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된 사회와 이석기 그룹
    [기고] 북한 사회에 대한 사회경제적 분석과 비판이 필요
        2013년 09월 09일 03: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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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태경 민생연대 사무처장이 최근의 이석기 사태와 북한 문제에 대한 기고 글을 <레디앙>에 보내와서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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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운동과 이에 조응하는 진보정당 운동영역에서 반전ㆍ평화는 소중히 지켜야할 가치이자 원칙입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하는 우리는 사회구성원의 삶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지, 어떠한 형태로든 삶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방어를 위한 무장조차도 사회구성원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을 때 지극히 ‘제한된 범위’ ‘제한된 조건’ ‘특수한 상황’에서 부분적으로만 용인될 수 있을 뿐이며, 그 조차도 논란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이석기 의원(이하 존칭 등 생략)과 그의 그룹은 운동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소중이 지켜야할 기본적인 가치이자 원칙을 조롱했습니다.

    그룹의 일원이었던 이모씨의 국정원 제보(*주)에 따라 작성된 이른바 ‘RO 회합 녹취록’ 에 따르면, 주체사상의 수령격에 해당하는 이석기는 “오는 전쟁 맞받아치자 시작된 전쟁은 끝장을 내자 어떻게? 빈손으로? 전쟁을 준비하자 정치 군사적 준비를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하면 물질 기술적 준비 체계를 반드시 구책해야 한다”고 강의(?)했고, 그룹의 구성원들은 ‘주체적으로’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했고 “전기ㆍ통신분야에 대한 공격”까지 “포함”한 “여러 의견”(김근래)을 내놨습니다.

    *주: 국정원 제보자가 이모씨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힌 것은 한겨레신문 2013년 9월1일자 기사 “국정원 제보자’ 집·가게 모두 정리하고 ‘잠적”이라는 기사입니다. 비록 실명을 특정하지는 않았으나, 한겨레신문은 “수원에서 당원으로 활동”하는 이씨가 “경희대(수원캠퍼스) 86학번”이고, “수원시 친환경학교급식지원센터장”이며, “경희대 수원 국제캠퍼스 앞에서 당구장”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소상히 밝힘으로써, 누구나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국정원 제보자가 이성윤씨임을 알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가 언제부터 국정원 제보자의 신원은 공공연히 알려도 된다는 규칙을 세웠는지도 궁금한 대목입니다.

    RO(Revolutionary Organization, 자주파식 표현은 ‘혁명대오’)라는 비밀조직의 실체 여부나 형법상 내란예비음모죄가 성립되는가 여부와는 별개로, 어쨌든 이석기와 그의 그룹은 한반도 전쟁발발에 대비해서 ‘북한에 동조하는 반군’이 되기 위해 정치 군사적 준비를 하자고 논의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이들의 논의를 아무리 살펴봐도, 사회구성원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를 위한 무장”까지도 고려해야 할 지극히 ‘제한된 범위’ ‘제한된 조건’ ‘특수한 상황’이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80년 5월의 광주처럼 “공수특전단의 초강경 유혈진압”에 맞서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무장을 선택했던 시민들의 정당성도, 1872년 정당하게 구성된 파리꼬뮌(Paris Commune)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정부군에 맞서 무장했던 시민들의 정당성도, 1936년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의 쿠테타에 맞서 자발적으로 무장했던 스페인 시민들의 정당성도 이석기와 그의 그룹의 논의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의용군 얘기를 다른 영화 '랜드 앤 프리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의용군 얘기를 다른 영화 ‘랜드 앤 프리덤’

    그룹의 정점에 있는 이석기가 “정치 군사적 준비” 및 무장투쟁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예상하던 예상치 않던 북에 대한 도발이 분명하다면”(이석기)이 바로 그것이고,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석기와 그의 그룹에게 “북에 대한 도발”은 목숨을 내걸고 도발자에 맞서 무장투쟁을 해야 할 만큼 소중한 그 무엇이었으며, “뼛속까지 평화주의자”라는 이석기식 평화가 실현되는 방식이었습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궤변에 따르면, 기상천외하게도 이석기와 그의 그룹은 “전쟁반대 평화실현을 위한 인식을 더 넓”힌 셈이며, 따라서 반전ㆍ평화의 가치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석기와 그의 그룹, 그리고 이정희 대표가 무장투쟁에 대한 논의를 거꾸로 반전ㆍ평화와 연결시킨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북한을 “착취와 허위 없는” “자주적 사회”(“우리식 사회주의”)라고 믿고 있는 게 바로 그 근거입니다.

