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속에 침투한
    스탈린 체제의 기억과 역사
    [책소개]『속삭이는 사회』(올랜드 파이지스/ 교양인)
        2013년 09월 06일 06:1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속삭이는 사회》는 소비에트 억압 체제를 외부에서 분석하는 데 머물렀던 기존 연구의 한계를 뛰어넘어, 체제가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 인간관계, 가치관과 내면 심리에 끼친 영향을 당사자 자신의 목소리로 서술한 최초의 책이다.

    천 명에 달하는 생존자 인터뷰와 무수한 편지 및 일기를 바탕으로 저자는 당대를 살아간 이들의 숨결까지 되살린다. 망가진 삶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산 생존자들, 부모의 상처를 대물림한 자식들이 이 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얻는다. 극한 상황이 불러온 끔찍한 야만과 타락, 그 틈에서 피어난 인간 의지와 고결함을 낱낱이 증언하고 고백하기 시작한다.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 러시아의 내밀한 목소리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집단적 인간’. 1917년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고 권력을 쥔 볼셰비키는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를 꿈꿨다. 개인적인 것은 곧 부르주아적인 것이었다. 사적 소유는 물론 사적 생활도 있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은 인간의 개인주의적 습성에 맞선 끊임없는 ‘전투’였다.

    한 세기의 4분의 3에 걸친 세월 동안 소비에트 러시아는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열망에 찬 사상 최대의 인간 실험장이 되었다.

    《속삭이는 사회》는 이 거대한 실험의 대상이 된 보통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스탈린 치하 소련 사회의 실체를 복원한다.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 불신과 공포에 짓눌려 살아간 2억 인민의 비극으로 귀결되기까지, 평범한 개인들, 가족, 이웃, 친구들의 내밀한 삶이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전투’의 핵심 표적은 가족이었다. 볼셰비키의 눈에 가족은 자기중심주의가 자라나는 온상이었다. 아이는 이제 특정 부모의 자식이기에 앞서 국가의 자산이 되어야 했다.

    볼셰비키 부모는 아직 학교에도 가지 않은 어린 자녀를 어른과 다름없는 ‘작은 동지’로 대접했다. 부부 싸움은 소비에트와 당 조직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비판받았다. 집을 가진 가족은 가난한 가족들과 의무적으로 방을 나누어 썼다.

    사회주의 체제가 완성되면 개별 가족은 결국 사라질 것이고 이념적 단체와 조직이 가족을 대체할 것이었다. 마을, 학교, 직장에서도 ‘집단적 인간’의 창조를 위한 실험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속삭이는 사회

    ‘집단적 인간’은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해야 했다. 성실한 소비에트 시민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눈과 귀가 될 책임을 졌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불순분자는 남김없이 색출할 필요가 있었다. 가족의 끈이 끊어진 사회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의심하고 남편이 아내를 밀고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가 빌미가 되어 노동수용소로 끌려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은폐와 배신, 침묵과 타협, 자기 세뇌와 이중생활이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되었다. 내가 체포되지 않기 위해 남을 고발해야 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느 한순간도 마음 놓고 대화하지 못하고 ‘속삭이며’ 살아야 했다.

    보통사람의 역사를 통해 본 소비에트 체제의 실제 작동 과정

    ‘인간’과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조해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소비에트 실험은 실패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체제를 둘러싼 의문과 논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중에서도 ‘국가의 폭력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체제가 70여 년이나 지탱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문제는 소련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다.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아니면 폭력적인 국가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까?

    제정 러시아와 러시아 혁명 연구로 널리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198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처음 이 책을 구상했다. 구상은 20여 년에 걸쳐 구체적인 프로젝트로 다듬어졌고, 2002년부터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페름, 알마아타, 노릴스크 등 구소련 지역 전역에 걸쳐 진행한 5년간의 심층 조사와 집필을 통해 마침내 이 역작이 탄생했다.

    《속삭이는 사회》의 중심 등장인물은 혁명 초기, 즉 1917년부터 1925년 사이에 태어난 ‘혁명의 아이들’이다. 이 세대의 삶은 혁명과 러시아 내전, 신경제정책(NEP), 농업 집단화와 5개년 계획, 1931~1932년의 대기근, 1937~1938년의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이어지는 소비에트 체제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간다.

    《속삭이는 사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단면을 대표한다. 스탈린 시대에 국가 폭력을 경험한 희생자 가족들, 수용소 관리나 비밀경찰로 복무하며 체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한 사람들, 체제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순응하거나 협력한 사람들의 다양한 심리와 생활상이 이 책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는 ‘소비에트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 철저히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볼셰비키 혁명가부터, 자신의 가치관을 숨기거나 바꾸면서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에 적응해야 했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귀족과 엘리트 출신들, ‘자본가 농민’ 쿨라크(kulak)로 낙인찍혀 수용소에 수감된 농민들,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는 잘 모르지만 당과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으로 출세한 노동자·농민 출신의 1930년대 신흥 관료층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 사회를 구성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실감나게 그려진다.

    이 책에는 수많은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몇 세대에 걸쳐 상세하게 그려지는 가족들이 있다. 이들 가족의 역사는 소련 민중 전체의 역사를 대표한다.

