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년만의 귀국…정보부의 감시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
    [파독광부 50년사] 탄압과 구속 각오한 귀국<검정밥-25>
        2013년 09월 12일 03: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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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어머님이 귀국하신지 칠 년째 되는 해였다. 서울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내장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아마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하면서 내가 귀국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언제고 이러한 전화가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막상 전화를 받고 보니 눈물이 앞섰다. 나는 가겠다고 대답했다. 막상 간다고 했으나 두려움도 생겼다. 중앙정보부의 횡포를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고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이려면 죽이라’ 생각하고 두려운 마음에 용기를 넣었다.

    회사에 휴가를 한 달 내면서 어쩌면 한 보름 더 필요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 하고는, 광주학살사건 데모 이후로 가까이 지내던 사회당 연방의회 위원인 W씨와 루르석탄주식회사의 법률담당 사무실에 동생의 서울 전화번호와 주소를 주면서 만약 내가 6주 후에도 독일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는 여기에 전화를 하고 서울에 있는 독일 대사관과 독일 연방정부의 외무부와 국제사면기구에 연락을 하라고 부탁을 해 두었다.

    1월 말에 서울 가는 비행기를 탔다. 23년 만에 가는 고국이었다. 기쁘고 즐거워야 할 귀향이 슬픔과 두려움이 될 줄 뉘 알았으랴? 비행기는 북극을 둘러 거의 24시간 만에 드디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출구로 나가면서 23년 만에 밟아보고 맡아보는 조국의 땅과 공기를 가슴속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인식하고 있었다.

    23년만에 만나는 조국, 왜 조국에 왔는지부터 물어

    입국 검열 직원에게 여권을 내밀었다. 검열관이 컴퓨터에 내 이름을 넣으니까 모니터 화면이 가득 찼다. 모두 4면이나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엇을 느꼈다. 내 앞에 있던 사람은 화면에 글이 적힌 줄이 하나밖에 없었던 것을 내가 보았기 때문이었다.

    검열관은 전화기를 들었다. 누구에게 보고하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걸고 난 후에 나더러 들어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창자가 꿈틀거리는 것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침착하고 고분고분해라’는 경고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내 조국에 내가 들어오는데, 왜 들어오느냐고 묻는 것은 무슨 뜻이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모든 이성을 제쳐놓고 튀어나왔다.

    검열관도 그 대답은 기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얼버무렸다.

    “아 …, 예 …, 사업차로 들어오시는지 혹은 다른 일로 …”

    그가 대답하는 동안 나는 침착성을 다시 얻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귀국한 사연을 말해주었다.

    “얼마나 계실 예정입니까?”

    그가 또 물었다.

    나는 한 달, 길면 한 달 반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계시는 동안 조용히 계셔 주십시오.”

    그는 당부하는 말과 함께 내 여권을 돌려주었다.

    대합실로 나오니까 동생과 조카들이 마중을 나왔다. 조카들은 재하와 윤님이 외에는 처음 보는 아이들이었다. 동생은 나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소리로 말했다.

    “오빠,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 엄마가 실성한 사람이 되셨소. 그저께 엄마께 오빠가 온다고 했더니 충격을 받으셨는지 갑자기 본성을 잃어버리고 헛소리를 하시면서 아무도 몰라보시지 않겠소. 어제 병원에서 집으로 모시고 왔지요. 오빠 어떻게 하면 되겠소?”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엇이 무엇인지, 어떻게 된 사연인지, 가슴속에서 만 가지가 얽히고설키는 것 같았고 머리 속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시계의 태엽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동생의 어깨를 꼭 껴안으면서 우선 집으로 가자고 했다. 조카 재하가 몰고 온 차를 타고 어머님이 계시는 동생의 집으로 왔다.

