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지] 백기완 선생님의
    시대의 쇳소리에 함께 해주십시오
        2013년 10월 03일 01: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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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백기완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몇 년 동안 제일 괴롭히고, 많은 부탁을 했던 분이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을 빙자해 다른 선생님들이나 선배님들까지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기륭에서 몇 번이나 침탈이 예고될 때면 맨 먼저 부탁을 드리곤 했습니다. 아무래도 선생님이 계시면 공권력도 약간은 자제를 했으니까요.

    희망버스 1차 당시에 사다리가 넘어왔을 때 모두 주저할 때 먼저 넘어달라고 부탁드렸던 것도 선생님과 문정현 신부님과 박종철 열사 아버님이셨습니다. 용역깡패들을 쫒아내고 공장을 점거한 후 바로 정문 옥상으로 올라가 책임을 떠맡은 것도 세 어른이셨습니다.

    2차 때 밤 12시 공권력과 맞부딪쳤을 때, 모두가 싸움을 주저할 때 봉고차 위로 올라가 싸우자고 해주셨던 것도 두 선생님이셨습니다.

    늘 희망버스의 처음은 백기완 선생님이 열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문정현 신부님이셨습니다. 두 어른이 앞과 뒤를 끝까지 지켜주셨기에 우리는 늘 든든할 수 있었습니다.

    3차 당시 부산시민사회운동이 움직이지를 않을 때 직접 부산지역 사회원로들에게 간곡히 함께 해줄 것을 호소해주시기도 했습니다.

    또 잘 안 알려졌지만, 서울에서 출발하는 희망버스 제1호의 차장은 언제나 백 선생님이셨습니다. 앞에서 선생님들이 싸워주셔야 한다고 해서 1호차는 늘 사회원로 버스였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싸워온 역사를 늘 존중하며 함께 가야한다는 뜻도 있었습니다.

    뜻만 이렇게 하고는 무조건 조직해주십시오 하곤 우린 몰라라 했습니다. 실제 어떤 분들과 소통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이 1호차를 조직하고 운영해 주신 진정한 차장은 백 선생님과 십 수 년 동안 혼자 통일문제연구소를 지키고 있는 채원희 동지였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그간 팔순 노구를 이끌고 모든 자리와 요청에 함께 해주셨습니다. 가끔 인터넷 언론에라도 소식이 뜨는 곳은 그나마 행복한 자리들이었습니다. 가끔 어른이 너무 나서시는 것 아니냐고, 너무 싸우는 곳만 다니시는 것 아니냐고 왜 맨날 선생님은 존중받는 곳에만 계시냐고 문제의식을 가진 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기억으로 선생님이 그간 함께 해주셨던 곳의 대부분은 이름 없이 싸우는 자리들이었고, 주요한 역할은 당장 끌려가야 하는 상황을 막아주시는 긴박한 일들이었습니다.

    저도 놀랐지만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곳이 어디시던 거절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늘 앞자리에 굳건히 앉아 있어줘야 하는 역할이고, 당뇨로 걷기도 쉽지 않아 재작년 겨울 쌍차 관련 집회에서는 그만 앉은 채로 쉬를 해버리기도 했다고 허허 웃으시기도 하더군요.

    사실 이명박 때는 기자회견을 빙자한 집회가 일상적이었습니다. 나중엔 기자회견도 집회로 간주해 탄압했기에 노동자민중 의제를 가지고는 정말 무슨 자리 하나 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수많은 기자 하나 없는 기자회견장(집회장)의 방패막이자 외로운 연사가 선생님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자리에 누구라도 한 분, 한 사람 섭외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운동 경력만 수십 년이셔서 다 아시면서도 아무 말씀 없이 그 모든 자리 지켜주신 선생님께 정말이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튼 그런 선생님께서 연말 즈음(11월 29일)에 시 낭송회 밤을 해보시고 싶으시다고 처음으로 저에게도 함께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엔 그냥 어른의 자리를 한번 마련해드리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작년에 팔순 잔치는 하셨지만, 후배 문학인들이 운동가 백기완이 아닌, 눈물 많은 시인 백기완의 자리를, 그의 운동이 아닌, 그의 뿌리인 문학의 자리를 잘 정리하고 공유해보는 자리 정도를 한번 마련해 드리는 문학인들간의 우정의 자리 정도면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쇠고 다시 자세히 말씀 들어보니 조금 다른 의미셨습니다. 제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쌍차에서, 현대차비정규직 투쟁에서, 강정에서, 밀양에서, 국정원에서, 전교조에서, 공무원에서 모든 곳에서 최소 민주주의조차가 밀리는 이 야만에 맞서 우리의 소리도 좀 내봤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의 아버지 때부터 끌려가고 잡혀갔는데 이제 다시 그의 새로운 망령에게 거리에서 짓밟히고 끌려가는 이들을 어떻게 보느냐고, 언제까지 소리를 내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운이 남아 있는 마지막까지는 소리를 내고 가고 싶다는 말씀이셨고, 그런 뜻에 공감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그 자리 열고 싶다는 부탁이셨습니다.

