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 위기 아닌 '사망'상태
        2013년 10월 04일 10: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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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지금 제 아들을 데리고 같이 그의 가을방학을 보내는 휴양지에서는 한 가지를 늘 두려워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러시아/구쏘련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렵다는 것이죠. 왜 두려운가요? 저를 “노르웨이로 이민간 동포”로 간주할 그들은, 제게 꼭, 의심 없이 한 가지를 물어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행복하냐고. 제 답은 부정적일 것이지만, 왜 불행감을 늘 느끼면서 사는 것인지를 설명하자면, 몇 분 간의 담소가 아니고 꽤나 긴 글 정도 필요해서 문제입니다.

    저는 13년 전에 노르웨이로 취직이민을 간 셈입니다. 그러니까 저의 이민생활은 늘 그 “직장”을 중심에 놓고 벌어지게 되는 셈이죠. 형식적으로는 이제 영주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직장 말고 제가 노르웨이에서 굳이 살 이유가 그다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직장이 저와 아이들을 먹여주니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녹봉으로 지금 휴양지에서 시간 보내면서 느끼는 것은, 꼭 일종의 화대(?)를 받아쓰는 것과 같은, 그런 기분입니다. 물론 실제로 화대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이게 정확한 비유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비유를 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노동이란 무엇인가요? 성매매업소의 지배논리 (고객에 대한 극도의 감정 노동 등)를 내면화해서, 나 본인의 가장 은밀한 부분, 즉 나의 성을 한시적으로 고객에게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제공되는 “상품”이야 당연히 다르지만, 저를 먹여 살리는 “직장”도 사실 대체로 이렇습니다.

    나의 “업계”, 즉 논문생산업의 지배논리 (정해진 방식을 통한 구미권 동료집단에서의 “인정받기”에의 집중 등등)를 내면화해서, 나 본인의 가장 은밀한 부분, 즉 “앎”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을 “업계”가 원하는 대로 요리해서(?) 학교와 자신을 위해서 일정액의 점수를 따는 것입니다. 이 점수, 즉 논문게재점수에 따라 학교는 국가의 연구예산을 배정 받고, 나는 여행보조금 등을 차등적으로 지급 받습니다. 결국에 가장 은밀한 부분, 즉 앎에 대한 사랑 같은 게 돈으로 환원됩니다. 정말 매음과 그리 다른가요?

    제가 몸담은 인문사회학계를 포함한 학계의 이념은 “진리 탐구”입니다. 불편해도, 다수의 상식과 달라도, 아니, 다수의 상식과 다르면 다를수록 진리를 무조건 분석적으로 이야기해서 인류 공동체의 보편적 이익에 보탬이 된다는 것, 대체로 이건 우리의 아주 고상한 이념입니다. 이 이념과 “업계” 현실의 관계는? 글쎄, 교과서적 자유민주주의와 박근혜 스타일, 즉 “종북파” 마녀사냥과 전교조 고사 작전 사이의 관계와 똑같습니다. 즉, 별 관계가 없다는 거죠.

    저는 위에서 “노르웨이”를 거론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실은 대한민국에서 남았다 해도 똑같거나 더했을 것입니다. 학계가 죽어 “업계”로 환생된 것은 보편적인 후기자본주의 현상임으로, 실은 후기자본주의의 모범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잘 보이거든요.

    학계가 사망하고 학문이 사망한 뒤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해진 형식과 대체로 정해진 내용, 정해진 언어로 된 텍스트들의 경쟁적인 생산과 그 생산에 대한 경제적 보상 정도입니다. 이 텍스트들의 현 생활과의 관계는? 뭐, 대한민국 헌법과 우리 사는 현실과의 관계와 대략 같습니다. 즉, 관계 자체가 없다는 거죠. 이 생산 과정의 특징을 보다 자세히 고찰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부자유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박사

    1. 언어선택의 부자유.

    불란서 등 극소수의 정통 유럽 열강을 제외하면, 가면 갈수록 영어 아닌 다른 언어로 논문을 생산한다는 것은 정말 영웅적인 행위가 됩니다. 언어단일화, 즉 지배언어의 완전한 내면화와 상시적 사용을 요구하는 후기자본주의 논리에 위배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균질화의 과정임으로, 학문을 가장하는 우리 “업계”가 국제적인 만큼 언어까지도 국제적으로 균질화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전 세계는 하나의 시장, 모든 국가들의 시장영역 최대화, 전 세계를 관리하는 하나의 미군,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인터넷, 전 세계의 유일한 학술 언어인 영어…

    대체로 이건 신자유주의적 후기자본주의의 최종의, 절대적 균질화의 모습이죠. 영세 상인들이 이마트나 롯데마트 등에게 먹히듯이, 영어에 먹히고 마는 국지적 언어들… 아, 인제 별생각도 없이 영어로 학술을 가장한 시장행위를 하고 있는 제 자신의 행각부터는 “매음”을 넘어 어떤 자기배신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2. 형식 선택의 부자유.

