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가 '개독교' 된 이유
    [비판과 비평]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3
        2013년 09월 12일 11: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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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아니 종교란 무엇인가? 이성과 믿음은 과연 대립하는가? 라는 화두는 늘 우리 곁에 존재하며 제기되는 화두이다. 이 주제는 특정 종교에 대한 호기심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주제이고 실천의 그림자이다. 이 묵직한 화두에 대해 무신론자 남종석씨가 테리 이글턴의 책을 소개하며 신을 옹호하는 비평 글을 보내왔다. 글 분량이 길어 3차례에 나누어 게재한다. 필자가 신학자가 아니기에 다른 해석, 다른 접근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이 비평 글에 대한 재비평 혹은 반론 등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편집자>

    *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2 ‘교회 공격한 책이 바로 성경’ 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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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원시 기독교와 오늘날의 기독교

    기독교는 원래 유대어로 ‘아나빔’,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략 ‘하찮은 인간’들을 대변하면서 신뢰를 키워간 종교다. 예수는 창녀를 옹호했고, 어부를 자기 제자로 삼고, 전염병이 든 사람들, 버림받은 앉은뱅이의 친구가 되었다.

    대신에 그는 부자들을 경멸했다. 그는 내일을 위해 부를 축적하는 자들에게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고 일갈한다. 부자가 된 청년이 자신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는 가진 것은 헐벗은 자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집도, 먹을 것도 없는 유랑자였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였다. 이것은 이민자를 환영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연대를 보내며, 쫓겨난 세입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기꺼이 인정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구원은 약자와의 연대의 문제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예수는 타인을 위해 육체를 끔찍하게 하는 고통을 전시하면서 그 극단을 보여준 이다.

    실제로 기독교가 로마 지배시기 급속하게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를 덮친 전염병과 무관하지 않다.

    로마는 서기 100년경, 200년경 두 번에 걸쳐 큰 전염병이 덮친다. [전염병의 역사](2005, 이산)라는 책을 보면 나오지만, 어떤 도시에서는 인구의 1/3이 죽어간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 질병을 천연두나 홍역으로 추측한다.

    전염병이 돌 때 대부분의 공동체는 공포에 휩싸여 병자들을 격리시킨다. 전염병의 원인이 미생물들이었기 때문에 2000년 전의 공동체에서는 미생물에 대항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으며, 전염병 확산을 막는 방법이라고는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원시기독교 공동체는 주류 사회와 정반대의 처방을 내 놓았다. 그들은 예수가 그렇게 했듯이, 병자들을 공동체 내부에 두면서, 먹을 것을 주고, 간호했다. 특별한 백신이 없던 시절, 질병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음식을 주고, 간호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질병으로 인한 치사율이 낮았다. 공동체가 질병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했던 것이다. 그들은 간호다가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으면 아버지의 나라에 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가 일으킨 기적의 의미다. 그가 초자연적인 힘으로 병을 낳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에서 버림받고 헐벗은 자들을 돌봄으로써 그들을 살렸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공동체 문화는 강한 흡입력을 지니고, 약자들 버림받은 자들로부터 환영받았을 것이다. 이게 바로 기원 후 2~3세기 경 기독교가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오늘날 기독교는 딱 정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의 편에 서 있으며, 승리한 자에게 축복을 내리고 패배한 자에게 잔혹한 형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형제 폐지를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자들도 기독교인이고 사형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떠벌리는 자도 기독교인이다. 그들에게 용서는 오로지 신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한정되고, 지옥의 존재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보상이다.

    대학교에서 커닝을 없애자는 데에 목숨 걸면서도, 재개발로 쫓겨난 세입자들의 절박한 처지는 애써 무시하는 인간들이 기독교도들이다. 이민자들에게 더 큰 장벽을 둬서 그들을 서구 사회로부터 쫓아내야 한다고 기독교 우익들은 주장한다. 기독교는 복음의 이름으로 제국주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의 세계 선교회도 이런 경쟁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기독교에 대한 대부분의 분노는 정의감에서 비롯된 지극히 올바른 것이다.

    결국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로 전락해버렸다. 교회가 점차 구원받은 자들의 자기 위안의 공간으로 변질되고,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외부를 부정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마치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민족 이었듯이 자신들은 선택받은 피조물이라 생각한다. 외부 세계와 소통이 약화됨으로써 내부의 근본주의가 더 커져간다. 정화 능력이 약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약속을 배반한 것을 두고 기독교만 비난할 수 없다. 현재의 타락한 모습을 두고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도 정당하지는 않다. 원래 모든 이념은 그 순수한 목적과 그 실현태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 이런 것의 예로써 자유주의보다 더 극명한 게 있겠는가?

