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을 옹호하다'
    [비판과 비평]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1
        2013년 09월 10일 11: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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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아니 종교란 무엇인가? 이성과 믿음은 과연 대립하는가? 라는 화두는 늘 우리 곁에 존재하며 제기되는 화두이다. 이 주제는 특정 종교에 대한 호기심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주제이고 실천의 그림자이다. 이 묵직한 화두에 대해 무신론자 남종석씨가 테리 이글턴의 책을 소개하며 신을 옹호하는 비평 글을 보내왔다. 글 분량이 길어 3차례에 나누어 게재한다. 필자가 신학자가 아니기에 다른 해석, 다른 접근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이 비평 글에 대한 재비평 혹은 반론 등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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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은 존재하는가?

    무신론자들이 이 질문을 할 때,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신은 내 앞에 놓여 있는 걸상처럼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모든 질문은 이미 그 자체로 답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즉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이미 ‘신의 존재를 실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고, 더 나아가 이 질문은 ‘신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책상 같이 실증할 수 없는 존재라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답을 전제한 질문이다. 바슐라르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질문을 ‘문제설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질문은 애초에 잘못되었다. 유아적인 수준의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신의 존재를 이렇게 증명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자유는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실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자유가 옳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신도 마찬가지다. 신은 믿음의 눈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에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라는 요구는 애초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존재의 본질’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질문이다.

    신의 존재는 실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존재의 유일한 형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지속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가? “하나님은 곧 말씀”이라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살아 있으며 무엇이든 자신의 뜻대로 행위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신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당신이나 나는 “지극히 우상숭배적인 신”을 알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신이, 기독교의 일부 ‘얼치기 분파인’ 창조과학이나 창조론에서 말하듯,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깔끔하게 설계하고 창조해서 현재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당신이 믿는다면, 당신은 제대로 신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셈이다. 신에 대한 이런 통념은 기독교의 정통 신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신을 옹호하다](모멘토, 2010)라는 책을 쓴 테리 이글턴의 주장이다.

    신을 옹호하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당연히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테리 이글턴의 저서 [신을 옹호하다]를 통해 간접적으로 답변해 보고자 한다.

    테리 이글턴은 리처드 도킨스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유물론자’들에 대한 답변으로서 이 글을 썼다. 필자는 [신을 옹호한다]의 기본 논지를 설명하면서, 우리 모두가 궁금해 하는 신의 본질, 죄와 구원의 문제, 신앙과 믿음, 기독교 근본주의 등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더불어 이 글은 자기 스스로 합리주의자라고 여기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형이상학적인 토대 위에서, 자신의 신념 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성찰해 보고자 한다.

    도킨스 자신도 그렇지만 합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은 과학적 지반 위에 서 있지만 종교를 믿는 자들은 비합리적 논리에 빠져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는 기독교인들을 대하는 사회주의자들, 무신론자들의 태도에서도 자주 보이는 모습이다.

    테리 이글턴의 핵심적인 주장은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매우 조야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도킨즈가 대표적이다! 이글턴이 요청하는 것은 기독교를 비판하더라도 ‘그 최신 버전’, ‘가장 발전된 논의’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 보아야 한다.

    여기서 정리한 것은 우리가 해방신학이라고 알고 있는 급진적인 신학이 아니라 기독교 정통교리에서 설명하는 신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신을 옹호한다]의 인용부호를 일일이 붙이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신학자가 아니기에 이 독서노트에는 분명 오류가 있을 것이다.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 주길 바란다. 더 깊은 이해를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직접 읽기를 권한다. 다만 테리 이글턴의 글은 ‘독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만은 각오해야 한다.

    필자는 사회주의자들이나 급진주의자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다면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사회주의의 기획과 참 많이 닮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인구의 1/4를 차지하는 기독교 신도들이 왜 돈을 내고, 일주일에 많은 시간을 할당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2. 창조주 하나님?