    방에 어머님이 옆으로 누워서 몸을 오그린 체 무엇이라고 흥얼거리고 계셨다. 누워 계시는 어머님의 몸이 한 무더기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님을 바싹 껴안았다. 어머님은 계속 헛소리를 하시면서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셨다. 내가 어머님의 손을 잡으니까 어머님은 그 마르고 뼈밖에 없는 손가락으로 내 손을 잡으셨는데 내 손이 아플 지경으로 온 힘을 다하여 잡으시고 놓지 않으셨다.

    그럴 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가 조카 재하를 보자고 한다 했다. 얼마 후에 재하가 들어오더니 정보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하면서, 저와 내가 어떤 사이이며 내가 왜 한국에 왔는지 묻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이 재하에게 매일 자기들과 만나서 내가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는지 보고하라고 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들이 내가 입국검열소와 세관을 거쳐 나오자마자 내 뒤를 따라왔고, 재하 차의 번호를 보고는 차 임자가 누군지 알아낸 후에 재하를 불러낸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재하에게 내일 그들을 만나면 내가 직접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라고 했다.

    이튿날 재하가 중앙정보부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한 말을 전해주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고 했다. 나 하나를 위해서 두 사람이나 배치시키는 정부의 처사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위험하면 잡아 가두든지 아니면 자유로이 움직이게 하면 되지, 국민의 세금을 그런 식으로 남용하는 어리석고 썩은 정치가 한심스러웠다.

    어머님은 계속 실성하신 상태로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주야로 알 수 없는 노래만 하시니 몸은 점점 더 마르고 여위어지셨다. 그러나 무엇을 잡으시면 놓지 않는 힘은 더 세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님의 병세는 여전했고, 우리는 어머님께서 이제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박종철 열사 장례식…“집에서 나가지 마라”

    2월 중순에 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박종철 군의 장례식이 명동성당에서 있다고 했다. 나는 그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집을 나갔다.

    동생의 집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집 아래에 주차장이 있었다. 집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니 젊은이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면서 이 선생님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오늘은 바깥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내 속이 또 뭉클거리기 시작했다.

    중정

    퇴계로 쪽에서 바라본 남산 중앙정보부 본청 전경. 왼쪽 안테나가 솟은 본관 건물 밑이 그 유명한 ‘지하실'(출처:엔하위키)

    그러나 불쌍한 인간들 상관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니 그들과 말다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밑에 가게에 가서 담배라도사겠다고 하니 자기들이 사오겠다고 했다. 한 사람이 담배를 사러 간 동안 나는 나와 함께 있던 젊은이를 자세히 보았다. 그의 체격은 단련되어 있었고 그의 손은 농촌의 솥뚜껑 같았다. 태권도를 연마한 사람이었다. 나는 평소에는 어디에서 일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경관이라고 했다. 이 사람들에겐 죄가 없었다. 위에서 시키니까 잔인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옛날 고향의 이웃에 있던 한씨를 생각했다. 그는 개를 키웠는데 강아지가 어렸을 때 강아지의 코에다 식초를 불어 뿜었다. 개가 견디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좋아하면서, 이렇게 해야 개가 사나워진다고 했다. 나는 그 젊은이들이 한씨네 개와 같아서 불쌍했다.

    두 주가 지나고 삼 주가 지났으나 어머님의 병 증세는 변함이 없었고 잡수지 못하고 마시지 못해서 기운이 점점 쇠약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끝이 온 것 같았다. 어머님의 숨결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고 사지는 축 늘어져 있었다. 어머님 친구되시는 백 권사께서 어머님의 귀가 뒤로 처지는 것을 보시고는 끝이 왔으니 목사님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얼마 후에 옥인교회의 목사님과 많은 교인들이 들어왔다. 임종예배를 보았다.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이 어머님께 이별을 하라고 했다.

    나는 어머님의 귀에 입을 대고 “엄마” 하고 나지막하게 불렀다. 나는 이 순간 무엇을 느꼈다. 어머님이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다. 나는 또 한번 “엄마” 하고 불렀다. “오냐, 왔나.” 힘없는 나지막한 음성이 나에게 들려왔다.

