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의 시스템’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하는 사회
    [책소개]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다카하시 데스야/ 돌베개)
        2013년 09월 15일 01: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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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전후 일본(戰後 日本)의 국책이었던 원전 추진 정책에 잠재된 ‘희생’이 어디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지를 폭로했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전후 일본에서 헌법보다도 더 우월한 국체적 지위를 차지해 온 미일 안보체제에서 ‘희생’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보여 준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원자력발전과 미일 안보체제를 각각 ‘희생의 시스템’으로 파악하고, 나아가 전후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희생의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머리말’ 중에서

    전후 일본 사회의 본질적 구조…‘희생의 시스템’

    이 책은 현대 일본 사회를 통찰한 철학 에세이다. 철학자이며 도쿄대 교수이기도 한 저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전후戰後 일본(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 즉 현대 일본) 사회 속에서 ‘희생의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찾고 그 대표적 예로 원자력발전(후쿠시마)과 미일 안보체제(오키나와)를 지목한다.

    국가와 희생 등의 테마로 현대 일본 사회의 특징을 성찰하며 그 어두운 면을 예리하게 비판해 온 그가 정의한 ‘희생의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희생의 시스템에서는 어떤 자(들)의 이익이 다른 것(들)의 생활(생명, 건강, 일상, 재산, 존엄, 희망 등등)을 희생시켜서 산출되고 유지된다. 희생시키는 자의 이익은 희생 당하는 것의 희생 없이는 산출되지 못하고 유지될 수도 없다. 이 희생은 통상 은폐돼 있거나 공동체(국가, 국민, 사회, 기업 등등)에 대한 ‘귀중한 희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저자는 나아가 ‘전후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도 ‘희생의 시스템’으로 볼 수가 있다고 말한다. 위험이 따르는 이익에 대해 ‘향유자’와 ‘희생자’가 언제나 분리되는 사회. 저자는 그것을 ‘희생의 시스템’ 나아가 일종의 ‘식민지주의’라고 부른다.

    후쿠 오키

    왜 후쿠시마와 오키나와인가?

    이 책은 일본 사회에 내재된 희생의 시스템을 선명하게 폭로하는 두 가지 키워드로 ‘후쿠시마’와 ‘오키나와’를 지목한다.

    이 책에서 후쿠시마는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어난 중대사고(severe accident)와 그 영향에 관한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명칭이다.

    저자가 후쿠시마를 ‘희생의 시스템’으로 지목한 까닭은 1)원전이 지어진 도호쿠 지역이 아닌 타 지역, 도쿄 수도권 지역의 사용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건설되었고, 2)항시적인 피폭노동(발전소 가동, 연료 채굴),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등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던’ 이 희생의 시스템이 2011년 3월 11일의 대지진으로 인해 ‘중대사고’가 되어 가시화된 셈이다.

    즉 원자력발전이란 그것을 추진하는 순간부터 이미 희생(사고, 피폭노동 등)을 상정하며, 특정인(도시부 사람, 지역 정치가 등)의 이익을 위해서 타자(변방, 피폭 노동자 등)에게 모든 희생을 떠넘기는, 국가적 희생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저자의 정리다.

    한편 오키나와는 주일 미군 전용시설(미군기지) 면적의 약 74%가 집중된, 기지 부담의 중압에 시달리는 섬의 명칭이다. 패전 이후로 일본의 국가 안보 축이었던 미일 간 안보조약을 지탱해온 것은 이 오키나와 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오키나와 역시 국가가 이곳에 지속적인 희생을 전가함으로써 ‘본토’의 평화를 유지해 온 희생의 시스템이다. 과거 독립 왕국으로 존재한 적도 있는 일본 최남단의 오키나와는 1)태평양전쟁 말기에 가혹한 전투의 전장이 되어 일본 ‘본토’를 대신해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었는데, 2)일본 패전 후에는 그 ‘대가’로 미군의 시정권 아래에 놓이게 되어 현재까지도 섬 전체 면적의 큰 부분을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일방적 부담으로 인한 토지 수탈, 폭음 피해, 기체 추락, 미군에 의한 폭행 등 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피해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특정 지역’을 위해 이익을 만들어 내면서도 이익의 향유자들로부터 잊혀지거나 무시돼 온, 그리고 가끔씩 ‘감사받아’ 온 대표적 희생의 지역인 후쿠시마와 오키나와는 이제 일본에서는 정권교체를 좌우하는 핵심 이슈가 되기도 하는 등 커다란 문제가 되어 국민적 규모로 가시화되고 있다.

    이 사태에 대해 저자는 묻는다. 이 두 지역에 보이는 이러한 구조가 일본 사회를 구성해 온 것이 아닐까? 경제성장과 안보 같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희생’하는 시스템은,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

    현대 일본 사회를 읽는 새로운 시각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저자는 제2차대전 패전 이후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일본 군국주의와 궤를 같이하는 ‘희생의 논리’가 현재까지의 일본 사회를 하나로 관통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 예는 20세기 초의 관동대지진에서부터 3·11대지진과 같은 재난을 맞을 때마다 불거지는 희생자에 대한 사회 각층의 ‘천벌론’이다. 대지진·쓰나미 등의 재난이 하늘이 내린 ‘처벌’의 소산이며 그 ‘희생’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속죄’받는다는, 정치가·종교가·작가·학자 등을 막론하고 폭넓게 공유되고 있는 논리를 말한다. 이는 모두 타인의 피해를 ‘천벌’이라 부르고, 살아남은 사람이 피해자들을 일방적으로 ‘희생’ 또는 ‘속죄양’이라 명명하며 사회의 ‘죄갚음’을 도모하기 위해 의미 부여를 하는 행위다.

