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신부님 김승훈 신부님
[산하의 오역] 2003년 9월 2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 영면
    2013년 09월 06일 05: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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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깨어나도”라는 표현을 쓴다. 사실 죽었다 깨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고 거의 죽었다 싶었다가 기사회생한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억을 평생 기억으로 간직하고 생의 소중함을 절감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2003년 9월 2일 영원히 눈을 감으신 이 신부님도 한 번 크게 “죽었다 깨어난” 분이다. 그는 1963년 보좌신부로 신당동 성당에 부임하는데 이듬해 가을 성당 숙소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다. 부슬부슬 가을비가 오는 날 신부님 추우실까봐 불을 지폈던 아주머니의 손길이 엉뚱하게 젊은 신부를 잡고 만 것이다.

성모병원에 실려 갔지만 이미 그는 굳어가고 있었고 온몸에 보랏빛 반점이 뒤덮고 있었다. 의사들이 고개를 저을 때 나선 건 어머니였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무척이나 괄괄한 성품이었다는 어머니는 의사들 “다 비쳐라 내 아들은 내가 살린다” 하고 안마사를 초청하여 계속 몸을 주무르게 하며 아들을 소생시키려 발버둥쳤다.

그로부터 20여일만에 젊은 신부는 깨어난다. 아직 천주는 그를 데려가기엔 너무 이르고 세상에 그가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 신부의 이름은 김승훈이었다.

이북 출신의 무뚝뚝한 말투에다가 아무에게나 반말 비스무리하게 던지는 어법 때문에 원래 살가운 느낌은 주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고 후 더 어눌해진 말투 등 후유증으로 인해서 ‘정신병자 신부님’같은 오해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머리가 벗겨진 것도 역시 뒤끝 있는 사고의 소산이었고. 그는 부임지마다 신도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 때문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부임한 부산 태종대 공소에서 그는 뜻밖의 일을 경험하게 된다. 태종대는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고 자연히 그 이권을 노린 깡패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다.

그런데 한 노점상 할아버지가 장사를 하다가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깡패들은 노인을 실컷 때린 뒤 길바닥에 팽개치고 가 버렸다. 김승훈 신부는 영도경찰서를 찾아 이북 말투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호령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소?”

이미 경찰들과 유착관계였을 깡패들이 불법 노점상 하나 두들겼다고 해서 경찰이 대수롭게 여길 상황은 아니었다.

더욱이 김승훈 신부가 시끄럽게 하고 다니자 깡패들은 되레 자기들이 피해를 입었다며 진단서를 끊어 노점상을 고소해 버렸다. 그리고 끝내 노점상 할아버지는 구속됐다. 이에 분통이 터진 김승훈 신부는 매일같이 공소에서 노점상 석방과 깡패 처벌을 위한 기도회를 열어 문제 해결을 촉구하게 된다.

“저 이북말 쓰는 새파란 신부 도대체 누고?” 골치가 아파진 경찰의 요청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때가 되어서 그런 것인지 김승훈은 다시 서울로 불러 올려진다.

이즈음 김승훈 신부는 완연히 건강과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고 사회적 참여에 대한 통과 의례도 거친 혈기 넘치는 신부로서 서울로 귀환한다. 그리고 천주는 그에게 예수가 걸었고 그 제자들에게 가르친 길을 제시했다.

대표적인 이정표는 인혁당 사건이었다. 도대체 자신의 죄목이 무어라 공소장에 적힌 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사형 선고 다음날 목을 매달아 버린 독재자의 독기 앞에서 신부들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들어 억눌린 자 쳐들고 누르는 자를 제어하는 천주의 뜻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김승훈은 그 맨 앞에 있었다. 1976년 3․1 구국선언, 79년 YWCA 위장결혼 사건,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82년 반미성명서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머리숱 적은 신부의 모습과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김승훈

박종철 열사 추도식에서 추모사는 하는 김승훈 신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 허다한 사건과 사태의 무더기 속에서 그의 모습이 가장 거룩하게 빛난 순간은 1987년 5월 18일일 것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은 두 명으로 발표됐지만 사실 두 명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총대를 메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배신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토로하는 것을 교도관이 들었고 감옥에 있던 이부영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왕년의 동아일보 기자 이부영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보를 캐낸 끝에 끝내 축소 조작의 전모를 파악하고 나머지 고문 경관들의 이름까지 알아내 밖으로 빼돌린다.