    그 순간부터 나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체험했다.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몸과 팔다리가 따뜻해지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인들은 하느님께 감사 찬송을 올리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약 두 시간 후에는 어머님이 나를 알아보시고 미음도 드셨다. 나는 어머님의 손을 잡고 제 정신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다. 기적만 같았다. 동생은 만약 엄마가 실성한 채 돌아가셨으면 평생 하느님과 함께 사시던 분이 얼마나 은혜롭지 못했을 것인가 하면서 즐거워했다. 그 이튿날 어머님은 앉을 수 있었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어머님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자기가 죽어서 천국으로 갔는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대추나무 아래에서 앉아 계시다가 어머님을 보시고는 반가워하시면서 ‘너는 너무 일찍 왔으니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어머님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얼마나 밝고 평화스러웠던지 그곳에 있고 싶었고, 그렇게 환하고 밝았으나 눈이 부시지 않더라고 하셨다. 나는 서구에서 가사상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야자수 아래에 계시더라는 글을 읽은 기억을 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야자나무와 대추나무에 있구나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어머님의 건강이 차츰 회복되는 것을 보고, 나는 고향 부산에 내려가고 싶었다. 23년 만에 찾아가는 고향이었다. 하룻밤 묵고 오기로 계획하고 이튿날 가기로 결정했다. 밤중에 부산에서 막차를 타고 조카 부부가 왔다. 그들은 할머니의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보고 기뻐했고, 내가 내일 첫차로 부산에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자기들도 함께 내려가기로 했다.

    나는 이종사촌 누님과 조카딸 지현과 조카 부부와 함께 부산으로 갔다. 부산 역에는 모든 친척들이 마중을 나왔다. 나는 우선 이모님들이 기다리고 계시는 외삼촌댁으로 가기로 하고 다른 친척들은 저녁에 다시 만나자고 하고는 헤어졌다.

    영도다리 땜에 간첩으로 의심 받은 사연

    그날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났다. 나는 연로하신 이모님과 외숙모님 그리고 사촌 형님에게 드릴 선물을 지참하지 못해서 용돈으로 몇 푼씩 드리려고 은행에 가서 돈을 바꾼 후 동삼동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네 시 조금 전이었다. 나는 영도다리가 보고 싶었다. 옛날에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다리를 들던 것을 기억하고는 영도다리 드는 것을 보려고 했다. 다리가 하늘을 치솟다시피 높이 들리면 그 아래로 높은 돛대를 세운 큰 배들이 지나가는 광경은 장관(壯觀)이었다. 그래서 나는 택시 운전수더러 영도다리로 가자고 했다.

    영도다리의 1960년 모습

    영도다리의 1960년 모습

    “어느 다리요?”

    그가 물었다.

    “어느 다리가 무슨 말이요? 영도다리로 갑시다.”

    나는 그에게 거듭 말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영도다리가 또 하나 건설된 것을 나는 몰랐다.

    나는 다시 “다리 드는 것을 보러가자” 고 했다.

    나를 이상하게 여기며 쳐다보던 운전수는 “예” 하면서 달렸다.

    나를 태운 택시가 선 곳은 영도다리가 아니었고 경찰서 앞이었다. 나는 간첩으로 신고되었고 간첩으로 잡혔다. 영도다리가 그 사이에 두 개나 되는지도 몰랐고, 다리를 들지 않은지가 몇 년이나 되는데 갑자기 다리 드는 것을 보러가자고 했으니 간첩일 수밖에 달리 볼 수가 없었다. 순경이 서슬이 시퍼렇게 나를 호령하기 시작했고 내 몸을 수색하고 신분증을 조사했다. 그러는 중에 다른 젊은 사람이 들어와서 그 순경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순경은 지금까지 엄하던 안색을 바꾸고 나에게 내 여권을 돌려주면서 말했다.