    이웃 소년에게 ‘쿨라크(부농)’로 고발당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났으나 먼 훗날 그들의 인생을 만신창이로 만든 소년을 기꺼이 용서한 골로빈 가족, 1917년 혁명의 세계주의 이상을 믿었으나 결국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겪어야 했던 라스킨 가족, 제정 러시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 철저한 스탈린주의자가 되었던 작가 시모노프의 가족이 그들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한 인간의 기구한 생애, 세기를 뛰어넘어 이어지는 한 가족의 비극적 연대기에는 장편 대하소설을 방불케 하는 무게와 감동이 있다.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을 공포 체제에 협력하게 만들었는가?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스탈린 체제가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에 스며들어 그들의 가치관과 인간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탐구한다. 그리하여 무엇이 수많은 사람들을 스탈린 공포정치 체제의 조용한 방관자이자 협력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는지, 체제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스며들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추적한다.

    “스탈린 체제의 진정한 힘과 지속적인 유산은 국가 구조나 지도자 숭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 ‘우리 모두에게 침투한 스탈린 체제’에 있었다.”(1권 29쪽)라고 저자는 말한다.

    “볼셰비키 혁명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건설이라는 대의를 향해 돌진하던 시대에 냉혹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버린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파이지스는 스탈린 체제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지금의 러시아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자 한다.”(‘옮긴이 후기’·2권 591쪽)

    파이지스는 스탈린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결국 평범한 소련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소비에트 체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파이지스는 소련 인민들이 ‘소비에트 가치’를 받아들인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 기근 등으로 황폐화된 소비에트 현실 세계에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열정 때문이 아니라, 계급 투쟁 과정에서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심 때문이라고 역설하는 점에서 기존 주장과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 소비에트 사회의 기본 버팀목이었는지, 아니면 국가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 수동적인 순응주의적 태도가 소비에트 사회를 유지한 원동력이었는지는 여전히 역사가들의 흥미를 끄는 중요한 문제이다. ― ‘옮긴이 후기’(2권 591쪽)에서

    이념적으로나 역사적 평가 면에서 한쪽으로 편향되기 쉬운 공적 역사에 대해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추로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지닌 중요성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사회 구조, 정치, 경제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한 시대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억눌린 기억,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복원한 소비에트 사회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1917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온, 또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온 평범한 러시아의 ‘갑남을녀’들이다.

    《수용소 군도》의 작가 솔제니친을 필두로 하여 여러 억압 생존자들이 회고록을 발표한 바 있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 시대의 기억을 묻어 둔 채 묵묵히 살아왔다.

    과거의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괴로워서이기도 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 끌려갈 수 있었던 시대에 뿌리박힌 공포심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상 존재하는 상호 감시와 언제 닥칠지 모를 체포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자식에게까지 전해졌고, 지금도 러시아 사회에 널리 퍼진 정서로 자리 잡고 있다.

    “‘속삭이는 사람(whisperer)’에 해당하는 러시아어에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소곤거리는 사람(shepchushchii)’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몰래 당국에 고자질하거나 귓속말을 하는 사람(sheptun)’이다.”(1권 28~29쪽)

    《속삭이는 사회》의 제목에도 반영된 이 단어는 스탈린 시대 러시아의 사회 분위기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조용하고 순응적인 주민은 스탈린 통치가 낳은 지속적인 결과다. 골로빈 집안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심지어 일부는 안토니나처럼 아주 가까운 친구나 친척에게까지 과거를 숨겼다.

    아이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가족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고, 집 밖에서 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배웠다.

    “우리 같은 아이들이 배워야 할 듣기와 말하기 규칙 같은 게 있었어요.”라고 193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중간 간부급 볼셰비키의 딸은 말했다.

    “어른들이 속삭이는 것을 엿듣거나 몰래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어른들의 대화를 우리가 들었다는 사실을 어른들이 아는 것만으로도 곤경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어른들은 무슨 말을 하고는 우리에게 ‘벽에도 귀가 달려 있지’, ‘입조심해’ 같은 말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표현이, 어른들이 방금 말한 것이 우리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 ‘머리말’(1권 27~28쪽)에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스탈린 시대의 경험은 러시아 사람들의 내면 심리와 가치관,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인간관계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피해자였던 기억, 가해자였던 기억, 방관자였던 기억으로 지금도 무수한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속삭이는 사회》는 침묵이 삶의 방식이 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목소리를 부여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편지와 사진, 일기, 개인 문서 등 주로 각 가족들이 간수해 온 사적인 자료와, 러시아의 인권 단체인 ‘메모리알 협회’의 도움을 받아 1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인터뷰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삼아 씌어졌다.

    소련 사회 전체를 대표할 수 있도록 편중되지 않은 표본을 선정하는 데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으며, 인터뷰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개인의 주관적인 ‘기억’을 토대로 한다는 구술사의 약점을 극복했다.

    연구의 신뢰성을 보증하기 위해 저자는 연구 대상이 된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자 힘썼다. 이 책에는 익명으로 된 증언이 없다. 한두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실명을 밝히는 데 동의했다. 또한 저자는 인터뷰를 한 모든 사람들에게 책의 초고 중 그들의 증언이 나오는 부분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증언이 왜곡되지 않고 타당한 맥락에서 인용되었는지를 본인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끔 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