    91년 8월 소련에서의 실패한 3일 “푸치”(쿠테타)를 정점으로 그리 큰 총성이나 환희도 없이 하나의 세계사를 형성했던 사회주의 사회가 일반대중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분명히 무너져 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북한을 포함한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주의’에 대해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이중에는 강철서신의 김영환처럼 180도 사상전향한 사람도 있고, 서노련ㆍ민중당의 주역인 김문수처럼 정치적 변신을 한 사람도 있으며, 좀 더 극단적으로는 진정추 활동가였던 신지호처럼 뉴라이트로 돌변한 사람도 있습니다.

    북한, 착취와 허위 없는, 자주적 사회?

    그러나 상당수 자주파들은 여전히 북한을 “착취와 허위 없는” “자주적 사회”(“우리식 사회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참고로, 평등파 그룹들 중에도 소수지만 여전히 레닌과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자신들의 추구하는 사회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과거 80년대 학생운동의 흐름에서 대다수 평등파가 레닌과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자신들의 사회상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자주파들은 북한의 사회주의와 그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자주파 그룹의 핵심답게 이석기는 말합니다.

    “우리가 자주된 사상, 통일된 사상, 미국놈을 몰아내고 새로운 단계의 자주적 사회, 착취와 허위없는 그야 말로 조선민족의 시대의 꿈을 만들 수 있다. 그 꿈을 2013년 하나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물리적 힘으로 한두 사람의 발언과 결의가 아니라 전국적 범위에서 새로운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최종 결전의 결사를 하자는 겁니다. 이 또한 얼마나 영예롭지 않은가”(RO회합녹취록 중에서 이석기의 강의부분)

    제가 생각하기에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사상의 물적 토대이자 근거가 어떤 형태로든 허물어지지 않는 한, 어떤 논리도 그들의 사고와 행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3대 세습왕조”니 “시대착오적”이니 “북한 인민들의 곤궁한 삶”이니 하는 유형의 비난이나 비판은 그이들에게는 잘 모르고 하는 소리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그이들에게는 3대 세습이 아니라 우리식 사회주의의 운영원리에 따라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리더가 정해진 것이고, 리더의 “현명한 영도” 밑에서 “당과 국가가 인민들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을 확고히 담보해”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지만, 미제국주의 등 때문에 경제난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쯤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사회경제체제의 문제 및 상부구조의 문제를 배제하고, 오직 국가운영 원리의 측면에서 큰 틀로 보면 틀린 것은 없습니다. 백성이 하늘이라는 세종대왕의 이민위천(김일성의 좌우명이기도 했고, 이석기의 집에서도 발견되었다 합니다)이나, “정치인은 무엇보다도 국민의 삶을 챙기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둬야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훌륭한 정치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당과 국가의 리더가 공공연히 “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얘기하며, “(당과 국가를 포함한 모든 것은) 인민대중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빈번히 강조하는 것만 주목하면, 이석기와 그의 그룹이 생각하듯 북한은 분명히 모범적 이상사회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사실이 아니듯, 사실관계는 분명히 전도되어 있으나 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이석기와 그의 그룹의 사상적 물적 토대인 전도된 북한 사회가 스스로 허물어지거나 또는 전도된 관계를 스스로 파악하고 이해하지 않는 한, 사상적 신념은 완강히 지속될 수 있고, 녹취록처럼 극좌 모험주의적 견해까지 표명할 수 있으며, “꽃보다 총”을 택했던 독일의 적군파나 일본의 적군파 이상의 행동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품성을 강조하는 자주파 그룹의 두 얼굴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측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사정은 주체사상을 완강히 거머쥐고 있는 자주파 그룹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와 북한응원단의 이해하기 힘든 행태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방문했던 이른바 “북한미녀응원단”이 김정일 현수막이 허름한 곳에서 비에 젖는다며 울고 불면서 회수해갔던 사건 아마도 기억하실 겁니다.

    저는 별반 이쁜 줄 모르겠지만, “참으로 곱고 이쁘다던 그녀들”이 <북한의 그 또는 그녀들을 환영하는 환영 현수막>에 대해 흡족해 하기는커녕, 한국 사회의 문화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그녀들의 행동은 결코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녀들의 행동은 전도된 북한사회의 상태를 드러내는 지극히 자연스런 행동이었습니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물건을 사고팔거나 월급쟁이로 취직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가식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 그대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수막

    2003년 비에 젖은 현수막을 들고 있는 북한 여성 응원단의 모습

    국가의 수장이 정치적 권력뿐만 아니라 경제적 권력까지 독점하는 사회, 따라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국가주의 사회(이른바 “국가사회주의 사회” 또는 “우리식 사회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녀들!

