 정길수 두 교수에 의해 기획되었다. 외국의 다양한 소설과 한국 근현대소설에 가려져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고전소설을, 이 시리즈를 통해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비현실적 공간에서 더 처절하게 전개되는 현실 이야기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작품은 조선의 대표적인 문인들이 남긴 ‘꿈의 기록’이다.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의 세 작품은 제목에 명시되어 있듯 ‘몽유록’(夢遊錄) 양식에 해당한다.

    ‘몽유록’이란 글자 그대로 ‘꿈에 노닌 기록’을 말하는데, 현재의 인물이 꿈속에서 과거 역사상의 유명 인물 내지 실존 인물을 만나 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그들의 모임을 견문하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는 형식을 취한다. 주로 역사적 격변기에 등장하여 강렬한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소설 양식이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꿈속에서 염라대왕을 만나 토론하는 내용이니 큰 틀에서 몽유록과 비슷한 범주에 놓이되 작품의 초점이 철학적인 문제에 놓여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수성지」(愁城誌)는 마음을 의인화하여 가상의 세계를 그려낸 점에서는 몽유록과 다르지만 역사상의 유명 인물을 등장시켜 이들을 조문하며 현실의 울분과 슬픔을 토로한 점에서는 몽유록의 정신과 상통하는 바가 크다.

    결국 다섯 작품 모두 조선 시대 문인들이 현실 세계의 문제를 비판하고 해결하기 위해 낯선 세계의 기이한 체험을 가구(假構)한 글인 셈이다. 설정은 지극히 비현실적이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꿈

    「달천몽유록」은 임진왜란 직후 윤계선(尹繼善)이 지은 작품이다. 작품의 창작 시기는 1600년, 혹은 그 직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의 공과(功過)에 대한 밀도 있는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작품 서두의 현실 공간과 몽유 공간에 대한 음산한 묘사, 전사한 유령들의 참혹한 모습에 대한 묘사부터가 임진왜란의 참상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싸운 조선 장수들을 등장시켜 그들 하나하나의 목소리로 조선 장수들의 공과를 논하게 했다. 가장 높이 평가된 인물은 물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고, 가장 큰 과오를 범한 인물은 신립(申砬)이다. 임진왜란 당시 주요 인물마다 특징적인 형상을 부여하여 그들의 공을 기리고 원한을 위로하며 전쟁의 공과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강도몽유록」은 병자호란의 희생자인 익명의 여성들을 등장시켜 전쟁의 참상과 전쟁 수행 과정에서 보여준 위정자들의 무능한 행태를 고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의 입을 통해 병자호란 당시 조정 신하들의 무능하고 비겁하며 무책임한 행태, 전쟁 전후의 위선적인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평가가 담긴 17세기의 모든 문헌을 대상으로 한다 해도 이 작품의 수준에 필적하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할 만큼 비판의 수위가 대단히 높다. 작품의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사정과 연관되지 않을까 한다.

    「원생몽유록」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임제(林悌)가 지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자 임제를 가탁한 원자허(元子虛)라는 가상 인물이 꿈속에서 남효온(南孝溫)의 인도로 단종(端宗)과 사육신(死六臣)을 만나 그들의 원통한 사연을 듣는 형식을 취했다. 「원생몽유록」은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창작된 것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불온한 작품이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고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점에서 이 작품은 김시습의 「남염부주지」, 남효온의 「육신전」(六臣傳)과 서로 연결된다.

    「남염부주지」는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김시습의 사상을 반영한 일종의 철학소설이다(『금오신화』 다섯 작품 가운데 남녀의 애정을 그린 「이생규장전」과 「만복사저포기」는 『끝나지 않은 사랑-천년의 우리소설 6』에 따로 실었다). 이 작품에는 세조 치하의 현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김시습은 애민적(愛民的) 정치사상을 가지고 어진 정치를 강조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는데, 그의 이런 면모가 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주인공 박생(朴生)이 꿈속에 가게 된 곳은 염라대왕이 산다는 남염부주(南炎浮洲)이다. 남염부주라는 낯선 세계의 풍경을 묘사하여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 뒤 박생과 염라대왕의 긴 문답이 이어지는데, 이기론(理氣論)의 문제, 귀신과 당대의 미신 숭배에 대한 작자의 생각이 지루하지 않게 전달된다. 그 과정에서 작자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과 당시의 폭압적인 정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세조의 왕위 찬탈과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남염부주지」의 현실인식과 문제의식은 동시대에 창작된 남효온의 「육신전」과 연결되며, 후대의 「원생몽유록」·「수성지」로 계승된다. 한편 「남염부주지」에서 마련된 철학소설의 전통은 18세기의 대표적 지식인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의 「의산문답」(毉山問答)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호질」(虎叱)로 이어진다.

    「수성지」는 임제의 작품으로, 『임백호집』 등 여러 책에 실려 전한다. 이 작품은 가전(假傳)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이다. 가전 작품으로는 고려 후기에 창작된 임춘(林椿)의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 이규보(李奎報)의 「국선생전」(麴先生傳), 이곡(李穀)의 「죽부인전」(竹夫人傳) 등이 유명하다.

    작품 속의 군주 ‘천군’(天君)은 마음의 의인화다. 천군이 다스리는 나라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충신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이 찾아와 ‘수성’(愁城), 즉 ‘근심의 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역사적인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수성지」는 작품 속의 수많은 전고 때문에 자세한 주석이 없으면 읽을 수 없다. 전고를 일일이 확인하고 그것이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이 점이 이 작품의 독서를 어렵게 만들지만, 이 작품의 묘미는 기실 여기에 있다. 이 ‘전고(典故)의 숲’을 천천히 감상하고 음미하며 통과하지 않고서는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즉 줄거리만 대충 아는 것으로는 작품의 거죽만 본 것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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