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향가 <안민가>,
    지도자의 도리와 지식인의 사명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8세기 신라인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은?
        2013년 09월 24일 04: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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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은 아비여
    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미여
    백성은 어린 아이라 할 때
    백성이 사랑을 알리라

    탄식하는 뭇 백성
    이를 잘 먹여 다스릴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
    나라를 보존할 길 아노라

    아,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 태평하리이다.

    위는 신라 향가 중 <안민가(安民歌)>다. 때는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년∼765년)대. 불국사, 석굴암,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봉덕사종 등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는 문화예술품이 만들어지던 문화 융성기이지만,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당시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탈출할 정도로 비참하게 살았다. 천재지변은 끊이지 않는데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고, 불국사와 같은 대형공사에 부역으로 동원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 해도 가뭄 세 차례(왕4년, 6년, 13년), 지진 두 차례(2년, 24년), 우박 두 차례(4년, 13년), 폭풍과 태풍 각 한 차례(8년, 22년), 낙뢰 두 차례(6년,17년), 혜성, 요성, 천구성 등 천상계의 혼란 8차례(3, 7, 18, 20, 23, 24년으로 이중 20년, 23년은 중복), 메뚜기떼 출현 한 차례(13년) 등 천재지변이 계속되었다. 흉년으로 기록된 것만도 6년과 14년 두 차례다.

    경덕왕 14년(755)에 작성된 촌락 문서인 일본 정창원(正倉院)의 <신라장적(新羅帳籍)>을 분석한 결과, 당시 조세와 부역은 16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정(丁)과 정녀(丁女)가 담당했는데, 한 집 당 논 9결 27부 5속, 밭 5결 64부 6, 뽕나무 91.3그루, 잣나무 약 11그루, 호두나무 약 10그루에 대해 노동해서 세금을 내야 했다.

    이렇게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으면 나라의 곳간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신라식 복지책이 발동되기 마련인데, 경덕왕 대에는 이런 기록이 전혀 없다. 경덕왕은 복지책을 펴기는커녕,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 왕이 거둥하여 군사를 사열할 정도로 큰 영묘사의 조영,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봉덕사의 종, 현존하는 에밀레종보다 7배 이상 커서 무게가 무려 149톤이나 되는 황룡사의 종 등 대형공사를 강행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제도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런 대형공사는 백성들의 조세를 바탕으로 한 재원확보와 부역을 통한 노동력 확보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흉년과 병마에 시달리는 백성이 과중한 세금을 물고, 가뜩 가뭄과 천재지변으로 손이 많이 가는 농사를 돌보지 못하고 국가의 부역에 동원되었을 때 백성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이고 그 원성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당시의 국가 총 경제 규모에 그와 같은 대형 공사에 투입된 노동량과 비용의 비율을 임의로 산출해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로 김사인, 이순 등 왕의 총신이 벼슬을 버리면서까지 극론으로 왕의 패정을 따지고 당대 최고 관직이었던 상대등과 시중들이 몇 년을 못 버티고 퇴직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향덕이 흉년이 들자 다리를 베어 부모를 봉양한 설화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고, <일본서기>에는 신라인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탈출하여 일본으로 오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위의 안민가 설화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표훈대덕조’의 설화다. 경덕왕이 아들이 없어 표훈을 통해 하늘에 아들을 청하자 하늘은 딸은 가하나 아들은 당치도 않다고 한다. 아들을 고집하면 나라가 위태롭고 이후에 하늘과의 교통이 끊어진다는 하늘의 명을 감수하고,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이를 아들에게 세습하려던 경덕왕이 고집하여 얻은 이가 나중에 혜공왕이 된 건운(乾運)이다. 그가 왕에 오르자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혜공왕을 죽인다. 경덕왕 대 이후 신라는 하늘과 통래가 끊겨 성인이 나지 않았다고 <삼국유사>는 기록을 맺고 있다.

    하늘에 대한 정통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당대에 경덕왕 대를 고비로 해서 하늘과의 통래가 끊겼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건운이 태어난 해가 왕 17년인 758년이니 이때부터 신라는 하늘과의 조화가 깨지고 서서히 분열을 맞았던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도 이후부터 신라는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지금의 총리직에 해당하는 시중마저 자신을 비난하며 궁을 떠나고 백성들이 신라를 떠나 일본으로 탈출할 정도가 되자, 경덕왕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승려인 충담사(忠談師)를 왕사로 모셔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경주보문 단지 보문호수 근처의 안민가 시비

    경주보문 단지 보문호수 근처의 안민가 시비

    충담사는 3월 3일이면 남산의 삼화령에 올라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경덕왕은 이 소식을 접하고서 그가 반월성의 서쪽문인 귀정문을 지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모셔서 백성을 편안히 하는 방략을 묻는다. 이에 충담사가 노래로 대답한 것이 바로 <안민가>다. 충담사는 경덕왕을 설득하기 위하여 가족의 비유를 통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는 대방략[安民大方]을 펼치고 있다.