    자유주의는 개인의 삶은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원리에서 출발한다.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토대로 자유주의는 성립된다. 재산, 신체의 사용에서부터 양심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 이로부터 관용이 나오고,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가 나오는 것 아닌가?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사회를 보다 진보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이상은 자유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자유주의가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했는가? 답은 부정적일 것이다. 시장은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도록 했고 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했다.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가 자유주의 체제에서 심하게 이탈한 비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19세기 영국 자유주의도 홀로코스트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19세기 말 영국은 곡물 수탈정책으로 남아시아에서 히틀러가 죽인 유대인 인구의 1/2정도를 아사시켰다. 이를 두고 마이크 데이비스는 “후기 빅토리아조의 홀로코스트”라고 적절하게 지적했다. 미국이 수하르토의 학살과 피노체트의 학살, 남미에서의 더러운 전쟁을 위해 돈을 제공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도 자신의 이념을 배반하기는 기독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세계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물들이고 있는가?

    도킨스와 같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은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악’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는 [만들어진 신]에서 부시가 기독교 근본주의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정신병자 취급한다. 그러나 유고와 이라크, 시리아에서 폭격을 적극 찬성한 자들은 유럽의 합리주의자들이다.

    기독교를 비난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거리에 대해서는 얼마나 성찰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도킨즈가 ‘만들어진 신’을 그렇게 공격했지만 그는 영국의 이라크 폭격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국 수상 블레어는 증거 조작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는데도 말이다. 그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였지만 그 자신의 국가가 범하는 비합리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이다. 사회주의도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스탈린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 남긴 생채기는 치유하기 정말 어렵다.

    어느 이데올로기나 그 자신의 초기 목표와 구체적인 현실화 사이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고, 기독교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약속을 어긴 것”을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다면 그런 이데올로기는 나름 희망을 갖고 있다 하겠다. 기독교에도 자정의 능력이 있다면, 현재와 같은 불명예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은 바로 예수가 살던 시절의 기독교 공동체의 복원일 것이다.

    8. 믿음과 이성

    “하나님의 존재하느냐” 라고 기독교인들에게 질문한다면, 누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라고 답한다. 나 같은 무신론자는 이런 답변을 들으면 당장 ‘웃기고 있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스스로 유물론자라고 생각하고 합리주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물론자라는 것은 의식은 뇌의 작용의 산물이고, 추상적 존재는 언어를 통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이겠다. 물질(뇌/언어/무의식)이 의식의 조건이라는 사고 말이다. 합리주의자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증거만 인정할 뿐 믿음과 같은 순전히 주관적 신념은 결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을 일컫는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자신을 합리주의자라고 여긴다. 자신은 이성적 존재이고, 자신이 믿는 것들은 명확한 근거가 주어지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단지 신념이나 무지몽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여기서 초합리주의가 싹이 튼다. 초합리주의란 자신에게 실증되지 않는 것은 일단 무엇이든 의심해 보는 존재이다. 객관적 증거를 통해 입증되고,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것만을 수용하는 자를 일컫는다. 이런 게 이성적인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더불어 객관적인 근거 없는 주장이나 신념, 판단에 대해서는 자못 거만한 태도로 경멸하는 자세를 취해 보인다. 어느 누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평가되지 않길 바라겠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합리주의 신봉자쯤 될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합리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는 아퀴나스의 주장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합리주의자들은 대부분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믿지,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합리주의자들은 신념이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합리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종교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을 앞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뒤떨어지고 가망 없어 보이며, 비합리적인 존재라고 여긴다. 자신은 오직 올바른 이성적 판단 하에서만 강한 믿음이 생겨난다고 자기 다짐을 한다. 자기 내면의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합리주의자들의 판단은 거의 착각에 가깝다. 왜냐하면 합리주의자들이든 자유주의자들이든, 심지어 사회주의자들이든 그들 모두는 형이상학적 토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신이 자유주의자라고 해보자. 자유주의자는 당연히 인간은 ‘자유’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자유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한테, 왜 인간이 자유를 지녀야 하지? 자유가 뭐 그렇게 소중한 거야? 너 자유가 소중하다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 라고 질문한다면, 어떤 자유주의자도 개인의 자유가 예속보다 더 좋다는 객관적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가 소중하다”라는 판단은 그의 주관적 가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결코 객관적 근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가 소중하다’라는 판단 자체가 형이상학적 토대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다른 식으로 이야기 하면 자유가 소중하다는 판단은 자유주의자의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객관적 증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나 자신의 신념도 객관적 증거보다 사회주의가 더 옳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사회주의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부하는 것은 그 이념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반대는 아니다. 공부하다보니 사회주의가 더 좋아지는 것도 있지만, 애초에 사회주의가 옳다는 신념이 없었다면 내가 그렇게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을 읽었겠나 싶다. 사회주의에 대한 나 자신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이해하게 된 것이지 그 역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아퀴나스의 유명한 구절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말하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는 주장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상대를 믿어야 그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심지어 상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거나 아니라고 생각해도 귀담아 들으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이다. 애시 당초 믿지도 않는다면 그의 말에 귀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아퀴나스의 구절은 지극히 평범한 이런 사실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신을 믿는 자는 신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의 이성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홉스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주관적 의지가 선행하고, 이성은 그 시녀인 것이다. ‘무엇이 옳다.’라고 판단하는 윤리적 잣대는 대부분 신념,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 판단의 근거에는 형이상학적 토대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왜 옳은가를 설명할 때는 이성이 필요한 것이다.

