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공격한 책이 바로 ‘성경’
    [비판과 비평]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2
        2013년 09월 11일 02:19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 기독교 아니 종교란 무엇인가? 이성과 믿음은 과연 대립하는가? 라는 화두는 늘 우리 곁에 존재하며 제기되는 화두이다. 이 주제는 특정 종교에 대한 호기심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주제이고 실천의 그림자이다. 이 묵직한 화두에 대해 무신론자 남종석씨가 테리 이글턴의 책을 소개하며 신을 옹호하는 비평 글을 보내왔다. 글 분량이 길어 3차례에 나누어 게재한다. 필자가 신학자가 아니기에 다른 해석, 다른 접근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이 비평 글에 대한 재비평 혹은 반론 등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편집자>

    * 앞의 글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1’ 칼럼 링크
    ———————-

    4. 구원의 의미

    어쨌든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결코 완전한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실존주의자 샤르트르가 말하지 않았는가? 자유란 결코 즐거움이 아니라고. 인간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존재이며, 자신 속에 수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배신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 이 모두 자신이 선택한 자유의 대가다. 브레히트 식으로 표현해 삶의 본질은 “비극”이다. 우리의 욕망은 끊임없이 좌절되고, 억압되고, 배신당한다.

    그러나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른 모든 것은 당신을 배신할지 몰라도, 심지어 당신 자신이 당신을 배신할지 몰라도 신은 당신과 함께 한다. 당신은 자기 스스로 선택한 삶에서 상처입고, 배신당하고, 좌절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신을 찾기만 하면 그는 당신과 함께 한다. 신은 비록 당신이 신을 거부하고 부정했을 지라도 ‘용서하는 자’로서 당신을 받아들인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지니’라고 예수가 말한 것이야말로 이와 같은 신의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으되, 그 자체로 불안정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인간의 유한함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이다.

    그만큼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죄 짓기 쉽고, 일탈할 수 있으며, 하찮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인간들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신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당신의 편으로서 당신의 모든 고통을 함께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모든 버림받은 인간들의 벗이자, 변호인이자 동지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이런 인간관은 인간 스스로의 교만을 치유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이런 인간 자신에 대한 맹신이 낳는 위험은 보지 못했다.

    이런 교만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파우스트다. 1부에서 파우스트는 세계의 온갖 즐거움을 다 누린다. 2부에서 파우스트는 거침없는 개발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발전에 방해되는 그 어떤 것도 가차 없이 내처 버린다. 파우스트가 표상하는 것은 부르주아다.

    세계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듦에 있어서 부르주아가 보여준 창조성, 잔혹함, 급진성에 대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한 장을 할당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이명박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패배를 모르는 파우스트다.” 이런 인간들은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며, 앞만 보고 달린다. 자신의 죄도, 자신의 악도 보지 못하는 존재이다.

    기독교적 인간형은 바로 이런 교만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그 자체로 “죄 많은 존재”다. 자신의 자유의 실현이 늘 어떤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형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과 부시 같은 놈들이 장로이거나 교인인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진정한 아이러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스탈린으로 나타난 꼴이다. 스탈린을 마르크스의 원형으로 볼 수 없듯이 이명박과 부시를 기독교적 인간형의 원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당신이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를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언제나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존재이다. 저 유명한 ‘탕아의 회귀’처럼. 여기서 돌아온다는 것은 당신이 신을 받아들이면, 그가 당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되 언제든지 함께 하기 존재이다.

    그가 함께 한다는 것은 당신이 신을 믿는 교인들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말이다. 당신이 예수처럼 이웃을 환대하고, 약자의 편에 서고, 그들의 고난을 기꺼이 함께 할 때 당신은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다. 이게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은 인간이고, 공동체 안에서 나눔이 있고 위안이 있고, 삶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인 것이다.

    교회로 간다는 것은 교회 건물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모임’에 가는 것이며, 공동체에서 함께 함을 의미한다. “조직된 교회를 체계적으로 공격한 책이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성경]이다.” 예수가 나오는 4복음서를 꼼꼼히 읽어보라. 성전을 섬기는 바리새인들과 레위인들에 대한 예수의 분노를 생각해 보라. 오늘날 교회가 건물만 높이 올리고, 세력만 키우고,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강자와 성공한 자들을 축복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공동체와 완전히 동떨어진 모습이다.

    성경

    5. 사탄과 죄

    앞에서도 간략하게 썼듯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난다. 구약의 하나님은 불을 내리고, 공동체를 소멸시키고, 자신의 피조물에게 아들을 희생시킬 것을 요구하고, 질투심 많은 하나님이다. “성경에서 심판자나 비난자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사탄”이다. 그 원뜻은 ‘적대자’이자 ‘고발자’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로 인간을 만들었다. 그런데 인간은 그가 만드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이미 하와와 아담이 타락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회개도 안하고 신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면 그 죄를 고발하고, 용서하지 않는 적대자가 되어 자신의 피조물들을 처벌하도록 만드는 존재가 바로 사탄인 것이다.