    특히나 선생님은 늘 문화예술의 힘과 역할을 너무나 잘 아는 분이시기에 동료 문학인들, 예술인들이 함께 해주면 너무 좋겠다고 하십니다. 어쩌다 먼저 말씀 듣게 되고 말씀들 잘 전해달라는 얘길 듣게 되어 이렇게 편지로나마 말씀 전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무엇도 확정된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꼭 복잡할 자리도 아닐 수 있습니다.

    원 없이 선생님께서 시로 우시든, 시로 어르시든, 시로 울부짖으시든, 시로 까무러치시든 그 자리만 잘 마련해드리면 될 듯도 합니다. 그날 함께 참석해 이제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을 천하의 선동꾼 ‘백구라'(죄송)의 삶과 시에 후배 문학인들로서 아낌없는 박수 한번 보내드리면 끝날 일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실무적인 자리만은 아닐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선은 그 자리 함께 관심 갖고 응원하고, 지혜 보태주시며, 가능하다면 함께 해나가겠다는 뜻의 초동 제안자들로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절주절 긴 편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께 동보 메일로 보냄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10월 7일 저녁 7시30분에 대학로 근처에서 첫 제안자 간담회가 있으니 가능하신 분들은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꼭 일이 아니더라도 반가운 자리면 좋겠습니다. (송경동 드림)

    <요청 드리는 내용>

    – ‘(가칭)죽음을 넘어서는 민중의 쇳소리- 백기완의 비나리’ 자리를 함께 여는 초동 제안자로 나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제안자 분들의 이름으로 이후 더 많은 이들과 쇳소리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참여, 공유의 자리를 열어갈 계획입니다.

    – 제안자와 이후 참여해 주신 분들의 총의를 모아 쇳소리 당일 ‘(가칭)새로운 시대를 향한 저항선언’을 내고자 합니다.

    <참여 및 진행 상황 공유>

    – 초동 제안자로 함께 하신다는 의사를 유선이나 메일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초동 제안자 간담회를 10월 7일(월) 7시 30분에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 근처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갖고자 합니다. 응낙해주신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쇳소리의 밤은 현재 공간 확보 등을 위해 우선 11월 29일(금) 조계사 내 불교역사문화관을 섭외해 둔 상태입니다.

    – 현재 초동 기획모임을 1차 진행했습니다. 초동 기획 모임에서는 이도흠(교수학술), 김소연(노동), 정택용(사진), 채원희(통일문제연구소), 송경동(시인), 박준성(노동자교육연구소), 한석호․박효선(민주노총), 이수호․이은․양기환(노나메기), 양한웅(철폐연대, 조계종노동위원회), 이사라(노동문화), 박민희(기획자), 이원재(문화연대)님 등과 사전 공유를 했습니다. 이후 제안자들께서 기획모임에 함께 해주시길 바래봅니다. 2차 초동 기획모임은 10월 7일(월) 6시에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있습니다. 끝나고는 바로 첫 제안자 간담회를 할 예정입니다.

    * ‘쇳소리’는 전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말로, 무너지는 하늘까지를 이고 일어서는 저항의 소리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비나리’는 글을 모르던 시절부터 민중들이 자신의 삶을 읊조리던 형식으로 식자층만 쓰던 시와 다른, 민중들의 일반적인 생활 속의 시 형식이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자본과 권력에 짓눌려 진정한 자신의 언어와 표현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염원을 모으는 형식으로 ‘비나리’라는 우리말을 살려 쓸 필요가 있다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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