    아, 1970년대까지 홈스범(Hobsbaum)이나 겔너(Gellner) 등 민족주의 연구의 대가들은 논문을 써도 에세이 형식으로 쓰고, 사이드 선생의 <오리엔탈리즘>까지도 사실상 아주 읽기가 좋은 문학적 글쓰기입니다. 그런데 인제 낭만이여, 안녕, 형식도 하나로 균질화를 당하고 맙니다. 바로 딱딱하고 전문가 아닌 사람들이 도저히 읽을 수도 없는 “논문투”입니다.

    실은, 이 “논문투”는 자본에 그나마 직접 이득이 되는 의학이나 이공계의 글쓰기 형식을 그대로 본뜬 것입니다. 우리 같은 열등 종자들은 돈을 직접 만들 수 없지만, 그나마 돈이 되는 연구자들의 글쓰기 형식이라도 본받아야 해! 이것입니다. 대중들이 못 읽는다? 그거야 바로 다행이죠! 대중들이 너무 똑똑해지면, 국군의 날에 군사행진하는 이 대한민국이 북조선과 뭐가 그리 다르냐 등등의 필요 없는 질문을 하기 시작하거든요. 그러니까 강남스타일을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수준으로 묶어두는 게 딱 맞죠.

    3. 내용 선택의 부자유.

    동료들의 심사와 편집장의 심사 등을 받아야 학술지 게재가 가능한 상황에서는, “다수”가 따르는 통념과 다른 이야기를 썼다가는 아주 고생합니다.

    제가 최근에 당한 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한 논문에서 단재 선생의 “영웅론”에 대해 “기본적으로 성리학적인 욕망 자제, 충효 절대화 논리를 그대로 따르면서 그 논리를 근대화했다”고 썼다가 논문 게재 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단재가 성리학과 무관한 “민족주의자”이었다는 게 사계의 통념이니까요. 물론 한 군데서 퇴짜를 맞아도 계속 딴 데에서 해보면 그만인데, 예컨대 취직 차원에서 논문 편수가 급하신 분들에게는 이런 경우가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거죠. 이런 위험을 직면하면서도 소신대로 다 쓰는 게 쉬울까요? 아, 만의 하나 니체나 사르트르의 책들이 동료 심사를 받아 태어나야 했다면 과연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4. 주제 선택의 부자유.

    제 이마에 이미 “동아시아/한국학”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이상, 제가 그 어떤 “딴 짓”도 하기가 힘듭니다. 예컨대 동아시아를 넘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사에 대한 책을 쓸 경우에는, 제가 전공상 공산주의운동사로 분류되지 않는 이상 그 책을 내기가 아주 쉽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홉스범처럼 세계사 전체를 아우르는 사학자는 오늘날 “업계”에서는 거의 생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참, 국내의 국사 내지 국문학에서는 이 세분화는 더더욱 심해, “총체”에 대해 거의 고민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5. 매체 선택의 부자유.

    완벽하게 목록화 돼 있는 학술지와 학술출판사 이외의 그 어떤 매체도, “업계” 논리상 부적절합니다. 그들의 말로는 “품질 검사” 차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는 그렇게 해서 역시 내용 등의 균질화를 기하기가 더 쉽기도 한다는 것이죠. “업계”가 인정하는 매체들을 관리하는 “업자”들의 군(群)은 대체로 엇비슷한 “통념”을 지니고 있기에, 그 매체만이 인정돼야 내용 통제가 수월해집니다.

    한 때에 신학의 독재에 대한 일종의 인식론적 혁명으로 시작된 학계가 죽어서 남은 것은, 위에서 묘사된 후기자본주의적 논문 공장의 모습입니다.

    인문학의 위기? 아, 이건 참 외교적인 언술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이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생산하는 언어를 믿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어떤 바보가 우리를 믿겠습니까? 위기? 인문학의 정신이 자유라면, 외부 통제의 내면화, 즉 내면적 자유의 자발적 포기는 우리가 인문학을 이미 포기한지 오래됐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우리 자신들에게라도 솔직해집시다. “위기”가 아니고 사망입니다. 인문학이 죽어서, 휴대폰이나 자동차 생산과 똑같은 균질화된 텍스트들의 복제술만 남았습니다. 그런 류의 텍스트를 생산할 줄 아는 로봇들이 발명되면, 아마도 우리가 다 실직 당하고 말 것입니다.

    한 때에 전교조 선생님들이 참교육을 부르짖었듯이, 우리도 참인문학을 부르짖을 때가 온 듯합니다. 균질화된 언어/문체/형식, 그리고 모든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앎을 필요한 형태로 적절히 전해주는, 그런 인문학. 모든 것을 회의하게 만들고, 인간으로 하여금 홀로기부터 남들과의 연대하기까지 가르치는 인문학. 반인간적인 병영국가이자 침략 종범국가 대한민국과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궁극적인 전복을 꿈꾸는, 모든 헌법 바깥의 위험한 인문학. 그런 인문학에 종사하게 되면 아마도 화대가 거래되는 매음의 현장을 벗어나 자유사랑의 영역에 들어갔다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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