    평등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주의 체제가 정당한 정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믿음이라면, 사회주의가 왜 옳고,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둘의 관계는 피드백/되먹임 관계이다.

    그러니 믿음을 이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믿는 자들이 몽매에 빠져 다른 것들을 살피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을 비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믿음을 지니고 있는 거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믿음은 이성과 함께 갈 수 있으며 둘은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신념이나 이성 속에는 형이상학적인 토대가 있고, 심지어 비합리적인 욕망이 작용하고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이 자신을 초합리주의자라고 착각하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겸손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성의 한계를 성찰하는 자만이 자기 자신의 노선을 수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동료를 만나게 하고, 위안을 받으며, 삶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이성과 계산보다 형제를 믿는 것이 더 올바른 삶이 될 가능성을 우리는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이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위로’를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을 우리가 반성해야지 종교를 믿는 행위 그 자체를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9. 기독교 비판을 위하여

    그렇다고 기독교를 비판하지 말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썼듯이,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해방에의 염원’을 담고 있다. 다만 그 이데올로기들 속에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기만하는 것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대중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치유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가져와 현존하는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 무신론적인 사회주의로 이것을 대체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비판이 될 수 없다. 모든 이데올로기 비판은 내생적으로 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 자체 내에 있는 해방을 향한 염원을 발본화시켜 그 자신을 기만하는 것을 스스로 제거할 수 있도록 ‘이데올로기의 욕망’을 급진화 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 비판이 해야 할 과제이다.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회주의로 자유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유주의 자체의 고유한 목적 속에 자유주의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liberty)를 내재하는 개인 자유의 옹호 이념이다. 우리가 자유주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시장체제가 그와 같은 개인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속박하는 체제임을 보여주면 된다. 시장은 노동을 끊임없이 불안정화시키고, 주변화시키며, 궁핍화시킨다. 경쟁은 경쟁력이 없는 인간 집단을 노예의 상태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체제는 자유주의 스스로 약속한 이상을 결코 실현할 수 없다.

    그러니 자유주의가 원하는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자유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이렇게 비판하는 것이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올바른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기독교의 이념을 발본화시키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었다. 현실의 기독교는 기독교 자신의 근원적 염원을 배반한 것이다. 이민자를 환대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위안을 주며, 약자를 변호하고, 타락한 자들을 품에 안는 예수의 정신이야 말로 기독교의 염원 아닌가.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이 인간이라고 앞에서 썼다. 그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꾸려 헐벗은 자들을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를 비판한다면 “당신들은 왜 그와 같은 예수의 약속을 저버리는가”라고 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는 말이다.

    더불어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그들이 좌파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그들이 공동체를 꾸리는 것을 도와주고, 우리 또한 기꺼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통해 그와 같은 공동체를 만든다면,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제도의 구조적 변혁을 통해 그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당신들이 만들려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을 우리는 사회변혁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고 우리는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의 궁극적 꿈과 우리의 궁극적 꿈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에게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듯이 말이다. <끝>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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