    피조물을 처벌하고, 죄의식에 갇혀 있도록 하며, 용서할 줄 모르고 증오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바로 사탄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구약성서]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서 적대자라는 의미는 하나님에 적대하는 자를 일컫는다. 앞에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나님은 바로 은총이자 사랑이라고 했다. 신은 자신의 피조물의 고통을 껴안고, 그와 함께하며, 그의 변호자가 되어주는 존재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저 여인을 돌로 처라” 했던 분이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에 적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증오를 만들어 내는 것, 용서 없음, 처벌하도록 이끄는 힘이 바로 사탄의 형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리에서 마주치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말,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회계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라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했던 형상이 바로 사탄의 형상이다.

    이제 사탄이 왜 고발자인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자다. 저 여인은 간음을 했다. 저자는 사욕을 품었다. 저이는 거짓을 고했다고 말하며, 비난하는 자가 바로 사탄이다. 그는 고발을 통해 피고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그를 비난하고 벌주는 자이다.

    하나님의 이런 모습은 구약에 너무도 많이 나타난다. 이는 죄를 용서하고,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피조물을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증오와 분노로 표현되는 초자아적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는 딱 하나님의 적대자, 반대자인 것이다. 우리 내면의 분노, 증오, 복수심, 사욕의 다른 이름이다. 사탄은 율법에 따라 끊임없이 대상에게 적대감을 만들어 내는 자이다.

    6. 마조히스트와 마조히즘의 경계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회계함으로써 자신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 벌주고 처벌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탄이다. 율법은 우리의 욕망을 그 자체로 부정한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일상에서 율법을 끊임없이 어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나체의 여인이나 하의 실종 패션의 여성을 보면 성욕이나 관음증을 느낀다. 모든 인간은 사촌이 땅을 사면 질투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 대해 죄의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행여 신의 분노나 사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충실한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의 삶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율법에 따른다면 죄는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런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 혐오감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듯 율법과 욕망의 교착상태에 빠진 신도들은 “그 때문에 억압받고, 불행한 상태로 전락하면서도 그 상태에 집착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벌주고 싶어 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된다.” 이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에서 즐거움을 찾는 병적인 교착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이렇게 율법이 주는 마조히즘적 쾌락(피학적 쾌락)에 매몰된 채 여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당신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타인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보상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사탄처럼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자신은 어쨌든 율법을 지키려는 도덕적 자기 수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와 같은 근원적 마조히즘의 정세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죽어간다.

    이런 마조히즘적 상태에서 용서, 화해, 관용, 사랑은 사라진다. 그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가 신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며, 공산주의자는 재판 없이 처형해도 되며, 핵무기로 이슬람을 폭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이 신을 믿지 않아서 후쿠시마 원전에 위기가 왔다고 떠드는 자들도 이런 부류이다.

    율법에 대한 교조적 해석은 근본주의의 토대가 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몇몇 구절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도, 신약의 전체 내용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침묵한다. 그들은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들은 죽어도 상관없고, 이민자들을 환대하는 제도는 타락한 제도이며,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을 무찌르는 것은 선택받은 민족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보았다면 경악할 만한 이야기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구절에만 집착하지만 정작 자기 종교에 대해서는 천박할 정도의 이해만을 지닌 집단이다. 그래서 증오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일반인들도 기독교인의 도착을 공유하는 측면이 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상당수의 무종교인들은 기독교를 믿는 분들이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할 건 다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간음하고, 커닝하고, 탐욕에 물들어 있고, 세속적인 권력을 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겹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든가 그렇지 않으면 믿는 체 하지 말길 요구하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교인들이 일주일에 한번 교회 가서 회개하는 대가로 주 중에는 온갖 나쁜 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신처럼 아예 교회 안가고 타락하면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의 생각이 사실일지 몰라도 기독교인들을 비난할 수 있는 이유는 못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이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인간이 아닌가? 그들도 죄인이다. 다만 자신의 죄를 인정한 죄인인 셈이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보다야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

    문제는 자신은 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구원받고 타인들은 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종교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런 심리 상태에서 관용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종교인에 대해 이중적이라고 떠들며,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자유인들도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만 지적해 두자.

    이런 형상을 뒤 엎은 것이 바로 예수다. 예수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그는 정결하지 못한 여인과 대화하고, 사마리아인과 친구가 되며, 자신을 배신할 가련한 존재들을 제자로 삼는다. 그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은 일주일에 꼭 한 번 쉬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부터 하루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안식일에 목매는 자들을 비난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있는 것은 모두 나누라고 말한다. 그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을 실천한다. 그는 편견을 넘어서 약자를 편든다.

    율법은 우리가 불완전할 때 일정한 규범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 그것으로 피조물을 심판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예수는 오직 두 개의 율법, “하나님을 섬기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만 주장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얘기 했던 “율법의 완성”이다. <계속>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