그 시기 이런 일을 발표할 곳이라고는 오로지 정의구현사제단뿐이었다. 어느 야당 정치인은 이 정보를 듣고 “나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오!”라고 거절했다 한다. 하긴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사제단의 대표격인 김승훈 신부에게 부탁하려 했다. 그런데 당시 운동권의 마당발이라 할 김정남의 회고에 따르면 얘기하러 갈 때마다 김승훈 신부의 어머니가 곁을 떠나지 않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급기야는 전주의 문정현 신부를 대기시켜 놓은 상황에서 마지막 기회를 보러 갔는데 어떻게든 자리를 좀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는 함세웅 신부에게 김승훈 신부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괜찮아, 내가 다 알고 있어. 지금 무슨 중요한 일을 계획하고 있지? 꿈에 나라에 난리가 났는데 김승훈 신부가 큰 구덩이에 빠져 있더라고. 근데 성모님이 구해 주셨어. 얘기들 해.” 그리고 자리를 피하셨고 함세웅 신부는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항쟁 기념 미사가 끝나고 김승훈 신부는 단상에서 역사적인 문서를 읽어내린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조작되었다.”로 시작해서 “이 사건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고문 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중대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로 끝나는, 가슴 터지게 분노케 하고 머리털을 쭈뼛쭈뼛 세우게 만드는 폭로였다.

그 글을 읽는 김승훈 신부의 목소리도 크게 떨리고 있었다고 한다. 뚝뚝하기 이를 데 없고 거만하다고까지 오해받았던 그 목소리가.

그는 이것저것 직함이 많았다. 어디 고문, 어디 후원회장, 무슨 이사….. 무슨 신부가 그렇게 자리 욕심이 많으냐고 할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도무지 거절을 못했던 그의 품성 탓이라는 것이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의 증언이다. “스스로 꽃이 되고 과실이 되지 않으려는 신부님”이 박노해가 김승훈에게 바친 헌사였다.

그의 부임지는 신림동이나 시흥동, 동대문 등 가난한 이들의 터전이 많았다. 부자들 많은 여의도에도 잠깐 있었는데 오래 배겨내지 못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성당을 빌려달라고 하든, 돈을 좀 달라고 하든, 인쇄를 해 달라고 하든 그는 별로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시대의 요청에 부응했지만 그는 ‘투사’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협상가였고 나쁜 정부와도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고 여기는 ‘온건파’였다.

그는 교도소를 돌아다니며 장기수들에게 ‘전향서’를 써 내라고 권했다. “사제로서의 철학, 소신이었다고 봐요.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한 게 인권이다, 그 사람의 인권이 이데올로기에 묶여 구속된 상태로 놔두는 게 옳지 않다고 보시는 거예요.” 자신의 신념 하나로 수십년을 버텨온 이들에게 김승훈 신부의 설득은 야속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부는 그들의 까닭 있는 고난을 계속 지켜보는 것이 싫었으리라.

그러던 그가 2003년 9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을 요약한다면 역시 시흥동 성당에 부임할 때 했다는 그의 강론의 일부가 제일 제격일 것이다.

“제가 생각하는 저라고 하는 신부는 별로 재미있는 신부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 흘리는 신부입니다. 많은 어려운 사람들, 힘들어하는 사람들, 또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쁘게 찾아가는 신부입니다.… 아마 꽤 괜찮은 신부일 것입니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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