    “자, 지금 신라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난이 일어날 듯 한 분위기인데, 가족으로 비유하자면 임금님은 지아비이고, 신하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는 어미입니다. 백성을 어린 아이라 하고 자식 사랑하듯 아비는 너그러움으로 다스리고, 어미는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펴주면 백성이 절로 사랑을 알고 부모님께 효를 다하듯, 신하와 임금께 충성을 할 것이니, 먼저 임금님과 신하부터 잘못을 성찰해야 하지, 백성을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백성을 잘 다스리는 방략은 간단합니다. 굶주리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잘 먹는 것입니다. 지금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줄여 잘 먹고 잘살도록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땅 신라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신라에서 뼈를 묻겠다.’라고 하면 나라가 잘 보존되는 것입니다.

    아, 아! 임금이 먼저 임금답게 백성을 사랑하여 잘 다스리고, 신하는 신하답게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잘 보듬어주면, 백성들이 절로 신이 나서 열심히 일할 것이요, 태평성대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노래를 마치자 경덕왕은 충담사를 왕사(王師)로 봉하였다. 하지만, 충담사는 이를 거절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당시 승려는 나라의 녹을 먹는 국사승(國師僧)과 백성들에게 탁발을 하며 그의 편에 섰던 동령승(動鈴僧)이 있었다. 충담사는 승려 중의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후자를 택한 것이다. 요새 말로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지식인의 입장에 선 것이다.

    지금 민중들의 삶은 경덕왕 때와 유사하다. 절반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이고, 쌍용자동차를 비롯하여 수십만의 노동자가 정리해고를 당하여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집값은 하락하고 전세와 물가는 폭등하고 교육비 부담은 가중되었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생존위기에 직면해 있고 미래는 불안하다.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신자유주의의 모순에 따른 양극화와 빈곤과 불안, 안철수 현상으로 대표되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 도가니 현상으로 대표되는 검찰을 비롯한 권력의 부조리와 부패에 대한 분노를 직시하고 보수노선을 일부 수정하여,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보완책인 경제민주화와 온정적 복지책을 수사적으로나마 내세웠다. 이것과 부정선거를 통해 그는 80% 가까이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가운데서도 정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복지책은 사기공약인 것이 드러났다. 박정희 정권 때도 법인세가 40%에 달하였는데 지금 법인세는 10%에서 22% 사이다. 현 정권은 부자들에게는 온갖 혜택을 부여하고,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세금폭탄을 쏟아 붓고 있다.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으로 촛불이 끊이지 않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불통을 고집하고 있다. 이에 대항할 진보는 괴멸 상태다. 이제 멀리 보고, 진보진영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강령을 만들고 종파를 떠나 하나로 연대하여 대항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지식인의 처신이다.

    600만이나 되는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하는 대참극을 겪고서 인류는 여러 모로 반성을 하였다. 사회학자 프리츠 파펜하임도 이 대열에 섰다. 그는 독일 지식인이 나찌에 협조한 것은 대학을 진리를 탐구하는 숭고한 상아탑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기에 지식인 또한 고고한 모습으로 진리를 탐구하면 되었지 그 진리가 인류를 대량학살하는 데 이용당하든 그런 정권을 합리화하는 이념으로 변형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 통에 하이데거 같은 대철학자마저도 존재와 총통을 동일시하고 히틀러에 협조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이론을 위한 이론, 맹목적인 서구이론의 추종, 패거리를 강화하기 위한 지식의 이데올로기화와 권력화, 서구 이론의 식민지적 답습, 승진과 업적 평가만을 위한 연구, 국가와 자본이 부여하는 먹이인 프로젝트 헌팅 등이 한국학계의 풍속도다. 극히 소수이지만, 이것을 거부하고 자본과 국가에 거리를 두고 진리를 탐구하면 왕따를 당하고, 현실에 대해서 발언하면 지식인의 고고함을 벗어나 정치적 행위를 하는 자, 혹은 ‘종북’으로 매도당한다. 아니, 많은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적 욕망을 내재하고 국가와 자본의 공세에 지치거나 주눅이 들어 침묵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대학은 스스로를 자본의 식민지로 전락시켰으며, 한국 사회는 대학으로부터 진리를 수용하여 문제를 개선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

    꿈이 없는 현실은 삭막하고, 현실이 없는 꿈은 망상이다. 비전이 없는 예술은 편협하지만 현실이 없는 예술은 공허하다. 마찬가지로 현실이 없는 진리는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이 모순에 차있다면 비판과 저항은 필연이다. 비판과 저항을 상실한 지식은 세계를 어둡게 한다. 그러기에. 진리란 항상 비전을 품되 당대 사람들이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지식인의 사명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극락왕생을 지향한 아미타불을 땅에 발을 디디게 한 것처럼, 신라인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비전을 지향하였다. 그런 지식만이 세계를 열어준다.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한다. 충담사가 몹시도 그립다.

    -이상 이도흠의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푸른역사, 2000)에서 발췌하고 수정함.

    필자소개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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