    이런 그녀들에게 당과 국가의 수장인 김정일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길러주고 가르쳐주고 베풀어주고 사회적 생명을 주고 인도하는” 무소불위의 자애로운 절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는 분명히 자신들이 또는 자신들의 부모나 형제가 생산한 생산물을 당과 국가가 독점할 수 있는 권리에 기초한 독점적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보이고 그리 배웠고 그리 경험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 그녀들의 사회적 관념에 비추어 볼 때, 한없이 존경스럽고 충성을 다 바쳐도 모자랄 그녀들의 ‘소중한 존재'(?)가 누추하고 외진 곳에서 비바람을 감내한다는 것은 그녀들로서는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5년 ‘인천 동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북한의 ‘청년학생협력단’으로 인천을 찾았던 리설주가 상징하듯, 국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녀들에게 김정일(그리고 현재는 김정은)은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국가의 수장으로서 인민을 그리고 노동자계급을 지배·통제하고 사회적 성과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의 생명까지 독점함으로써 자신의 절대성을 유지하는 파렴치한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거꾸로 자신들을 보살펴 주는 은혜로운 절대자로. 마치 태양계와 우주의 본질적인 운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중세 유럽 사람들이 가시적 시야에 나타난 현상을 진리로 믿은 것처럼!

    그렇습니다. 한국의 자주파 그룹이든 북한 주민이든 사정은 꼭 같습니다.

    그 또는 그녀들이 자신의 배후에 있는 사회적 관계(국가와 노동의 관계 및 파생된 관계 등)들을 사려 깊게 보지 않는 한, 그 또는 그녀들이 다른 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북한사회에 대한 비판적 요소를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는 한,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의 룰(국가주의 체제의 룰)이 그 또는 그녀들에게 부당한 형태로 크고 작은 불이익을 야기하지 않는 한, 동구나 소련처럼 급격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변화가 북한 사회를 휩쓸고 지나가지 않는 한, 그리고 이러한 전제조건들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한 틀림없이 북한은 “착취와 허위 없는” “자주적 사회”이자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할 모범적 이상사회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것이 전도된 북한사회는 명백하게 ‘개인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을 전제로 삼는 자유로운 공동체 사회’가 아니라 ‘개인은 집단의 일부로 집단을 위해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집단주의 사회’임이 분명함에도, 그이들은 이 자체를 자주적 사회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국가주의적 생산관계에 주목해야 전도 현상 이해

    사정이 이와 같기에 문제의 해법은 보다 거시적인 사회경제체제의 측면에서 찾아야 합니다. 국민주권에 기초한 대한민국과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가치와 법률 및 행위양식으로 이석기 그룹 등을 설득하거나 공박하거나 법률로 단죄하는 것은 최선의 경우조차 그이들을 고립시키거나 소수화시킬 수 있을 뿐, 전도된 사회에 대한 사상과 믿음 및 그에 따른 실천을 스스로 포기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해법은 분명합니다. 자본과 임노동관계(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주목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 사회의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들이 관련된 전체로 드러나듯이, 북한에 형성된 사회경제체제의 이해에서도 그들의 이데올로기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양식들에 앞서 국가와 노동의 관계라는 독특한 사회적 생산관계(국가주의적 생산관계)가 주목되어야 하며, 이 때 비로소 전도된 사회 북한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도된 사회 북한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날 때, 한국의 자주파 그룹은 비로소 그들의 주요 존립근거인 노동운동 영역과 진보정당 영역에서조차 설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우리는 ‘살아 있는 자본주의’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북한식 사회주의에 의해서도 계속해서 고통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처럼 죽은 것이 산 것을 완강히 붙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신 참고: 국가와 노동의 관계라는 독특한 사회적 생산관계(국가주의적 생산관계)는 정부의 대북한 정책에서도 반드시 주목되어야 합니다. 개성공단을 예로 들면, 개성공단에 진출한 한국의 자본이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저임의 급여마저 국가로 우선 귀속시키고 이중 일부(확인된 바 없으나, 급여의 20% 수준이라는 설이 있습니다!)만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주는 급여체계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굳이 노동가치론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이는 명백히 잘못된 급여체계로 이를 존속시키면서 남북경제협력을 이어가는 것은 기존 북한의 국가주의 체계와 그 행위양식들을 존속시키는데 보탬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남북관계가 교류수준의 의미를 넘어 한반도에 형성된 두 개의 사회경제체제(자본주의와 국가주의)와 두 개의 정부(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비롯된 이질적 거리감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관계들이 보다 발전적으로 재편될 수 있도록 남북경제협력이나 남북사회협력 등이 추진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필자소개
    민생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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