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혁명은 경쟁교육 광란 멈추는 것
    '대학입시 폐지' '대학평준화'가 교육개혁의 핵심
        2012년 06월 12일 12: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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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앞두고 너도나도 ‘교육개혁’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요즘, 교육개혁 방안을 둘러싸고 벌써 경쟁이 시작됐다. 정몽준 새누리당 전 대표는 최근 ‘특목고와 자사고의 단계적 폐지’를 골자로 한 대선 교육공약을 발표했다. 정 전 대표는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만들겠다.”며 10대 공약을 공개했다. 내용도 자못 파격적이다. ‘수능‧내신 위주로 입시제도 단순화’, ‘평준화 강화’, ‘특목고·자사고 폐지’를 주요공약으로 내걸었다.

    야당의 공약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또 교육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선행학습형 사교육 금지법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선행학습을 빙자한 사교육이 입시경쟁 격화의 주원인이라는 진단에 따른 것이다.

    이런 가운데 통합진보당은 국회 개원 날 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학등록금을 반으로 줄이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경선 부정 후폭풍으로 여론의 관심은 딴 데로 흘렀지만, 교육은 진보진영이 전통적으로 가장 자신감을 보이는 분야다.

    실현 가능성 여부는 일단 차치하자. 어차피 선거공약은 교육부 시정방침도 아니고, 선거 때가 아니면 유권자들이 언감생심 이런 꿈이나마 꿀 기회가 있겠는가? 문제는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그들의 피상적인 인식이다.

    단도직입으로 물어보자. 특목고와 자사고를 없애면 입시경쟁이 사라지는가? 사교육을 금지하면 공교육이 정상화되는가? 대학등록금을 반으로 낮추면 고등교육 기회가 균등화되는가? 대답은 단연 “아니오.”다.

    사교육비와 대학 등록금은 분명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느낌이다. 일시적으로 열을 낮추는 해열제나 고통을 줄여주는 진통제라면 몰라도, 이게 근본적 해법이 아니라는 건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해열제나 진통제를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들고 나와 떠드는 이유는 아마도 ‘표’ 때문일 게다. 언제부턴가 교육은 건드릴 때마다 표가 나오는 ‘표 자판기’가 되었다. 그만큼 교육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선거에서 표를 모으려는 선거전략이라면 할 말 없지만, 정치공학으로만 접근하면 문제만 더 꼬일 뿐이다. 원래 고질병이 깊어지면 비방이 난무하고 돌팔이가 설치는 법이다. 이젠 누구 말을 믿고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헛갈릴 지경이다. 복잡하게 꼬여버린 이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입시교육 중단 촉구 기자회견(사진=미디어오늘)

    학벌주의가 판을 치는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사회․경제적 자산을 선점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도 합법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 부유층은 자신의 권력과 부를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기 위해, 중산층은 피땀 흘려 이룬 안정된 지위를 사수하기 위해, 빈곤층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두들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교육에 올인 한다. 교육이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교육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는 역시 입시제도와 각종 선발시스템이다. 그 결과에 따라 주요 인적․물적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판가름 나고, 그에 따라 인생행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교육은 사회적 자산의 분배에서 독점권을 선취하기 위한 매우 민감한 정치투쟁의 장이고, 학교는 ‘조용한 계급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지는 곳이다. 입시제도 하나만 조금 바꿔도 난리가 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경쟁교육’이라는 고장난 브레이크를 바꾸여야만 한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대학입시에서 내신비중을 높이면, 부유층이 비교우위를 차지한 사교육 약발이 상대적으로 덜 먹힌다. 내신에서는 꾸준히 노력하는 성실파를 당할 재간이 없으니 족집게 과외도 잘 안 먹힌다. 더구나 우수학생이 몰리는 특목고․자사고에게는 내신이 쥐약이다. 명문대학들이 내신 반영비율을 낮추거나, 교묘한 공식을 동원해서 실질반영률을 줄이는 것은 부유층의 핸디캡을 제거해 주려는 ‘계급적 배려’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반대로 대학별 본고사나 고난도 논술을 강화하면 학교수업 의존도가 높은 빈곤층 학생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심층면접이나 입시사정관 전형에 들어가면 아예 대책이 안 선다. 별도의 ‘스펙관리 전담팀’을 두지 못한 빈곤층 학생들은 지도교사와 공모라도 해서 날조하지 않는 한 들이밀 자료 자체가 거의 없다. 현행 입시제도는 빈곤층 학생에게는 혼자의 힘으로는 기어오르기엔 너무 높은 벽이다.

    교육은 이제 더 이상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다. 거꾸로 현존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미래로까지 고스란히 전이시키는 ‘고성능 복사기’ 노릇을 하고 있다. 특별히 제작된 센서가 부착된 이 기계는 검은 부분은 더 검게, 하얀 부분은 더 하얗게 극단적으로 명암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교육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이 계승될 뿐 아니라 더 심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고성능 복사기’의 에너지원이 바로 ‘경쟁’이다.

    경쟁은 승자의 승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패자의 분투를 아름답게 칭송한다. 그러나 모든 경쟁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스포츠 경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공정한 규칙과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규칙이 어느 한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고 심판마저 노골적으로 편파 판정을 일삼는다면,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교육이 딱 그 꼴이다. 지금 우리 교육을 지배하는 경쟁체제는 부유층에게 유리한 규정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심판을 맡은 정부는 수시로 뛰쳐나와 직접 선수들에게 작전지시까지 한다.