    “독일에서 오셨군요. 몇 년 만에 오신 겁니까?”

    “꼭 24년만입니다.”

    “고향에서 잘 계시다가 돌아가십시오.”

    그는 지금까지의 엄한 표정을 바꾸고는 친절하게 나를 놓아주었다. 처음으로 나는 중앙정보부의 덕을 봤다.

    나는 밤이 늦을 때까지 친척들을 방문하고는 조카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촌 누님 댁으로 갔다. 그 이튿날 아침을 먹으며 경주에 계시는 이종누님이 보고 싶은데 이모님들의 의향이 어떤지 물었다. 큰 이모님은 경주에 사는 딸을 보고 싶어 하셨고 작은 이모님도 함께 가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경주로 떠나기로 하고, 가기 전에 아직 동삼동에 계시는 보덕 군의 어머님을 뵈러갔다. 모친께서는 몸이 편찮으신지 누워 계셨다. 누워 계신 모친을 보니 친구의 생각이 간절했다.

    친구의 모친과 이별을 한 후 나는 두 이모님을 모시고 이종누님과 지현과 함께 경주를 둘러서 서울로 가기로 하고 동삼동을 떠났다. 23년 만에 보는 고향에서 겨우 하룻밤을 보낸 후에 다시 고향과 이별을 했다.

    서면 버스 정거장에 오니 친구 보덕이가 부인과 함께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를 보는 나는 너무도 기뻤다. 너무도 짧은 재회를 안타까워하면서 친구가 사주는 차표로 우리는 경주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경주에서 누님을 뵙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둘러본 후에 저녁 막차를 타려고 이모님들과 이별하고 역으로 갔다.

    내가 부산을 떠난 후에 부산 정보부에서는 야단이 난 모양이었다. 오후에 그 사람들이 동생과 만났을 때 동생이 형님은 오늘 아침에 갑자기 일정을 바꾸어 경주로 갔다고 했다. 그들은 내가 동삼동에서 머물다가 저녁차로 서울로 올라갈 줄 알았다. 나를 놓친 그들에겐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경주의 서울행 버스 정거장과 비행장과 기차역에는 정보부 사람들이 배치되었다. 내가 저녁 무렵에 경주 기차역에서 표를 끊고 누님과 지현이와 개찰구를 통과하니 저쪽에서 한 중년신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는 나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이정의 선생님이시죠.”

    “예”

    “제가 어디에서 온지 짐작하시겠지요?”

    “녜, 짐작이 갑니다. 내 때문에 고생이 많습니다. 내가 괜히 경주로 와서 여러분의 심신을 괴롭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희들이 오히려 이 선생님을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여행은 재미나게 하셨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자기가 받아 들고 차내 좌석까지 친절하게 인도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온갖 친절을 베풀면서 물었다.

    “이 선생님, 경주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울에서 출발하실 때는 모두 다섯 명이셨는데 두 분은 어디에 갔습니까?”

    그의 질문은 겸손하고 친절했으나 칼날처럼 날카롭고 명확했다.

    “경주에는 내 이종사촌 누님이 계십니다.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누님도 뵈올 겸 이모님들을 모셔드리려고 경주에 왔습니다. 부산에 갈 때 다섯 명 중에는 부산에 사는 조카부부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부산에 남고 우리 셋만 서울로 다시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는 나더러 여행을 잘 하라고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그가 한 말 중에 ‘내려갈 때는 다섯 명’이라는 것에 주춤했다. 서울의 조카 재하는 내가 부산에 간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밤중에 조카 내외가 와서 나와 함께 또 부산으로 아침 첫차를 타고 내려갔다는 것은 몰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다섯 명’이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그들이 항상 나를 감시했다는 것을 알았다.