    도킨스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생물학자는 [만들어진 신](김영사, 2012)과 [지상최대의 쇼](김영사, 2009)에서 창조론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는 촘스키, 에코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창조론이 왜 비과학이고 진화론이 왜 과학인지 꼼꼼하게 논한다. 필자 또한 학원에서 과고 준비하는 학생들과 언젠가 [지상최대의 쇼]를 몇 번 읽기도 했다.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진화론이 이렇게 탄탄한 근거를 갖고 있었나를 알고 정말 놀라워했던 경험이 있다. 필자도 언젠가 레디앙 지문에 도킨즈와 이론적으로 경쟁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 하우스]에 대한 독서노트를 레디앙에 쓴 적도 있다.

    도킨즈가 [만들어진 신]에서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론’이라고 주장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많은 유물론자들이 도킨즈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신을 과학적으로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킨스는 허수아비를 두고 전투를 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정립된 신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주의 제작자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

    리처드 도킨스

    신학자 맥케이브는 “창조주 하나님을 최고의 제작자, 우주의 최고 경영자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을 지극히 크고 막강한 피조물로 생각하는 견해”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아퀴나스의 주장대로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전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있어 “태양이 있으라 하니 태양이 있고, 달이 있으라 하니 달이 있다.”라고 해서 태양과 달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우주가 양자 진공 상태에서 대폭발을 하여 지금까지 팽창하고 있다는 ‘빅뱅론’과 경쟁하기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세상의 기원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위대한 신학자 아퀴나스는 말했다. 스콜라 철학의 대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그러니 도킨스가 위에서 언급한 책들에서, 진화는 사실이고, 인간의 조상은 포유류의 조상과 동일하고, 그 조상을 끝까지 추적하면, 최초의 생명체는 박테리아이고, 더 올라가면 외계로부터 온 아미노산이라고 떠들어봐야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의 창조를 두고 진화론과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와 모세 5경 [창세기-출애굽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신화다. 사실과 상상이 결합된 신화 말이다. 트로이가 진짜 있었지만 아킬리우스가 여신 아테네의 아들이이어서 그리스가 트로이를 물리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고,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곰에서 변한 웅녀와 결합해 단군을 낳았다고 믿는 이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달과 태양을 만들고,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교조적인 근본주의 기독교도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는 세상의 아찔한 우연성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이다. 세상을 무에서 창조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외계로부터 날아온 아미노산이든, 아니면 질소가 반응해서 지구 내에서 생명이 생겨났든, 생명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매우 커다란 우연의 결과다. 빅뱅도 마찬가지다. 왜 최초에 폭발이 일어나 우주가 만들어지게 되었나? 말 그대로 일어나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매우 우발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진화론을 설명하는 모든 학자들이 다 이야기 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역사를 성찰하는 종’(인간이다!)이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것은 너무나 우연한 변이의 결과일 뿐이라고.

    진화의 나무를 역으로 거슬러서 최초의 포유류가 출현한 1억년 정도 회귀해 올라가서 다시 진화가 된다면, 인류라는 종이 출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인간 종은 매우 우연한 상태에서 출현했다. 그러니 “인간의 출현이 진화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떠드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최악의 오해이다.

    문제는 이런 우연 속에서도 우주는 만들어 졌고, 생명이 탄생 했으며, 인간 종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황홀한가? 굳이 없어도 될 것들이 그 수많은 우연적 상황 속에서 ‘지금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우연성을 설명하는 게 바로 ‘창조주 신의 존재’이다. 이런 우연적인 것이 마치 필연적이도록 만든 것은, 어떤 다른 초월적 존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이 요청된’ 것이다.

    과학은 결코 인간 출현의 필연성을 증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은 당신이 왜 굳이 태어나야 했는가를 증명할 수 없다. 수 억 마리의 정자 중 난자와 우연히 성공적으로 결합한 결과가 ‘당신’이다. 과학은 그 결합의 과정과 세포분화를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왜 굳이 다른 정자가 아니라 ‘그’ 정자가 난자와 결합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고작 설명해봐야 통계적 확률인데, 그렇게 될 확률은 거의 제로이다.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의 아버지가 결혼한 것도 통계적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다.