    그런데도 이 역겨운 경쟁교육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노동운동을 통한 집단적 노력으로 인간다운 삶을 이룰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한국적 특수상황’에서, 교육 말고는 빈곤 탈출의 마땅한 통로가 딱히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은 ‘개천출신 용’의 신화가 완전히 박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허구로 드러난 신화에 매달림으로써 기약 없는 위안을 갈망하고, 사랑하는 자녀들(≒미래의 비정규직 노동자나 실업자들)을 승자가 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경쟁체제 속으로 등 떠미는 이 땅의 노동자들… ‘레 미제라블’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부자 필승 가난 필패’의 규칙은 공정한 규칙이 아니다

    경쟁은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불리한 편파적인 규칙이다. 자유경쟁이 무한정 허용되는 밀림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맹수에겐 천국, 사슴에겐 지옥이다. 경쟁은 빈곤층에겐 생사를 가르는 문제지만, 부유층에겐 전리품을 몰아주고 빛내주는 미덕이다.

    매년 볼 수 있는 대규모 입시설명회 모습

    경쟁교육은 빈곤층에겐 당첨확률 0.00000001%의 ‘로또복권’이지만, 부유층에겐 황금빛 미래를 약속하는 ‘천국행 티켓’이다. 경쟁에서 패배할 경우, 빈곤층은 낙오자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출구가 없지만, 부유층은 부와 권력을 동원해서 이길 때까지 ‘패자 부활전’을 할 수도 있다.

    지나친 경쟁으로 인한 교양의 결핍? 인성의 황폐화? 그런 건 먹고사느라 가정교육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한 빈곤층의 문제일 뿐, 젖과 꿀이 흐르는 부유층 가정은 이미 그 이상을 하고 있다. 그래선지 요즘 부유층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훨씬 적극적이고 자유로우며 창조적인 사고를 한다는 말도 들린다. 반대로 빈곤층이 밀집한 변두리 공립학교는 절도‧폭력‧욕설‧가출‧매춘 같은 ‘룸펜 프롤레타리아 형 범죄’가 날로 늘어 하루하루 진저리를 친다.

    이 ‘경쟁’이라는 키워드를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 교육문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주입식 교육방식은 한정된 시간에 최대한 많은 지식을 학생의 머릿속으로 이식하기 위한 필요악이고, 교사의 폭언과 폭력은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자기위안이요 자기기만이다.

    ‘문제학생’의 일탈행위 뒤에는 경쟁 탈락에 대한 공포와 절망‧분노가 도사리고 있고, 많은 선의의 학생들을 고통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천문학적 사교육비는 경쟁에서 남보다 앞서가려는 ‘과잉투자’의 결과물이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대학 등록금은 빈곤층의 고등교육 접근을 막으려는 ‘진입방지 턱’이다. 이렇듯 우리 교육에서 나타나는 거의 모든 병리현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경쟁’과 단단히 묶여 있다.

    이른 바 ‘SKY 대학’을 정점으로 층층이 서열화된 ‘학벌의 피라미드’는 우리사회 부와 권력의 분배구조를 날것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제19대 국회의원 299명 중 서울대 출신이 절반에 가까운 132명이나 되는 극단적인 현실은 명문대 입시에 온 가족이 목숨을 거는 또 하나의 극단적 현실을 확대 재생산 한다.

    초‧중등교육 파탄의 주범이 ‘경쟁’이고, 그 경쟁이 ‘명문대 입학’으로부터 발원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딴전 피우지 말고 여기서 열쇠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대학입시의 전면적 개편, 바로 ‘대학입시 폐지’와 ‘대학 평준화’다. 이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모든 교육개혁 담론은 자신은 알면서 남을 속이려는 기만이거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을 설득하려는 자기최면이다.

    한 때 우리 못잖게 대학서열이 고착화 되어 입시광풍에 시달리던 프랑스에서, 대학평준화를 단행한 뒤 오히려 초‧중등교육이 제자리를 잡고 대학 경쟁력도 높아진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한 것을 우리가 못할 이유는 없다.

    대학을 평준화하면 초‧중등교육은 그 순간부터 무모한 경쟁으로부터 해방된다. 사교육 수요가 사라지면 사교육비 걱정 또한 일거에 사라지고, 특목고니 자사고니 하는 변종 입시명문고도 원래 설립취지에 맞게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주입식 교육이 근거를 잃게 되면 교사들은 다양한 교육적 실천을 시도할 것이고, 학부모는 자녀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의 전인적 성장과 발달을 위해 교사와 머리를 맞댈 것이다. 이쯤 되면 가히 ‘교육혁명’이다.

    실마리조차 찾기 힘든 최악의 교육현실, 이젠 변죽만 울리지 말고 쾌도난마로 핵심을 정확히 내리쳐야 한다. 다가오는 대선, 진보진영이 ‘교육혁명’ 공약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교육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꿈을 꾼다. 많은 분들과 그 꿈을 함께 나누고 싶다.

    필자소개
    전교조 서울지부장과 대변인을 지냈고, 현재는 고척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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