    차에서 내린 그 사람이 대합실 앞에서 어떤 젊은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얼마 후에 그 젊은이가 우리가 있는 칸의 입구에 놓인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는 나의 눈길을 피했고 손에는 월간지 하나만 들고 있었다. 여행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한국이 싫어졌다. 어떤 지루한 3급 스파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내 조국에서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내 조국이 아니다. 나는 어머님 곁에서 삼일만 더 있다가 독일로 떠날 계획을 했다.

    기차가 대전역에 왔을 때 문 곁에 앉았던 그 젊은이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그의 뒤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출구 곁에서 누구와 말하면서 내 쪽을 보았다. 나를 넘겨주는 모양이었다. 조금 있으니 바깥에서 이야기하던 다른 젊은이가 입구 옆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이제 다른 놈이 나를 감시 하는구나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누군지 아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었고 이상하게 여길 필요도 없었다. 서울 역에 도착하자마자 그 사람은 일찍 차에서 내렸는데, 우리가 역에서 나올 때 저쪽 편에서 다른 젊은이 둘과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나는 눈치 챘다.

    나는 그 이튿날 항공사에 가서 삼일 후에 출국일자를 확정했다. 나는 남은 날을 어머님과 함께 즐겁게 보냈다. 내가 어머님 곁을 떠날 때는 어머님께서는 이번에는 울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 사는 것을 보고 왔기 때문에 나는 걱정 없이 주님께 갈 수 있다. 너는 불효라고 생각하지 말라. 부모가 죽을 때 눈을 감겨주는 아들도 효자이지만, 부모가 죽을 때 자식 걱정하지 않고 죽게 하는 것도 효자니라.”

    이번에는 내가 울었다. 그 가냘픈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오늘 우리는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을 하는 것을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님의 잡은 손을 놓는다는 것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분명한 영원한 하직을 의미했다.

    14년 그리고 7년, 이제는 영원한 이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별의 길로 간다고 했지만 어찌하여 우리 모자간에는 이토록 이별이 잦단 말인가? 첫 번에는 14년, 둘째 번에는 7년, 이제는 영원한 이별.

    온갖 정성과 공을 다 들여서 얻은 독생자, 노년에 자식영화는커녕 그렇게 보고 싶던 아들을 따라 천만리 머나먼 물설고 낯선 타국에 갔다가 향수에 견디지 못해서 다시 아들의 곁을 떠나야 하셨던 어머님, 손자도 업고 키우면서 즐거운 여생을 보내려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하나뿐인 아들의 손으로 눈도 감기우지 못하는 인생의 마지막 며칠을 눈앞에 두고서도 오히려 아들을 위로하시는 어머님. 메마른 어머님의 양 손에 내 얼굴을 파묻은 채 나는 울었다.

    내가 다음에 어머님의 곁에 설 때는 이제 나의 눈물로 가득 찬 어머님의 이 손은 불러도 대답이 없는 무덤 안에서 썩어서 뼈만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독일로 가지 말고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이 손을 잡고 어머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나를 독일로 돌려 보냈다.

    그로부터 반 년 후, 1987년 7월 4일 어머님께서 전화가 왔다. 나더러 하느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라고 하시면서 자기는 삼일 후에 주님나라에 가신다고 하셨다. 나는 말로는 어머님 무슨 쓸데없는 그런 말씀을 하시느냐고 나무라듯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어머님의 말씀을 믿었다. 어머님은 하느님과 함께 사셨다. 어머님은 앞을 보고 계셨다. 사흘 후에 어머님은 향년 80세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숙모를 친어머니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모셨던 동생 수연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아무리 사촌끼리 형제처럼 지난다고 하더라도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친딸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효성을 친 엄마도 아닌 숙모에게 조카딸의 신분으로서 했다는 사실에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동생이 어머님에게 해드린 모든 일은 내가 했어야 할 일이었고, 동생이 한 모든 효도는 내가 해야 될 나의 의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머님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동생이 부러웠다. 효도를 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요 은혜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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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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