    당신은 그런 우연의 결과로 세계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과학은 진화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지, 인간 종의 필연적 출현은 결코 논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변이는 환경 작용에 의한 우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무로부터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전능하여 “무로부터 뚝딱 은하계”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더 나아가 신이, 지적 설계론에서 주장하듯이, 우주를 만들고 45억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변화해 오도록 정교하게 설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세계의 “우연성을 설명하는 전제”이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나야할 과학적 필연성은 거의 없다. 확률적으로 따져 봤을 때 거의 무에 가깝다. 그럼에도 당신은 존재한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누구 때문이지?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질문하는 게 신학이다.

    “신은 은총이다”라고 성경이 밝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계는 정말 우연들이 지배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경이롭다. 아인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계가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우주가 빅뱅으로 만들어졌는데, 적어도 거시세계에서 이 우주는 정확하게 뉴튼의 역학법칙으로 설명가능하다. 우연찮게 만들어진 어떤 존재가 정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과학은 법칙을 규명할 수는 있지만, 왜 그런 법칙이 만들어졌는가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신의 존재가 문제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니 과학을 통해 신의 존재를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것은 헛고생이다. 도킨즈에 열광하는 레디앙 독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3. 창조와 자유의지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구절이 “보기에 좋더라.”이다. “보기에 좋더라” 라는 말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들로부터 경배 받기 위해 피조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기에 좋아서 만든 것이다. 피조물이 있음 그 자체를 즐기는 존재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 신은 피조물이 자신을 ‘숭배’하면 용서하고 부정하면 ‘유황불에 떨어뜨리는 존재’가 아니다.

    “보기에 좋더라!”라는 말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바로 “미학적”이라는 데 있다. 미학적이라는 말이 조금 어려울 수 있겠다. 칸트 식으로 이야기 하면 미학은 ‘무목적성’을 갖는다. 그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요즘 대중음악은 돈 벌기 위해 만들지만, 우리가 ‘모차르트’를 들으며 즐거운 것은 그것이 다른 어떤 수단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예컨대 내가 아무리 내 연구실에서 ‘모차르트’를 틀어 놓아도 이게 학원생 한 명 더 늘려주거나 우리 아들 아이큐가 더 좋아지게 해서 수학공부 더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예술적 미는 좋은 것’이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설은 과학적으로 꼼꼼히 반박되었다. 예술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미적이라는 말이 그렇듯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도 순전히 미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재미삼아 만들었지 하나님 스스로의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지 위해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한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순전히 애완용 몽구스와 같은 존재이다. 당신이 존재해야 할 아무런 필연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지금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당신을 보는 것 자체로 즐거워하는 존재인 신”이 있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를 만든 것은 보는 것 자체를 즐기기 위함이다.

    신인 인간을 무목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말이다. 신은 인간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만든 게 아니다. 신이 당신을 만들었지만 당신에서 무엇인가 기대해서 당신을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 용돈 받기 위해 당신을 놓지 않았듯이.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심지어 당신이 신을 섬길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하는 것도 당신이 결정할 몫이다. 당신이 신을 배신한다고 해서 신이 당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다. 신은 그렇게 고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서에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무슨 말인가? 이는 다른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시간과 정력을 쏟지 말고, 공동체의 이웃과 함께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다. 서로 의지하며, 함께하는 이웃이야말로 인간들이 나누어야할 공동체이자 섬겨야할 대상이라는 말이다.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이 바로 인간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삶을 사는 것 자체가 구원의 징표이지 꼭 교회 나가 “주여 믿습니다!”라고 말해야 신이 우리를 귀여워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이 당신을 존재하게 한 것은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 신의 피조물인데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을 벌할 것이다. 지옥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라고 설명하는 기독교도들은, 신을 새디스트로 변환시킨 것이다.

    자신이 좋아서 피조물은 만들어 놓고 그 피조물이 자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에게 벌을 내린다면, 그것은 정신병에 걸린 신임에 틀림없다. 이런 새디스트는 사실 사탄의 이미지다. 구약에는 이런 신이 자주 등장한다. 신의 이러한 변모를 바꿔 놓은 것이 바로 예수다. 예수를 통해 신은 사랑하는 자 용서하는 자가 된다.<계속>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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