    이러한 현상이 ‘이익은 자기가 갖고’ ‘희생은 남에게 전가하려 드는’ 희생의 시스템과 닿아 있는 메커니즘임을 저자는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적으로 밝혀낸다. 정치인의 담화문, 천황의 메시지가 담긴 편지, 저명한 인사의 저술, 전문가의 강연 내용,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댓글 등 다양한 텍스트 안에서 발견되는 국가주의와 ‘희생의 논리’가 분석의 대상이 되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여러분에게 기준을 제시한 것은 국가입니다. 나는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지침에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과학자로서는 100밀리시버트 이하에서의 발암 리스크는 증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불안 속에서 장래를 비관하기보단 지금 안심하고, 안전하다 생각하고 활동해 달라고 계속 말해 왔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100밀리시버트의 누적 피폭선량에 리스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 국민입니다.” ―후쿠시마 현 초빙 방사선건강리스크 관리고문 야마시타 슌이치山下俊一(2011년 5월 3일 니혼마쓰 시에서 한 강연)

    이렇게 정치·행정적 입장에서의 판단을 우선한 나머지, 과학자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린 위와 같은 발언 또한 저자는 100년 전의 일본처럼 ‘진리를 국가에 희생하는’ 발언이라 비판한다.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적인 다수결 원리조차도 오히려 소수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으로 사용되는 현대 일본 사회의 맹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미일 안보체제’, ‘버블경제’, ‘잃어버린 10년’-‘잃어버린 20년’(1990년대의 장기불황이 20년 넘게 계속되자 2010년 무렵부터 등장한 말) 등 현대 일본 사회를 표현하는 많은 용어들이 있었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희생’을 향한 시각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 사회를 읽는 새로운 맥락이 손에 잡힌다.

    ‘고향의 불행’으로 촉발된 실천적 성찰

    이 책은 전문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과 같은 배경지식 없이도 현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과 철학적 성찰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그 가운데는 유소년기를 보낸 고향 후쿠시마에 대한 저자의 시각과 감정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저자는 소년 시절, 현재는 방사능 위험 경계구역으로 지정된 도미오카마치(富岡町)에서 실제로 살기도 했었다. 직접 살았던 고향의 대재난을 목격한 슬픔, 이제는 도쿄 수도권 주민이라는 일종의 ‘가해자’이기에 느끼는 죄책감, 무엇보다 자기 자신조차 희생의 시스템을 내재화한 한 사람이었음을 자각하게 된 고통 등 저자의 긴급하고 절실한 집필을 이끈 감정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러한 절실함 때문에 더욱 깊이와 무게를 지니게 된다. 이 책이 다루는 구체적 사실의 범위는 전문서들에 비해 소략하지만,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 마피아, 오키나와 문제의 본질, 그리고 진실을 어떤 전문서들보다도 압축적으로, 감명 깊게 보여 준다. 나아가 희생의 시스템 안에서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일부가 되어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저자가 보이는 ‘수도권 사람’, ‘일본인’, ‘인간’으로서의 자성적 시각은, 일찍이 전후 일본을 ‘무책임 체제’라 설명했던 비판적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정신적 태도를 계승하면서도 그보다 한층 더 나아간 실천적 사고라 평가될 만하다.

    희생의 시스템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희생의 시스템’으로 거론될 만한 지역과 이슈를 떠올려 보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 사고와 부실의 위험성과 은폐 논란이 끊이지 않는 원자력발전소와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원전 생산 전력을 먼 도시까지 보내기 위한 송전탑, 안보를 위한 해군기지, 노동자의 지속적 죽음을 방치하는 반도체 공장 등등.

    ‘희생의 시스템’은 후쿠시마 밖, 오키나와 밖, 일본 밖에도 분명하고 공고하게 존재한다.

    희생을 부담 지우는 쪽과 부담하는 쪽이 일치하지 않는 구조가 존재한다면, 그래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안심하고 계속 희생을 부담시키고, 그 희생의 시스템을 계속해서 유지하려 하는 그런 시스템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희생의 시스템’은 단지 일본 사회를 읽어내는 잣대에 그칠 수 없는 것이다.

    국가 위정자들은 자신이 당연히 살아남는 9할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1할의 희생되는 쪽에 속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어떤 자들(9할)의 이익이 다른 것들(1할)의 희생으로 생겨나고 유지된다. 이런 경우 국가 위정자는 통상 자신들을 이익을 얻는 쪽에 포함시키는 법이다.

    일반 국민·시민 중에도 이런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어느 쪽에 두고 있을까. 희생당하는 1할 쪽일까, 그 희생으로 살아남는 9할 쪽일까. 9할 쪽에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희생을 타자에게 떠넘길 권리를 도대체 어디에서 얻어 오는 걸까. 이런 일련의 의문들이 제기된다. 이 의문들에 대해 자신의 대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공동체를 위해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습관적으로 되뇌이는 데 습관이 된 모두에게 다카하시 데쓰야가 정면으로 제시하는 ‘희생의 시스템’의 존재는 피할 수 없는 물음을 건네며 성실한 모색의 장으로 손짓한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이 있어야만 유지되는 사회가 정상일까?” 저자는 이 보편적 질문은 사회의 ‘희생’에 대해 완전히 새롭게 성찰할 것을 촉구한다. 저자의 말대로, “문제는 그러나 누가 희생이 될 것이냐는 게 아니다. 희생의 시스템 그 자체를 없애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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